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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05화 (105/135)

105화

“하아… 미친. 뭐 줄어드는 꼴을 못 보겠네.”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더미들을 바라보면서, 유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서류더미의 양은 쌓여있는 것만 바라봐도 한숨이 절로 나오고 숨이 턱 막히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크림슨 레드 목을 따오는 게 마음이 편하겠네.”

임시로 세워진 새로운 협회 본부의 협회장실 안에서, 유선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면서 다리를 꼬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인 유선은 이윽고 길게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더미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오늘 내로 결제해야하는 문서들이었다.

‘류환이라도 불러오고 싶은 심정이구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류환은 지금 한국에 남아서 자신의 원래 업무들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재 독일의 헌터 협회는 거의 괴멸 상태에 놓인 상태였다.

저번에 루시퍼가 나타나 마법들을 퍼부었을 때, 협회 본부는 거의 반파 상태가 되어버렸고, 본부에 남아있었던 사무 인원들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덕분에 협회는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기존이 역할을 수행하는 건 큰 무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루시퍼가 사라진 후, 설상가상으로 S급 헌터 중에 세 명이 사라져버린 상황이었다.

S급 1위의 이태현.

S급 3위의 로이드.

그리고 유선이 생각했을 때 지금 헌터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조원호.

이 셋은 하나같이 S급 헌터들 중에서도 정예로 꼽힐만한 인원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로이드는 협회장이었다. 원래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거지같아도 이렇게 거지같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다시금 엿 같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유선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협회를 해산시킬 수도 없었고, 협회 활동을 잠시라도 정지시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고, 카오스 게이트들 또한 계속해서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빈도는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뭔가 보람이 없어, 보람이…….’

조원호가 루시퍼를 물리쳤을 때, 유선은 뭔가 드디어 끝장을 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 때 주변에 다른 S급 헌터들도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루시퍼라는 녀석은 그 정도의 강적이었으니까.

게임으로 에를 들자면 최종보스에 해당되는 녀석이었다. 최종보스를 잡았으니 이제 남은 건 게임을 끄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게임이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온 것처럼 조금씩 몬스터들의 물량이 많아지고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빈도도 잦아지고 있었다.

마치 스테이지 난이도가 점차 상승하는 것 같은 꼴이었다.

“후우… 적어도, 녀석들이 돌아올 때까지 만이라도 버텨내지 못하면…….”

유선은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는, 그대로 멍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사뭇 진지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유선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선은 평소 직감이라는 것을 그다지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이 직감을 믿고 싶었다.

아니, 자신의 직감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남은 길은 파멸뿐이었으니까.

“…하아. 버텨내려면, 일단 이것들부터 처리해볼까.”

유선은 반 정도 피워낸 담배를 재떨이에 대충 비벼 끄고서, 허리를 세우고 책상에 앉아서 펜을 들어올렸다.

* * *

“우으… 다녀왔어.”

복도 너머에서 에테르의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문을 열고서 크리스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으며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 그래. 고생했다. 이번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구만.”

저번에 방 안으로 크리스가 텔레포트 해왔을 때를 떠올리면서 유선이 말했다. 그 때는 텔레포트의 여파로 방 안에 쌓여있던 서류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렸었다.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뭐 나도 학습 능력이라는 게 나름 있으니까.”

“다음부터도 모쪼록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네.”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하자, 유선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짜증도 섞여있는 말투였다.

“로이드 때는 서류가 쌓여있던 적이 없어서 어디로 들락거리던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지.”

“하. 그러면 여기 앉아서 같이 서류작업이나 할래? 그러면 방 안에서 텔레포트를 하건 워프 포탈을 열건 일절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흠, 미안. 그건 조금 싫네.”

유선은 살짝 발끈한 목소리로 말했고, 크리스는 살짝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도와주기 싫은 건 아니지만, 나도 할 일이 많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크리스의 말도 안 되는 기동력은 다른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가 없는 가장 절실한 것이었으니까.

“…한동안 S급 헌터가 움직일만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잠깐이나마 쉬고 있어.”

하긴, 사실 지금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건 크리스가 아닐까. 유선은 그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에게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그래봤자 2시간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말이야.”

유선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는 접객용 테이블에 앉았다. 푹신한 감촉이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니 이블아이… 아니, 소연이는 어디다가 두고 왔냐?”

문득 크리스와 함께 파견을 나갔었던 이소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유선이 물었다.

“잠시 일이 있다고 따로 나갔어. 아마 항성 가던 곳에 가있지 않을까.”

크리스는 유선의 물음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녀는 아공간 결계에서 다도 세트를 꺼내 한참 차를 우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편리한 마법이란 말이야. 원호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둬야겠어.”

아공간 결계에 다시 손을 집어넣어 티스푼 하나를 꺼내들면서 크리스가 말했다.

그녀는 조원호가 미스틸테인을 꺼내드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개인 수납용 아공간을 만들어냈다.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구로 말이다.

다른 세계의 마법사들이 본다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할 광경이었지만, 그녀는 태연한 모습으로 차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거길 또 갔다고? …쯧. 거기 가봤자 시간낭비라고 분명 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유선은 크리스가 선보이고 있는 마법에는 조금의 관심도 보내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보다는 이소연이 신경 쓰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 어때. 어차피 무슨 일 생기면 우리보다 소연이가 더 빨리 눈치 채잖아. 일 생기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여태동안 그래왔듯이 말이야.”

크리스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일도 안하고 서류나 수집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유선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말했다.

“지금 상황이 그리 좋은 상황만은 아니라고. 방금 전까지 현장에서 직접 보고 왔으니 더 잘 알 테지만 말이야.”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꼭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

유선의 말에 크리스가 대답했다.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마음과 행동은 별게야.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아무리 마음이 기울어도 정신만 차리면 자기 행동 정도는 휘둘리지 않고 간수해낼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쯧.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선은 혀를 차면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들었다. 그녀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은 짜증보다는 걱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들고 있던 펜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 * *

이소연은 반 폐허가 되어있는 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주변의 에테르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쯤이 적당한가.”

이윽고 에테르의 흐름이 가장 격렬하게 느껴지는 위치를 찾은 이소연은 그곳을 중심으로 감지망을 펼쳐냈다.

감지망의 범위가 넓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자세하게. 그저 예민하게.

조그마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는 같은 곳에서 방식을 바꿔가며 몇 차례고 탐색을 반복했다. 평소 자신의 감지 능력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원래 헌터 협회 본부가 있던 곳, 즉 루시퍼와 조원호가 싸움을 벌였던 곳에서 탐색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원호가 루시퍼와 함께 사라졌던 주변을 탐색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여기도 꽝인가요.’

결국 같은 장소에서 십여 차례 탐색을 반복했던 이소연은 이번에도 자신이 장소를 잘못 잡았다는 걸 인정했다.

조원호가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우. 분명 돌아온다고는 했지만…….”

약 이주일 전, 그와 헤어졌을 때 이소연은 다시는 그와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직후 로이드와 이태현도 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임무가 없을 때는 이 주변에 찾아와 탐색을 하는 게 일과가 되어버렸다.

비록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얻지 못하고 헛수고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탐색을 하러 나와 있을 때만큼은 마음이 편안했다.

일단 다시 자리를 옮기자.

그렇게 생각하며 이소연은 감지망을 펼쳐냈다. 방금 전 조원호의 흔적을 찾아 탐색할 때와는 달리 얕고 광범위한 감지망이었다.

그러다 이소연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해냈다.

‘…이건.’

급작스러운 에테르의 흐름이 느껴지며, 그와 동시에 대량의 차원에너지가 모여들고 있었다. 요 근래 자주 느꼈었던 현상이었다.

카오스 게이트.

이런 현상은 다름 아닌 카오스 게이트의 전조 현상이었다.

“카오스 게이트인데… 수가 많아?”

하지만 에테르의 정도와 차원에너지의 양이 압도적으로 달랐다. 게다가 게이트의 핵처럼 보이는 중심점들도 하나가 아니었다. 대충 느껴지는 것만 해도 네다섯 개는 되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데모닉 게이트.

예전에 한 번 겪었던 최악의 사건을 떠올리며, 이소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열리는 카오스 게이트는 하나하나가 데모닉 게이트와 버금가는 규모로 열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부조리한 상황에도 정도가 있다.

하나만 열리더라도 비상이 걸릴 상황인데, 네다섯 개가 한꺼번에 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야근의 예감이네.”

이소연은 아직 벗지 않았던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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