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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08화 (108/135)

108화

쩌저적.

순간적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을 뿜어냈던 반지는,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치 풍화되는 것처럼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반지가 사라지는 상황이었지만, 리리스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찢어버릴 예정이었던 검은 벼락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가 휘두른 검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검의 주인도.

‘아크…?’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아스트레아에, 지구와는 분리된 차원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반갑다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벼락이나 내리꽂히고 말이야. 휴, 아직도 손이 저리네.”

죽기 전에 보이는 환상 같은 걸까.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인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툴툴거리면서 저린 손을 털어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또한 현실적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대충 짐작은 가지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리리스.”

얼핏 까칠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상냥함이 숨어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리리스는 긴장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크, 아크에요…?”

“그래. 그럼 내가 아크지 누구겠냐.”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는 리리스에게, 아크는 시선을 피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말도 안 돼!!”

그 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메피스토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을 뛰어넘어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 네놈이,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아무리 아크라고해도, 고작 인간 따위가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차원을 넘어올 수가 있단 말인가?”

“…글쎄, 넘어올 수 있었으니까 지금 여기에 와있는 게 아닐까?”

당연한 걸 묻고 있네.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메피스토를 바라보며, 아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내가 너라면, 기습을 해보든가 도망을 치든가 일단 움직이고 봤을 텐데 말이야.”

“…크으윽!!”

아크의 말에, 메피스토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 놈!! 네 노옴!!”

전부 끝난 거나 다름없던 상황이었는데, 저 인간이 모든 걸 망쳐놨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그의 분노는 더욱 컸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메피스토는 아크와 루시퍼의 전투를 지켜봤었다.

아니, 그건 전투라고 할 수 없었다. 아크가 루시퍼를 압도적으로 짓밟았으니까. 그건 일방적인 유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크에게 진 건 어디까지나 루시퍼지, 자신이 아니었다. 루시퍼야 마나만 잔뜩 가지고 있었지 제대로 된 전투경험 하나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저 정도라면, 여차할 때 자신 혼자서도 어떻게든 처리해낼 수 있다.

그게 아크와 루시퍼의 전투를 지켜본 메피스토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뭐냔 말이다, 저 말도 안 되는 힘은!!’

그 때 봤던 아크는, 루시퍼에 비해 부족한 힘을 수많은 전투 경험과 몸에 배인 센스로 극복해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때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자신의 기운들도 점차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나가 자신과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의미했다.

‘한낱 인간이, 군주급의 마족과 비슷한 수준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설마.

문득 메피스토의 머릿속에는 아스트레아에 남아있던 유적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르트의 유적.

하지만, 어떻게?

그곳은 마왕들조차도 꺼려하는 곳이다.

실제로 바알이 휘하의 세 마왕, 바르바토스와 포르네우스, 그리고 발자크를 보냈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었다.

‘그걸, 고작 2주 만에 돌파해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그가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단 기간에 그곳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지금 그가 저 힘을 어떻게 얻었냐는 정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와 전투를 벌인다면, 자신에게 승산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뭐하냐? 안 움직이냐?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안 붙잡을 게. 빨리 가라. 아니면 들어오든가.”

까드득.

아크는 한 쪽 어깨에 검을 얹어놓은 채로 불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크의 말투에, 메피스토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한낱 인간 주제에, 자신을 내려다보다니.

당장에라도 찢어발겨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쯧, 차라리 저 배신자 년 목을 처음부터 깔끔하게 따버렸다면.’

메피스토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리리스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녀를 죽인다는 결정을 조금 더 빠르게 내렸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으리라.

그녀를 죽이지 못한 채로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제압하고 반항을 받아주느라 소모됬던 자신의 힘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이 온전한 상태였으면, 여기서 아크와의 전투도 고려해볼만한 선택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리스를 상대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써버렸다. 그녀를 생포해야했던 입장이었기에 회복마법까지도 걸어줬었다.

만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도 전투를 신중히 고려해야봐야할 상대인데, 지금의 잣니은 많이 쳐줘도 7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상태였다.

‘…바알 녀석 좋은 일만 시켜줄 수는 없지.’

메피스토는 평소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방심시키거나 도발하기 위해 만들어낸 모습에 불과했다. 그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만약 여기서 아크와 전투를 벌이고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동귀어진이라도 해버린다면 좋아할 녀석은 바알뿐이었다.

“…다음에는 지구에서 보자고.”

퇴각으로 결론을 내린 메피스토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말을 마치며 그는 손가락으로 공간을 찢어 차원의 틈을 만들어냈다.

“그 때는 그 재수 없는 얼굴이 울상으로 구겨지도록,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메피스토는 차원의 틈으로 넘어갔다. 그가 넘어가자 차원의 틈은 순식간에 메워졌고, 주변에 가득했던 그의 기운도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후우, 싸우지 않고 잘 끝냈나.’

메피스토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아크는 남몰래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대충 급한 불은 꺼둔 셈이었다.

리리스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서 이동해왔던 것이었지만, 다른 군주 급의 마왕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아크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아마도 메피스토라는 녀석이겠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보랏빛 머리.

기분 나쁜 면상에 기분 나쁜 의상.

루시퍼가 말했던 메피스토의 외관적 특징은 그것뿐이었지만, 녀석을 본 순간 ‘아, 저걸 말한 거로군’이라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만약 이대로 전투를 벌였다면 승리를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터무니없이 많은 힘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감당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실제로 지금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마구잡이로 주변에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빈사상태의 리리스까지 지키면서 싸우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배신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아크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일어서고 있는 리리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었고, 실제로 여기 온 것도 그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처절하게 당해있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나타났을 때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하고도 애절했다.

거짓 따위는 일절 담겨있지 않은 그 시선과 마주했을 때, 그의 의심은 이미 눈 녹아내리듯이 녹아버렸다.

“…어깨 줘봐.”

“아, 고, 고마워요… 아크.”

리리스가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크는, 보다 못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

“…….”

일단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왠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부축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말이다.

“흠, 크흠.”

결국 그 어색한 침묵을 이겨내지 못한 아크가 헛기침을 하며 빠져나왔다.

“저기… 아크.”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리리스가 쭈뼛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겸사겸사 한 것 뿐인데 뭘 그렇게…….”

아크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아크는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얘 진짜 마족 맞아?’

이제는 리리스의 종족에 대한 의구심까지 품으면서, 아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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