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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11화 (111/135)

111화

[잠깐만, 좀 더 자세한 보고를 바란다.]

이소연은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통신을 보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었고, 통신을 할 때는 더더욱 적은 그녀로써는 조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무전도 듣지 못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 있거나, 이미 죽어버렸거나.

어느 쪽이건 간에 크림슨 레드가 나타났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위기상황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젠장, 이미 전멸 당했군.’

통신이 왔었던 해당 구역에 직접 감지망을 펼쳐낸 이소연은, 그 구역 주변에 살아있는 인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짓을 저지른 게 누구인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급하게 통신으로 외쳐댔던 것과 달리 크림슨 레드급은 아니었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마족이었다. 그것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딱 봐도 작위가 있을 게 분명한 상위 개체에 속하는 마족.

그는 지금 시체에서 단말기를 뜯어내어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 두어 개는 에테르 조절에 실패했는지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지만, 이번 건 좀 더 세밀하게 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뭐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허허, 다들 들리시는지?]

그 때, 무전을 통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것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오오, 잘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들려오는 군. 하하, 신기하구만. 이토록 체계적인 마나 시스템이라니. 배울 점이 있는 세계로구나.]

갑자기 그는 무전을 통해 감탄사를 내뱉으며, 시스템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다른 인원들도 이 돌발 상황을 눈치 챈 것인지, 쉴 새 없이 상황을 보고하던 무전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좋지 않군.’

이소연은 표정을 구기면서 미간을 좁혔다.

헌터들이 통신망으로 사용하고 있는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은, 그 무게 때문에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에 방해가 되는 무전기 대신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에게는 무전을 도청하려는 시도를 할 지능조차도 없었고, 설령 그런 지능이 있는 개체라 하더라도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기에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은 적이 도청을 하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 같은 게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갖출 필요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통신망은 대놓고 도청을 당하고 있었다. 마족이라는 종족들은 인간보다도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에 있어서 무전을 도청 당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패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드러나게 되며, 전술은 물론이고 전략까지도 노출된다. 상대 지휘관에게 관심법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범주 안의 일이야.’

그래도 마족이라는 존재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건, 이미 감안해두고 있었던 부분이다.

이소연은 조금 놀라있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사용하는 회선은 폐기. 본래 플랜 B로 예정되어있던 회선으로 통신망을 이동시킨다. 통신 체크는 지금으로부터 10분 후에 실시하도록 하겠다. 이상.]

회선이 도청을 당하고 있다면, 회선을 옮기면 그만이다. 도청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대처법 중에 하나이다.

[으음?! 이제 겨우 사용법을 알아낸 참이거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직 내 소개도 못했단 말이다! 비겁하게 나오는 구나!!]

통신망에 끼어들었던 마족이 적반하장 격으로 무전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전의 무전을 통해, 어렵게 열어낸 해당 회선이 쓸모가 없어진 걸 깨달은 것이다.

이소연은 마족의 무전에 코웃음을 치고서는 통신 회선을 완전히 절단시켜 폐기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회선에 시스템을 연결시키고, 다시 통신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걸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야.’

잠깐 동안은 도청에 대해서 안전하겠지만, 회선을 옮겼다면 회선을 옮긴 적의 단말기를 다시 빼앗으면 그만인 일이다.

머리통이 비어있는 몬스터들이라면 모를까, 상위 마족이나 되는 녀석이 그런 생각을 못할 리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회선을 옮겨야하는데, 회선을 옮길 때마다 쫓아오지 못하는 이탈자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건 필연적인 부분이었다.

이소연은 초조하다는 듯이 손톱을 깨물었다.

‘크리스 언니가 지원군을 데리고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카오스 게이트가 열린 각 지역에 S급 헌터 한 명씩을 배치해두고, 나머지 인원으로는 토벌대를 꾸려서 한 지역씩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는 것.

세계 각지에서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는 이 최악의 상황에서 협회 측이 취한 전략은 바로 이것이었다.

장거리 통신에 방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현재 진행상황 같은 추가적인 연락들은 주고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준비해뒀던 전략대로 배치가 끝났으며, 그대로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말은 전해들은 상태였다.

따라서 현재 단기적인 전략적 목표는, 크리스가 지원군을 이끌고서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었다.

‘…물론 지원부대가 도중에 괴멸당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아니, 아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떠올릴 때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던 이소연은, 그 생각을 잊으려는 듯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래 전략을 구상할 때에는 최악의 경우를 감안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실제로 그 최악의 경우가 들이닥쳤을 때, 조금이나마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의 지원부대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는 상태였고, 자신들은 이미 서울 시가지 코앞에서 수비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U턴은커녕 차선 변경도 힘든 상황이다.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크리스의 지원군 외의 다른 지원군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왠지 데모닉 게이트 때가 생각나는 데…….’

세부적인 부분들이 명백히 다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소연은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고, 위치도 거의 동일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 때도 이 주변, 제 7구역에서 후방전선을 펼쳤었고, 자신은 그곳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맡고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선도, 이태현도, 그리고 조원호도 없었다.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그 빈자리는 자신이 빈틈을 보였을 때, 잠시나마 그 틈을 메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실수가 곧바로 수비선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카엘라 언니랑 김세율 언니라도 있었다면 좀 더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 둘과는 1학년 팀으로써 조금씩이나마 함께 손발을 맞춰왔었고, 요즘에는 카오스 게이트에 대한 파견 팀으로도 자주 함께 나갔었다.

덕분에 이소연과 둘의 호흡은 상당히 잘 맞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둘은 그 힘과 능력도 A급 헌터를 뛰어넘어 S급 헌터의 문턱쯤에 도달해있는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이곳에 없었다.

둘은 긴급 소집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급하게 개별 호출을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응답이 없었다.

결국 급한 대로 이소연이 직접 탐색까지 나섰었지만, 그 둘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김세율은 약 2주 전에, 미카엘라는 며칠 전에 사라졌다는 정보를 전해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팀 A1, 구획 정리 마무리 완료. 통신 연결 호가인 바라며, 지시를 기다리도록 하겠음.]

그 때 새롭게 구축한 통신망을 통해 무전이 들어왔다. 나름 어려운 임무를 맡겼던 팀 A1, 팔란의 감시자들의 무전이었다.

‘…그래, 여기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지.’

다행히 아직 한국에는 전선을 구축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헌터들이 남아있었다. 헌터 강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헌터들이 다수 확보되어있었던 덕분이었다.

잘은 몰라도, 아마 다른 구역은 배치되어있는 S급 헌터 혼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꼴이 되어있을 것이다.

요 근래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각 개체의 수준도 늘어나면서, 이미 헌터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자체적인 토벌능력을 상실한 국가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이곳, 대한민국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헌터들만으로도 협회의 도움 없이 정상적인 수비전을 펼칠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자신은 지휘에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할―’

“호오, 그대가 지휘관인 모양이로군.”

“…!!”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소연은 급하게 에테르를 끌어올리면서 뒤쪽과 거리를 벌렸다.

“안녕하신가, 좋은 저녁이로군. 해질녘의 하늘이 아주 아름다워.”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족은 뒷짐까지 진 채로 먼 곳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놓고 빈틈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크윽…!!’

하지만 이소연은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 빈틈은 오만한 여유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조롱하고 도발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흐읍!!”

그 때 누군가가 그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지휘부의 호위를 맡고 있던 헌터였다.

“흐음.”

하지만, 눈앞의 마족은 턱의 수염을 살짝 쓰다듬으며 반대 손을 느긋하게 들어 올릴 뿐이었다.

따악.

마족은 들어 올린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와 동시에 달려들던 헌터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네는 생각이 조금 깊은 모양이로군.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그는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인의 이름은 마르바스. 현재 제 13석을 차지하고 있는 마왕일세. 그대의 이름은?”

자신을 마르바스라고 소개한 마족은, 이런 긴박한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이라고?”

그녀는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였지만, 당황스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평소라면 농담에나 어울릴법한 명칭이었지만, 실제로 몬스터와 마족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소연에게 그 명칭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혹시, 그 루시퍼라는 녀석도 마왕인 것인가?”

“루시퍼… 그 한심한 녀석을 말하는 건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 녀석도 마왕이지.”

대답을 마친 마르바스는 루시퍼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소연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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