114화
“이이익…! 이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 네놈을, 반드시 네놈을 찢어발겨버리겠다!!”
‘하하하!! 이 몸은 마왕 아스타로트. 제 8석을 차지하고 있다. 네놈이 아크라는 녀석이냐?’
자신을 마왕 아스타로트라고 당당하게 소개했었던 녀석은, 지금 내 발에 머리통을 짓밟힌 상태로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기세등등하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흐으음.”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솟아오르기는 커녕 가소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겨나는 광경이었다.
마족들은 대체 뭘 믿고 언제나 저렇게 깝쳐대는 것인지!!
‘하지만, 그래. 이게 정상적인 모습이지.’
요즘 들어 리리스라는 마족들 중에서 특이 케이스로 꼽힐 녀석만 보아온 탓인지, 오히려 이런 꼴사나운 반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지기까지 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내 기분이 어떻건 간에, 녀석이 나에게 기어올랐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좀 더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의미로 녀석의 머리통을 밟고 있던 발에 좀 더 힘을 더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입은 잘 털어도 고통에는 약한 것이 마족들의 공통점이다. 정상적인 마족이라면 말이다. 아무렇지도 ㅇ낳게 자기 손으로 자기 뿔을 잘라내는 누구와 달리.
녀석의 정상적인 반응에 나는 다시 한 번 평온함을 느꼈다.
“…지금 뭔가 이상한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닌데? 기분 탓인 게 아닐까??”
나는 귀신같이 눈치를 챈 리리스에게 적당한 말을 내뱉어 대충 얼버무리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아크…씨?”
적당하게 거리를 둔 곳에서 멈춘 크리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어색하게 어깨를 살ᄍᆞᆨ 움츠린 상태였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크는 무슨. 원호야, 조원호. 왜 이래? 섭섭하게.”
“아― 역시, 그렇지? 설마 했네. 뭔가 분위기도 다르고, 자꾸 아크―아크― 거리길래 다른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조심해서 손해 봤네, 이거. 하하하.”
크리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말하는 내내 초조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아대고 있었다.
아마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런 크리스를 바라보며,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100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바뀌었으니까. 게다가 크리스에게는 몇 주도 되지 않은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방금 전까지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헌터들은 아스타로트와 게루타, 두 마왕에게 압도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마족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군림하는 마왕.
귀족급 마족도 제대로 상대하기 힘든 그들에게, 마왕이라는 존재들은 그야말로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일방적인 폭력에 해당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전투는, 싸움이라기보다는 놀이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렸다.
그리고 그 놀이판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던 중, 내가 나타났고, 나는 크리스와 헌터들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두 마왕을 단숨에 박살내버린 것이다.
[…괜찮아요? 아크.]
옆에서 내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녀석이다.
[응, 괜찮아.]
[역시 따로 아공간으로 불러내는 편이 더 좋았을 까요?]
[아니, 배려는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할 일이고, 예전처럼 감출 생각도 없으니까.]
나는 리리스에게 전음을 보내면서, 이곳에 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 * *
리리스의 회복이 어느 정도 끝나고, 그녀는 곧바로 아스트레아와 이어지는 차원포탈을 열었다.
“후우, 아크, 왜 이리 늦었는가.”
“야, 아크!! 이거 케이트가 갖다…주라고…….”
포탈이 열리자마자 아스트레아에 남아있던 녀석들이 이동해왔고, 아공간에 도착해 온 녀석들은 순차적으로 말을 잃었다.
점잖게 인사를 건네던 레온하르트와 김세율도, 신나게 선물상자를 흔들어대던 로크도, 심지어 어린아이에 불과한 애던까지도 말이다.
모두가 말없이 허공에 떠올라있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ᅟᅩᆺ에는 카오스 게이트가 열려있는 지구의 도시들이 나타나 있었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침착함을 되찾은 로이드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화면에는 베를린에서 혼자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유선이 나타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는 레온하르트가 아니라, 헌터 협회의 협회장 로이드였다.
“아크, 아니… 조원호. 왜 저런 상황을 진작에 전달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너는 왜 여기 앉아서 저걸 지켜보고만 있는 거지?”
로크, 아니 이태현은 초조함과 분노가 반쯤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침착한 것처럼 보였지만,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나라라도 팔아 먹었는 줄 알겠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지금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봐. 곧 끝나니까.”
“…너, 지금 그게 대체 무슨 의미―”
“잠깐 멈추게. 일단은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보이는군.”
로이드가 내 쪽으로 과격한 걸음으로 걸어오던 이태현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자세한 것은 설명을 들어봐야 할 테지만, 자네가 알고 있는 아크가 생각 없이 움직일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우선 진정하게.”
이태현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로이드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잠시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또 병신같이 날뛸 뻔 했군.”
이내 이태현은 이마를 짚고서 살살 고개를 저었다. 로이드는 그것을 보고 붙잡고 있던 어깨를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 말일세, 저 영상의 일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지만, 개인적으로 저기 서있는 숙녀분에 대한 설명이 더 급한 것 같구만.”
그렇게 말하며 로이드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고, 그 곳에는 공손하게 두 손을 포개고 서있는 리리스가 있었다.
“…마족이지 않은가. 어째서 여기에.”
로이드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김세율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놀란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 여러분. 일곱 대죄의 마왕 중 한 명, 리리스라고 합니다. 지금은 퇴직하고 나왔지만요.”
리리스는 공손하게 예를 차리면서 말했다.
“퇴직하고 나와…?”
“이봐, 로이드. 마왕이라는 게 그만두는 게 가능한 거였나봐?”
“크흠, 나한테 묻지 말게.”
리리스의 가벼운 농담에, 용사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걸 진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애매한 것이다.
“…일단은 아크가 곁에 두고 있는 걸로 봐서, 믿지 못할 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만. 그런가, 아크?”
“그래, 이 녀석은 믿을 만한 녀석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리리스는 내 동료야.”
“아, 아크…….”
“…??”
리리스의 격한 반응에, 나는 그녀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내가 했던 말에 대한 반응인 것 같기는 했다. 내가 말 실수라도 했나?
“대, 대체 뭔가, 저 소녀스러운 반응은?”
“내가 뿔 달린 녀석을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이상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 이쪽 반응들은 그래도 나름 공감이 가는 반응들이었다.
* * *
그 후, 나는 리리스에 대한 것들과 지금 상황에 대해 동료들에게 설명했고, 우리들은 리리스가 뒤틀려있는 차원 연결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연결이 회복되자마자 서로 사전에 점찍어두고 있었던 지역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중에서도 마왕 둘이 나타나 헌터 협회의 본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가장 상황이 급박한 뉴욕으로 왔고, 그 결과가 지금 이 광경이었다.
두 마왕은 나에게 단숨에 제압당했고, 크리스가 이끌던 협회의 본대는 다행히 회복이 가능한 선에서 피해를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는 지금 본대의 정비를 마치고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우선 크리스, 너희는 원래 협회 쪽에서 짜여져 있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위험한 불은 이미 꺼져있는 상태겠지만, 그래도 손이 부족하다는 건 여전하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리고… 말하는 게 좀 늦은 것 같지만, 고마워. 일이 끝나면 서울에서 크게 한 턱 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후, 크리스는 텔레포트로 몸을 감췄다. 뭔가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머쓱치 않은 기분에 혀를 찰 때였다.
그 때, 아직까지 발밑에 놓여있던 녀석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 언제까지 이 몸의 머리통 위에 발을 올려놓을 생각이냐!! 감히, 감히!!! 지금 당장―”
콰자자작!!
“아.”
나도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가 버렸다.
아스타로트의 머리통은 마나가 가득 실린 발에 뭉개져, 형편없이 찌그러들어 있었다. 머리통이 으깨져 단번에 즉사했는지 재생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크리스나 협회의 헌터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나름 브레이크가 걸려있는 상태였지만, 그 브레이크가 사라져버리고 나니 무의식으로 저지른 것 같았다.
“…리리스, 이거 어떻게 해? 죽어버린 것 같은데.”
이때까지 녀석들을 살려두고 있었던 건, 리리스가 캐낼 정보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난감한 심정으로 리리스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아,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다행히 포로가 하나는 아니니까요.”
리리스의 말에, 나는 구석에 놓여있던 다른 마왕, 게루타를 바라봤다. 녀석은 리리스의 구속 마법에 두 손과 두 발을 묶인 채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저, 저 말입니까…?”
녀석은 자신을 가리키며 뭐라 말했지만,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하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녀석, 마왕들 중에서도 제일 말단인 놈이라 별 정보도 없을 거라고 했던 건 너잖아?”
“그렇긴 한데, 누구께서 아스타로트를 밟아 죽여 버린 이상 저 녀석한테라도 캐내야겠지요.”
“큭…….”
그 당사자였던 나는 할 말이 없었기에,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리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 녀석한테는 방금 전의 일로 볼 일도 있어서요. 마침 잘 됐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비장하게 들려왔다.
‘방금 전…? 아.’
심상치 않은 그녀의 모습에 기억을 돌이키던 나는, 이윽고 게루타가 리리스에게 기세 좋게 떠들어댔던 말이 떠올랐다.
배신자라든가, 마족의 수치라든가, 창녀라든가. 뭐 그런 말들이 섞인 말이었다.
“아, 괜찮으시다면 잠시 자리를 피해주실래요? 아크.”
크리에이팅 마법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은 몰라도 그녀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이 고문도구로 쓰일 것들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그러지…….”
“고마워요.”
싱긋 미소를 지은 그녀는, 천천히 게루타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는 바늘통과 손톱깎이가 들려있었다.
“저, 저기, 리리스, 아니 리리스님. 리리스님?? 흐아아아악!!!”
게루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