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움직인다
“그래서, 고대 황제의 유적으로 가야 한다고??”
“고대 황제의 유적이 아니라 아르트의 유적이지만…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 맞아. 애초에 우리가 여기 온 것도 그거 때문이고.”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턱을 괸 상태로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허, 네가 웬 일이냐. 마족 말을 다 믿고.”
“믿는다기보다는, 그 말을 따르는 쪽이 더 승산이 있어 보이니까 따랐을 뿐이야.”
“흥, 그게 그 말 아니겠냐.”
로크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쥐고 있던 술잔을 살짝 들어올렸다.
“일단 정리해보자. 고대 황제, 아니 아르트의 유적에는 용사의 제단이 있고, 거기에는 죽은 다른 용사들의 힘이 모두 모여 있다는 거지??”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있는 힘을 해방시키면, 갈 곳을 잃게 된 힘들이 우리에게 들어올 거고?”
“그런 거지. 간단하잖아?”
그는 잠시 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지금 간단한 게 문제가 아니잖냐.”
한숨을 내뱉은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였다. 술을 들이킨다기보다는 남아있는 취기를 유지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험가 길드에서 내려오던 말 중에 그런 게 있었지. 목숨을 버리면서 돈을 얻고 싶으면 전쟁터에 용병으로 들어가고, 목숨을 버리면서 명성을 얻고 싶으면 황제의 유적으로 들어가라고.”
로크가 한 말을 들어본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대 황제의 유적이 위험하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는 너무 위험해. 애초에 정보가 너무 없어. 발견된 지 적어도 몇 백 년은 지났는데 마치 새롭게 발견된 신규 던전처럼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게 뭘 의미하는 지는 너도 알겠지.”
“…다 죽었다는 뜻이겠지.”
유적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말 그대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로 전멸 당했다는 뜻이다.
“그 말대로야. 의뢰서를 꼬나 쥐고 유적 안으로 들어섰던 숱하게 많은 모험가들도, 제국의 탐사대들도 전부 몰살당했다고. 아니, 몰살당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 다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안에서 살림 차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비교적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로크가 말했다. 말하면서 코웃음을 치는 게 대놓고 농담조였다.
“그 날고 긴다던 빌 루딘도 관 짝 짜였던 곳이 황제의 유적이야. 근데 거길 지금 가자고?”
“그런데?”
“허.”
녀석은 짧은 탄성을 내뱉고서는, 한 쪽 눈을 살짝 치켜세웠다.
“물론 네가 빌 루딘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야 마력은 아크, 네 쪽이 몇 배는 더 강력하겠지. 하지만 유적 탐사는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막말로 너 함정 같은 거 해체할 수 있어?”
“…함정 해체가 내 전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왕성들을 혼자 돌파해서 마왕 목따온 건 폼이 아닌데.”
그야 베고 부수는 게 내 전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마왕성 세 개를 전부 돌파하고 니드호그의 신전에 몰래 잠입한 전적이 있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함정 정도는 설치되어 있었고, 때로는 그야말로 마족들이나 설치할법한 것들도 있었다.
“어, 그건… 그렇네.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군.”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지만, 로크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로크. 다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야. 적어도 한 명은 그곳에서 빠져나왔어. 검까지도 하나 챙겨들고서 말이야.”
“뭐? 설마… 네 이야기냐?”
로크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나를 쳐다봤고, 나는 긍정의 의미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스틸테인을 얻은 곳이 바로 황제의 유적이었지.”
“진짜? 말도 안 돼!!”
녀석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거기엔 어떤 몬스터가 나와? 안에 느낌은 어때? 얕은 지하가 넓게 펼쳐진 느낌이야? 아니면 밑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느낌인가? 어?”
“이, 일단 진정해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갑자기 달려드는 로크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버렸고, 나는 내 어깨를 붙잡고 열정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로크를 밀쳐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황제의 유적이 소문처럼 절대적으로 위험한 곳은 아니라는 거다. 과거에 내가 미스틸테인을 들기 전에 갖고 있던 힘 정도만 있어도 유적을 탐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
“…너 되게 쉽게 말하는데,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 찾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 길드에 등록된 모험가 전체를 뒤져봐야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도만 나오겠지.”
로크가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그야 나도 알고 있지. 누가 모험가들을 데려간데? 그런 녀석들 고용하지 않아도 쓸 만한 녀석들이 있잖아. 네 명씩이나.”
“…하, 결국 팀 멤버는 정해져있다, 이건가… 어쩐지 네가 아직도 수도에 남아있다 싶었다. 추억팔이가 아니라 그냥 대기 중이었을 뿐이구만.”
“마음대로 생각해라.”
로크는 턱을 살짝 짚은 채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잠시 내려놓았던 술잔을 다시 들고서 한 모금 들이켰다.
“후, 사실 술집 안에서 너를 봤을 때부터 ‘귀찮은 일이 생기겠구나―’하는 직감은 들었었지. 마치 데자뷰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말이야.”
“데자뷰…? 니드호그 때 일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지.”
그러고 보니 니드호그의 신전에 가기 전에 로크를 고용했던 것도 이 술집에서였다.
그 때는 테이블에 엎어져있던 오늘과 달리 단원들과 신나게 술을 퍼마시고 있던 중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르트의 유적인가.”
녀석은 가게 안의 천장을 바라보더니, 문득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잔을 들고 있는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좋아. 가자고. 애초에 힘은 나눠먹는데 고생은 혼자 시키면 좀 찝찝한 일이지. 빨리 집에 가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허. 무슨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생색내고 자빠졌네.”
나 역시 들고 있던 잔을 로크에게 내밀었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남아있던 술을 각자 입 안으로 넘겼다.
가게의 문틈 사이로 아침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 * *
“근데, 다른 애들은 어떻게 찾으려고?”
“다른 애들?”
“나랑 둘이서 달랑 갈 건 아니잖아. 로이드… 아니, 레온하르트도 찾아야 할 거고, 애던도 찾아야지.”
내가 되묻자 로크가 말했다.
“레온하르트랑 애던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둘 다 올 곳은 뻔하니까.”
레온하르트는 새벽의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고, 애던은 아스테라 어세신 길드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새벽의 기사단과 어세신 길드의 공통점은 둘 다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둘은 웬만해서는 그쪽에 들르겠지. 먼저든, 나중이든.’
그리고 용사들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케이트에게 부탁했었다.
케이트는 카를라의 정보망을 그대로 물려받은 상태였다. 아스테라 안에서 벌어진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정보상보다도 빠르게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아크님께서 부탁하시는 건 국고문을 열어서라도 도와드리라는 할머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국고문까지 열라는 건 좀 오버인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케이트에게 부탁을 했었던 순간을 떠올리다 괜히 뻘쭘한 기분이 들어 턱 밑을 더듬었다.
“흐음…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했던 김세율이라는 아가씨도 여기 와있는 거 아니냐?”
로크는 뭔가 번뜩 생각이라도 난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말했다.
“와 있겠지. 아마도.”
“…이쁘냐?”
“…….”
나는 황당한 기분을 그대로 담아 로크를 쳐다봤다. 아마 내 표정은 질색한 표정이 되어있으리라.
“너 지구에서는 좀 바뀐 것 같더니 여기 와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
“아니? 지구에서도 이랬는데? 단지 여기는 중세고, 지구는 현대니 때와 장소를 조금 더 가리게 됐었을 뿐.”
녀석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도 간간이 눈알이 돌아갔다. 녀석의 시선을 쫓아보면 언제나 꽤 이쁘장한 여자들이 나타났다.
“…쯧.”
지구에서 녀석을 봤을 때 조금은 점잖아졌다고, 외견뿐만 아니라 정신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뻐? 아니. 됐다. 넌 여자 보는 눈이 없으니 내가 직접 보는 게 낫겠지.”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없다고?”
“주변에 모델 정도는 가볍게 쌈 싸먹는 애들이 잔뜩 있는데도 못 알아보는 데, 그러면 여자 보는 눈이 없는 거지.”
“내가 너처럼 공과 사도 구별 못하는 놈으로 보이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내 기분이 살짝 언짢아졌다는 걸 느꼈는지, 로크는 태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하하, 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 김세율이라는 애는 쓸 만해?”
“…뭐, 나름. 그래도 정령의 축복을 받은 녀석이라 번개마법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해. 한 때 프로 헌터로도 활동했던 녀석인데, 몰라?”
“프로 헌터? 김세율? …잘 모르겠는데. 난 A급 이상부터만 기억해서 말이지. 혹시 이명도 있어?”
“기린아. 기린아 김세율.”
“오! 알지!! 기린아가 김세율이었구나.”
“역시 알고 있었나봐?”
하긴, 비록 도중에 그만두기는 했어도 한 때 천재 에스퍼로 이름을 날렸던 스타 헌터 중 한 명이었다.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럼!! 저번에 맥짐에서 섹시한 여헌터 특집을 했었는데, 거기서 청초하게 섹시한 헌터로 나왔었지. 그게 몇 월 호에 실려 있더라.”
“…갈 길이나 가자.”
예전에 읽었던 성인 잡지의 기사를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는 로크를 뒤에 두고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었다.
두 블럭 정도를 걷자, 아스테라 번화가 중심의 광장이 보였다. 광장 가운데에 놓인 분수대가 화려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햇빛이라도 쬘까’ 하는 생각에 적당한 벤치에 앉으려하고 있었는데, 조금 특이한 광경에 시선이 갔다.
‘뭐지…?’
광장의 한 구석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수상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습이기는 했다.
나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 무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주위에 모여 있는 건 죄다 남자들이었다.
“…넌 대체 언제 온 거냐.”
“이쁜 여자의 기운이 느껴졌거든.”
어이없게도, 그 무리 가운데에는 로크가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서 허리를 펴고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놈이다.’
녀석에 대한 평가를 마치고서,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이 보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뭔데 이렇게 사람들이 모였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나 또한 남자였으니까.
“…?”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조금 의외의 광경이었다.
그곳에 있는 건 서점이었는데, 카페도 겸하는 지 가게 앞에 테이블과 세련된 디자인의 파라솔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는 눈에 익숙한 여성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 수도 내 서점에서 운 좋게 일할 기회가 생긴 덕분에 말이지.’
‘서점? 혹시 그 광장 분수대 주변에 있는 곳?’
‘맞아!! 어떻게 알았지? 그거 참 신기한 일이군.’
과거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동시에, 그녀가 일했었다던 서점의 위치가 바로 저기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음, 실물이 더 이쁘군.”
로크는 팔짱을 낀 채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