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건 그렇고, 아크.”
리리스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크에게 말을 걸었따. 둘은 지금 리리스가 크리에이팅(Creating) 마법으로 만들어낸 의자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뭔데?”
“아까 메피스토 놈이 말하기도 했던 질문인데, 여긴 대체 어떻게 오신 거에요??”
리리스는 팔짱을 낀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로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물었다.
‘…?? 말투가 왠지 예전보다 거리감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인데…??’
예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리리스의 말투와 태도에서 아크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묘한 기운이라고는 해도 뭔가 꿍꿍이가 느껴지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모든 걸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묘했다.
핑크빛의 묘한 기운이라고나 할까.
“흐음, 왜요? 말해주기 싫은 거에요? 또 비밀인건가?”
당황스러움에 문득 말문이 막혀버린 아크를 바라보면서, 리리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 전보다도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따.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아크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질문에나 대답하기로 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지금의 그녀는 믿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감 정도는 허락할 수 있는 상대였다.
더군다나, 그도 이제 그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놀랍게도 말이다.
“크흠, …뭐 별 건 아니야. 여길 떠나기 전에 내가 너한테 잠깐 반지 좀 달라고 했었잖아.”
“아, 예. 그랬었죠.”
방금 전과 달리 아크가 태연한 모습으로 대답하자, 이제는 오히려 리리스가 살짝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 거기에다가 차원 표식을 남겨뒀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이야.”
“…? 그런 기색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는데요.”
“느끼지 못해야 정상이지. 애초에 그러라고 달아놨었던 표식이니까. 뭐, 내 나름대로의 특제라고나 할까.”
그 표식은 그의 셀프 기아스 능력을 응용한 고유 마법 중에 하나였다.
이걸 발견하려면 일반적인 감지가 아니라 기아스의 여부를 확인해야하는데, 상식선에서 봤을 때 사물에 기아스는 부여될 수 없었다.
“…하아. 그렇다는 건, 결국 저를 믿지 못했다는 얘기군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어요.”
그의 설명을 들은 리리스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음, 그런 게 아니라… 그 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대체 뭘 믿고 순순히 아스트레아로 넘어가냐?’
평소대로였다면, 아마 아크는 그녀의 눈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축 처져있는 리리스를 보고 있자니 난감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푸훕.”
그러던 와중, 리리스는 고개를 들어 아크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만족스러움이 담긴 짧은 웃음이었다.
“뭐, 뭐야. 왜 웃어.”
“아뇨, 그냥 좋아서요. 후훗.”
리리스는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그의 모습은 커다란 진보였으니까.
아크는 그녀를 바라보다 끝내 시선을 돌리고서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표식을 남겨뒀다고는 해도 분리된 차원을 넘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요??”
물론 아크에게는 차원석이 있었다. 그걸 그에게 다시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리리스 본인이었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차원석을 갖고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분리된 차원을 넘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차원석이 공간 마법계열에서 만능 아이템처럼 여겨지는 아티팩트라고는 해도 말이다.
“뭐, 사실… 여기로 통하는 길은 아르트가 열어준 거야.”
“…네? 누구요?”
아크가 가볍게 꺼낸 그 이름에, 리리스가 되물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가 꺼낸 말이 조금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르트. 용사 아르트 말이야. 네가 말했던 그 잘난 양반.”
“…?”
하지만 아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말했다. 리리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르트, 라고요…? 아니 잠깐. 그보다 정말로 아르트의 유적을 끝까지 돌파해냈다는 건가요? 고작 2주 만에?”
“2주?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준비기간을 빼도 거의 100일은 걸렸는데?”
“하지만, 당신이 아스트레아로 간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는 걸요.”
그의 말에 리리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말 안했었구나.’
리리스는 아직 아스트레아와 지구 사이에 시간축이 뒤틀려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번에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 아크는 일부러 그녀에게 그 사실을 감춰뒀었다.
조금 늦었지만, 아크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아스트레아와 지구의 시간축이 10:1로 차이가 나고 있다는 거군요. 그래서 제가 아공간에 박혀있던 2주 동안 당신은 100일을 훨씬 넘기는 시간을 보낸 거구요.”
리리스는 약간 툴툴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상황을 요약했다. 그가 그녀에게 또 정보를 숨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며칠 전에 아르트의 유적 최심부에 도달했었어.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몇 시간 전이겠군.”
허나 아크는 다른 눈치는 몰라도 여자에 대한 눈치 하나는 멸종 수준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지. 그리고 며칠 전에 아르트의 유적 최심부에 도달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지.”
잠시 동안 유적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다가, 아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표정을 찌푸렸다.
두 자리 수를 가뿐하게 넘어가는 말도 안 되는 지하 층 수, 시공결계로 왜곡되고 뒤틀려있는 공간, 공작급 마족 정도는 간단하게 쌈 싸먹을 수 있을 수호골렘들.
그리고 설치자의 악의가 느껴지는 절묘한 함정들과 공간마법까지도 차단하는 대규모 차단결계.
최심부에 가까워졌을 때는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만했다. 그러고도 겨우 살아남았다.
만약 다른 용사들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서 갔다면 그곳에서 죽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거기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을 지도.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유적의 끝에서, 그는 그 때까지도 남아있던 아르트의 영혼과 만났다.
‘호오, 누가 여기까지 온 건 퍽 오랜만이군. 정당하게 시련을 돌파해낸 건 처음이고 말이야.’
아크는 아르트와 만났을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첫 번째 용사이자 신살자…인가.’
아크는 테이블 옆에 기대어 세워져있던 미스틸테인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검에서는 예전과 다른 영롱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그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아크는 손에 쥔 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검인 것처럼.
“…아크?”
“아, 미안. 지금 무슨 이야기 중이었었지?”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고, 아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처럼 얼 타는 반응을 보였다.
“몇 달에 걸쳐 유적을 헤맸고, 며칠 전에 최심부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리리스가 대답했다.
“아, 그랬지. 근데 그 이후로는 별 거 없어. 제국 수도로 돌아와서 애들한테 작별인사 대충 하고, 너한테 연락을 보냈었지.”
“아, 그게 방금 전 일이군요.”
“나한테는 좀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지.”
다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반지를 작동시켰었지만, 리리스의 대답은 없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연결 자체가 끊겨 있었다.
당시, 그는 리리스에게 배신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던 사항이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표식을 남겨뒀었으니까.
단지 조금 실망을 느꼈을 뿐이었다.
리리스는 다른 마족과 다르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차원석으로는 아스트레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게 돌발 상황이기는 했지.’
당당하게 차원석을 들어 올리고 차원의 틈을 열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크는 그 때의 당황스러움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아르트의 도움을 받아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영락없이 아스트레아에 갇혔으리라.
“마나는 얼마나 회복됐어?”
아스트레아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던 아크는 문득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다른 용사들 생각이 났고, 보채듯이 리리스에게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졌지만… 차원 포탈을 여는 건 아직 좀 무리가 있네요. 미안해요, 아크.”
“아냐. 어쩔 수 없지. 도움 받는 입장인데 뭘.”
유적에서 여태동안 신나게 굴렀으니, 휴식시간 정도는 조금 오래도 가져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왔었지.’
작별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수준의 작별인사였다. 그 생각을 떠올리면서 아크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스트레아에 있는 동안 제국으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기에, 좀 더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국가 행사 수준의 송별회가 이뤄졌을 것이다. 그건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물론 자기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둥, 영웅이 아니라는 둥 같은 답답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카를라의 말대로, 어쨌거나 자신은 그들의 영웅이 되어있었으니까.
그는 ‘용사 아크’뿐만 아니라 ‘영웅 아크’까지도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마쳤다. 그걸 계속 거부하는 것은, 또다시 현실에서 도피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대접은 좀 꺼려진다는 말이지.’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그런 과장된 대접은 그가 바라는 게 전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웠다.
아마 지금쯤 자기 몫까지 로크가 열심히 놀고 있으리라.
‘그리고 애던도 신나게 놀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손, 애던.
아스트레아에 있던 시절, 그녀는 암흑가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또한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암살자 길드에 소속되자마자 해당 길드를 단숨에 평정하고 우두머리 자리에 올라섰으며, 당시 자신을 방해하던 암흑가의 거물들 목을 죄다 따버린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길드는 순식간에 암살자 길드들 중에서 최고 위치에 올라섰고, 그녀의 이름과 이명은 공포의 대명사로 불렸다.
심지어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길드가 남아있었고, 그 길드원들이 그녀를 신처럼 숭배하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상황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크 자신도 그녀와는 최대한 마찰을 피하려고 했었다. 정면 싸움이라면 모를까, 기습으로 인한 선제공격을 허용한다면 그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애던이, 꼬맹이로 나타나다니 말이야…….’
그녀가 활동했었던 암살자 길드, ‘일곱 개의 밤’에 애던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을 때,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보이는 꼬맹이였다.
‘이 분이 바로 애던님의 환생이십니다.’
당당한 표정으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길드의 수장의 얼굴이, 아크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