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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03화 (103/135)

103화

짤랑… 짤랑.

“…흠.”

선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낯선 분위기에, 나는 내가 찾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스테라 중앙 골목의 선술집 ‘노래하는 고래’

이곳은 항상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매력이었지만, 지금은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었고, 마치 주위에 냉각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짙게 내려앉아있었다.

가게 안의 분위기는 선술집이라기보다는 어디 한적한 구석의 바에서나 찾아볼 법한 분위기였다.

나는 약간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게 주인에게 마실 것을 주문하고는, 유일하게 사람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어색한 공기에 싸인 가게 안을 걸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로크.”

로크는 술병 하나를 왼손에 꼬나 쥔 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엎어져있었고, 주변에는 이미 빈 술병들이 여럿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자리의 주변에는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는 핏자국들이 흩뿌려져있었다. 치우고 닦아낸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선명히 보이는 혈흔들이었다.

그 혈흔들을 바라보며 가게 안의 분위기가 대체 왜 이 모양이 되었는 지를 대략적으로 추측하며, 나는 로크가 앉아있는 자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뭐냐, 아크냐.”

이태현은 날카롭게 치켜뜨고 있던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술병의 병목을 꽉 쥐고 있던 오른손의 힘도 느슨히 풀렸고, 은근하게 뿜어내던 살기도 가라앉았다.

“아크가 아니라 조원호… 아니,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나.”

어쨌거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아스트레아였다.

그 때문인지, 나를 아크라고 부르는 게 부끄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 케이트를 따라 황성에 찾아갔을 때도 아크라고 불리는데 조금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애초에 나도 그를 로크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선술집에 자빠져있는 그를 본 순간, 나는 ‘이태현’이라는 그의 본명보다 ‘로크’라는 가명이 먼저 떠올랐었다.

“꿀꺽, 꿀꺽.”

고개를 들어 올린 로크는, 눈앞에 앉아있는 내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쥐고 있던 술병을 들고서 내용물을 들이켰다.

‘…샐러맨더의 불꽃이군.’

샐러맨더의 불꽃.

독하기로 유명한 독주 중에 하나로, 불을 붙이면 불이 붙는 걸로 유명한 술이기도 했다.

“후우우우우…….”

로크는 샐러맨더의 불꽃 한 병을 단숨에 비워낸 후, 길게 한숨을 뿜어냈다. 이제 보니 주위에 굴러다니는 술병들도 독주로 유명한 것들뿐이었다.

그의 한숨이 독주를 연달아 비워낸 탓에 올라온 것인지, 아니면 견디다 못한 그의 감정이 새어나온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거 참 거지같은 일이란 말이지. 용사가 된 이후로는 맘대로 취할 수도 없어.”

로크는 거의 텅 빈 술병을 살살 흔들면서 한탄하듯이 말했다. 투명한 술 병 안에서 얕게 남아있는 갈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용사들은 소환된 순간부터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저항력과 독극물들에 대한 기본적인 내성을 갖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독극물 중에는 알코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용사들은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물론 용사들 중에서도 로크 녀석이 술을 잘 마시는 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나는 샐러맨더의 불꽃 한 병을 단숨에 들이키면 취기가 올라왔으니까.

“누가 들으면 용사가 되기 전부터 술이라도 마신 줄 알겠네. 너 그 때 고등학교 2학년 아니었냐?”

“…엉?? 고등학교 2학년이면 술 먹기 시작하는 나이 아니냐? 뭐야, 갑자기 샌님처럼.”

그의 말에 담긴 모순을 지적하자, 로크는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 그거 참 대단한 자랑… 후우,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냐.”

너무나도 당당하게 고등학교 시절의 음주경험을 말하고 있는 그에게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냐고 한 마디 쏴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음으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무슨 일이냐니?”

순간적으로 그의 입에서 엄청난 술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술기운도 찾아볼 수 없는 평소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취할 수도 없다는 그의 불평대로였다.

“…네 꼴을 봐라. 없던 호기심도 생길 꼬라지다.”

하지만 취함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몰골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이 술 냄새에 찌들어있었고, 머리는 며칠은 씻지 않은 듯 헝클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웃고 있었던, 적어도 쓴웃음이라도 짓고 살았던 그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하, 그 용사 아크가 이젠 사람걱정도 해주는 건가? 오래살고 볼 일이네.”

뭔가 이태현보다는 로크의 모습에 가까운 어조로, 그가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뭐 너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총알받이의 멘탈 상태가 걱정될 뿐이라고나 할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때 마침 나온 맥주잔을 가볍게 쥐면서 말했다. 그러자 로크는 실웃음을 터트렸다.

“킥킥, 너 다운 말이네. 그래, 딱 아크가 할법한 말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뭐 때문에 여기에 처박혀있는 건데? 그것도 40년 만에.”

로크는 식당보다도 술집을 더 자주 가는 녀석이었으며, 거의 모든 술집을 순회하듯이 마구잡이로 쑤시고 다니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꿀꿀할 때 마시는 술집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케이트가 어제 새벽쯤에 블러드울프 용병단의 로크로 추정되는 인물이 아스테라 도심지에 나타났었다는 정보를 전해주었을 때, 나는 곧바로 수색 목록에 이 술집을 넣었었다.

물론 이 술집에 오기 전에 주요 홍등가들을 먼저 돌아봤지만 말이다.

“40년 만이라…….”

로크는 한숨을 쉬듯 그 말을 내뱉고는, 적당한 크기의 술잔 하나를 들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윽고 적당한 크기의 얼음 네다섯 개가 술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크는 샐러맨더의 불꽃을 한 병 더 따더니 그 안에 따르며 말했다.

“그 말을 한다는 건, 너도 40년이 흘렀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네. …하긴,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썩했는데 모르면 이상하겠지.”

로크는 잔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황성 앞 대로에서 벌어졌던 ‘아크의 귀환식’은 나도 지켜봤다고? 큭큭, 무슨 영화 속 한 장면인 줄 알았어.”

“…쯧, 시끄러.”

나는 혀를 한 번 차고서는 테이블 위의 맥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들이켰다. 맨 정신으로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부끄러웠으니까.

하지만 로크도 딱히 그걸 가지고 나를 놀리려는 의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너를 반기고, 무릎을 꿇고. 환호를 보내고, 눈물을 흘리고. 하하. 무슨 되먹지도 않는 사칭범까지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 다했지. 그야말로 용사의 귀환이야.”

“…….”

말을 마치고서 로크는 쥐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낮게 내려앉았고, 점차 진지해지고 있었다.

사뭇 바뀐 분위기에,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아크,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나름 이곳에 남겨뒀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40년 만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녀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 올린 술잔을 살짝 흔들었다. 얼음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처음에는 로젯트를 만나러 갔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집이 없어졌더라. 꽃까지 사들고 갔는데 말이야.”

“그건 참…….”

너 답구나.

가장 먼저 만나던 여자의 집에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떠오른 말은 그거였지만, 나는 겨우 말을 멈출 수 있었다.

“허, 아크가 위로까지 해주는 건가.”

피식.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나를 보고 실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안타까워한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4년이나 지났잖아? 그리고 유리아를 찾아갔지. 그 다음은 프리스. 그 다음은 피오나. 그리고 그 다음은―”

“말하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네 여자편력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데 말이야.”

내가 말을 자르고 그의 말을 막자,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들고 있던 꽃다발이 슬슬 시들어갈 때쯤, 아무리 내가 멍청하더라도 대충 눈치 챘지. 뭔가가 이상하다고. 그리고 내 용병대가 있던 곳으로 갔어. 갔는데…….”

로크는 왼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없다. 없었어. 건물은 그대로 있었지만 거기에 있는 건 블러드울프들이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용병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웬 상단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겠지.”

대부분의 용병단의 수명은 길어봤자 20년 안팎밖에 되지 않는다. 용병활동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고, 그 기간도 돈벌이를 위해 단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블러드울프는 단장을 맡고 있던 로크가 갑자기 사라진 셈이었으니,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기적이라고 부를만한 상황이었겠지.

“후우우… 아크, 나는 말이야. 그래도… 내가 여기에 이룩해둔 것도, 두고 간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제국 최고의 용병단을 만들어냈고, 날 기억해줄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다시 한 모금 술을 들이 킨 로크는 또 한 번 길게 숨을 내뱉고서 말했다. 그의 감정들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이게 진실이다. 내가 쌓아올렸던 것들은 고작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아니, 쌓아올린 적도 없는 셈인가…….”

천천히 말을 흐리던 로크는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는 괜찮았어. 40년이면 강산도 네 번 바뀔 세월이니까. 하지만, 나는 황성 앞에서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을 들어버렸지. 그야말로 애절하다고도 할 수 있을 그 목소리들을 말이야.”

“…….”

그 말을 마치고서, 그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그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나 역시 조용히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술집 안에는 다시 고요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가게 주인이 조용히 접시를 닦는 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

꽤 긴 시간동안의 침묵이 흘렀고, 그동안 로크는 잔 하나를 깔끔히 비워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말하는 로크는 특유의 미소를 살짝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씁쓸해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술병을 붙잡았다. 비워진 잔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술잔 쪽으로 가져가는 그 술병을 다시 붙잡았다.

“…?”

“따라줄게. 한 잔 받아라.”

로크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내 대답을 듣고는 놀란 듯한 모습을 보였다.

“킥, 킥킥.”

그리고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하!! 그럼 어디 아크님의 잔 한 번 받아보실까?”

“…아크라고 불러도 되지만 ‘님’자는 빼라.‘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그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자존심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 있다.

그게 자신과 연관된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술동무 정도는 해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부었다.

“야! 너도 맥주 치우고 이거나 한 번 마셔봐. 이거 향이 얼마나 죽이는데. 지구에서는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다고.”

“왜 내가 샐러맨더의 불꽃하나 안 마셔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그가 건네는 빈 잔을 받아들었다. 빈 잔은 곧 로크가 따르는 술로 채워졌다.

오늘 밤은 생각보다 길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로크와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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