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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00화 (100/135)

100화

“후우우우우…….”

리리스는 아크가 만들어 놓은 아공간에 홀로 남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공간이라고 해도 어떤 세계와도 연결되지 않은 채 폐쇄되고 압축되어있는 곳이었기에, 하늘 따위는 보일 리가 없었다. 하늘이라기보다는 천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크는 잘 하고 있을까요.”

그녀는 지금 여기, 아공간에 남아 아직 남아있는 루시퍼의 잔재를 지우는 걸로 마나를 정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도저히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일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기 떄문이었다.

“…분명히 오늘 내로 연락을 준다고 했었는데요.”

그녀는 약지에 끼워져 있는 메아리의 반지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크가 직접 끼워줬던 그 반지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한 치 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닦아주는 바람에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 연락 때, 아크는 하루 안에 추가적으로 연락을 보낸다고 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난 시간이었는데 아크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물론 아크는 그녀가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아스트레아에서 용사로 지내던 시절에도 그에게 위협이 될만한 위험요소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물며 그 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갖게 그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요소는 딱히 없으리라. 오히려 아직 아스트레아에 남아있는 다른 마족들을 걱정하는 편이 더 타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용사 아스트의 유적이다. 그 바알조차도 직접 나서기를 꺼려하여 휘하의 마왕 셋을 대신해서 아스트레아로 파견할 정도였다.

그곳이 위험지역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유적에 들어가본 사람은 드물고, 거기서 살아돌아온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기에 마왕들에게조차도 별다른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리리스는 자신의 특기인 공간마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어느 정도 유적 내 탐사를 해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공간마법이 차단되어있지 않은 초반부만 약간 둘러보는 게 가능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미스틸테인은 찾을 수 있었으니…….’

리리스는 탐사를 하던 도중에 미스틸테인을 발견했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유적 마지막 층에 있을 것이 분명했던 미스틸테인은, 한 인간 남자의 시체의 품 안에 안긴 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시체는 조금만 더 가면 출구에 닿을 수 있을 1층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이름이 아마 빌 루딘이었나.

그 당시 아스트레아에서 전설처럼 이름을 날렸었던 레다 왕국 출신의 트레져 헌터였다.

고작 인간 주제에 아스트의 유적을 마지막까지 단신으로 돌파해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의 품에 안겨있는 미스틸테인은 너무나도 분명한 증거였다.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아직까지도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간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바뀌게 된 것은.

“하아…….”

리리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한숨을 내쉬는 빈도가 늘었다. 아크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이렇다.

지금 이 기분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인간들의 기준으로 대략 천년가량을 살아온 몸이었지만, 이런 감정은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역시 따라가는 편이 좋았을까요.’

아크를 따라서 함께 아스트레아로 갔다면.

그랬다면 지금처럼 아크가 아스트레아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크에게도 나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한 쪽 뿔을 잘라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곱 군주들 중에서 2석을 차지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아크를 따라갔더라면, 그와 함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의 이 애매한 감정이 어떤 감정인 것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잇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우.

하긴, 자신이 따라간다고 했어도 마족을 그토록 증오하는 아크가 쉽사리 허락해줬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하고 경계심만 잔뜩 일으켰겠지.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는 이미 늦은 일이다.

지금 자기가 할 일은 아스트레아에 있는 아크의 옆에서 그를 돕는 게 아니라, 여기에 남아 루시퍼의 잔재를 정화시키면서 아크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리리스는 짧게 한숨을 한 번 내뱉으며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손가락의 반지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자. 그리고 그녀는 마나회로를 깨우고 다시 정화마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뿔 하나가 없으니 불편하기는 하네요.“

코어와 마나회로가 활동하기 시작하자, 새삼스럽게 왼쪽 뿔의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위력 또한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그것 때문일가. 리리스는 지금 이 아공간에서 조그맣게 차원의 틈이 열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꿈틀.

잠시 후, 그 틈 사이로 자그마한 눈알 하나가 빼꼼이 빠져나왔다. 시전자와 그 시각을 공유하는 아티팩트, 주시자였다.

주시자는 소리와 기척을 죽인 상태로 리리스가 있는 아공간을 천천히 한 차례 훑어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공간의 전체적인 광경을 눈에 담은 주시자는, 이윽고 리리스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리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마나를 정화시킬 뿐이었다. 아공간 안에는 점차 맑은 마나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 * *

“정말 당신이군요. 이번에도 사칭범이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 미는 건 아닌가 싶어 그 아이를 보냈습니다만.”

카를라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어색하게 지은 미소를 마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 같아.’

오랜만에 만난 카를라에 대한 나의 인상은 지극히 짧았다.

그녀의 이마에 그어진 세월의 흔적은, 나름 화장으로 가려보려고 한 듯 했지만 그럼에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달빛처럼 맑은 빛을 뿜어대던 그녀의 은발은, 과거와 달리 탁한 색깔을 보이고 있어 은발보다는 백발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의 인상이 과거의 그녀가 보여주던 미소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카를라는 그야말로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미소를 짓기는커녕 표정변화자체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 간혹 짓는 미소도 냉소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나를 향해 보여주고 있는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푸근한 느낌의 미소였다.

‘40년…인가.’

물론 40년이면 강산이 변해도 4번은 바뀌었을 세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카를라는 강산보다도 더 강인하고 견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 낯선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금발을 가진 청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보고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음, 진짜 금발의 청년이 하나 있기는 했는데 말이지…….”

케이트가 나에 대한 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걸까.

일처리를 허술하게 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걸 굳이 설명을 해줘야 하나.

내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 서있던 시녀 한 명이 카를라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아아, 그럼 그 때 그 애가 한 말이?”

“예, 맞습니다. 전하.”

“그랬군요. 저도 참.”

시녀가 뭐라고 소곤거리자 그녀는 그제야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다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요즘 기억이 좀 흐린 편이라, 조금 헷갈렸네요. 후후.”

“…….”

‘기억이 흐리다’라.

너무 차가운 나머지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리는 편이었지만, 그 명석하고 치밀한 두뇌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도 반박을 하지 않았기에, ‘흐리다’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일에 관한 건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었지요.”

카를라는 그렇게 말하며 누군가를 부르는 손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조금 멀찍이에서 서있던 시녀 한 명이 조금스럽게 다가와 열쇠 하나를 건넸다.

“매그리트 금고의 71번 열쇠입니다. 로크님께서 아크님게 맡기셨던 걸 그대로 넣어뒀어요. 수수료도 저희 황실에서 지불하고 있으니 그냥 찾아가기만 하시면 됩니다.”

“매그리트 금고?”

“후후, 정말 이 세계에 안 계셨던 모양이로군요. 아크님 정도나 되시는 분이 매그리트 금고를 모르시다니요.”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나는 카를라에게 다시 되물었다.

듣자하니 고객에 대한 철저한 비밀 유지와 엄중한 경계로 지켜지는, 말하자면 지구의 스위스 은행과도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 같았다.

“돈은 딱히 필요없는데.”

“굳이 찾아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말씀드릴 뿐이죠. 수수료는 저희 쪽에서 계속 지불할 거니 편하실 때 조금씩 꺼내 가시면 됩니다.”

카를라는 예의 그 낯선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무겁네.”

그 미소를 마주 바라보며, 나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 열쇠는 나에게 너무 무거웠다.

물질적으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 그러고 보니 이걸 깜빡할 뻔 했군요.”

카를라는 다시 손짓을 하여 시녀를 한 명 부르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 시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방문을 열어 어딘가로 나가더니, 잠시 후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서 다시 돌아왔다.

시녀는 카를라에게 그 서류 뭉치를 건넸고, 카를라는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계약대로 제가 아크님에게 지불하기로 약속되어있었던 것들입니다. 정확히 40년 만큼이니,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그 서류의 내용들은 제국의 국가 예산 항목에 대한 승인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로자에 대한 보상’이라는 항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 서류 뭉치들을 한 장씩 넘기며 훑어보았다. 매년 예산이 배정되기 때문인지 서류는 정확히 40장이었다.

“…카를라.”

“예, 아크님.”

나는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째서.”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나는 단지 내 속죄를 위해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나는 단지 내 죄책감을 외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을 뿐인데.

심지어 요 4년간,

나는 아스트레아를, 이 세계를 증오하면서 살아왔는데.

복잡한 감정 속에서, 나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채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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