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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8화 (98/135)

98화

“…우선은,”

황가의 허가와 인증을 받은, 황족을 비롯한 제한된 인원들만이 오고갈 수 있는 황성.

당연히 황성은 단단한 수비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또한 황성 안에서 오고간 이야기는 어지간해서는 밖으로 새어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 황성 안에서도 극소수의 인원들만 오고갈 수 있는 황실 전용 공간에서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살짝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은, 사과를 드려야겠지요. 아크님을 속인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 아니, 그보다는―”

그 쪽이 대체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그게 너무 궁금했지만, 굳이 보챌 필요는 없겠다 싶어 나는 뒷말을 흐려서 얼버무렸다.

“예? ‘그보다는’이라 하시면은…?”

하지만 케이트는 적당히 얼버무렸던 내 말에도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결국 나는 손을 살짝 들어 올려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괜찮습니다. 케이트님이 하려고 하셨던 말씀부터 끝까지 마치시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소녀에게 하대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하대를 해주지 않으시면 소녀가 불편합니다.”

케이트는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는 듯, 마치 죄라도 지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살짝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케이트님에게 존대를 하는 게 더 편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것도 명색이 제국의 황녀라는 나름 고귀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하대를 던질만큼 나도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경우가 없다기보다는 애초에 나에게 조금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도…….”

“저는 케이트님에게 하대를 하는 게 불편합니다. 제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대를 하라고 말하시는 거라면 조금 고려해보겠습니다만.”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려고 하는 케이트에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휴우, 알겠습니다. 아크님께서 편하신 게 제일 중요하겠죠.”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는 잠시 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결국 나의 존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단순히 존대와 하대를 결정하는 대화에 불과했음에도 황녀는 상당히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떤 것 때문에 사과하신다는 겁니까.”

딱히 사과를 받고 싶어서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단지 어린애를 상대로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도 조금은 부끄러운 짓이겠다 싶어, 다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도로 꺼냈을 뿐이었다.

“아… 레크릴 숲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입니다. 아크님.”

“그 일이라면,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던진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케이트와 함께 동행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건 그녀의 배려와 친절함이었다. 결코 불쾌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배려와 친절을 받는 것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게 익숙지 못한 여행길 위에서 받은 거라면 더더욱 말이다.

‘물론, 조금 귀찮은 점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나는 마차 안에서 그녀가 계속해서 모험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소녀의 마음이 편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당신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사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이다니요?”

“소녀의 신분을 속였고, 아크님의 정체를 떠보기 위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조금 제멋대로 던졌었지요.”

“…?”

그 짧은 설명만으로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케이트에게 자초지종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케이트는 외교문제 떄문에 노르트 왕국에 직접 사자로 찾아가게 되었고, 한동안 노르트 왕국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레다 왕국에서 아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케이트는 황실에서 갑자기 내려온 귀환 명령에 노르트 왕국에서 황급히 제국으로 돌아오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크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아스틴 제국의 황실, 그것도 여제 카를라의 몇 안 되는 직계 자손들뿐이었고, 그렇기에 아크의 진위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것도 그들뿐이기 떄문이었다.

“뭐, 저도 아크님에 대해서는 할머님께 전해 들은 게 전부긴 하지만 말이죠.”

“할머님?”

“여제 카를라님입니다. 할머님께서 아크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도움이라기보다는 거래였습니다만… 그렇습니까.”

할머님인가.

그 말에 나는 이 세계, 아스트레아가 시간이 많이 흘러간 상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카를라는 비록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냉혈한 소리를 듣는 차가운 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고고한 소녀였다.

그녀의 윤기 나는 은발은 감히 달빛과도 비교될 정도였고, 맑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사파이어와도 같았다. 그녀의 외모 때문에 그녀를 납치하려하던 마족들도 간혹 나타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할머님이라니.

조금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으며, 상상하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어찌됐거나 케이트는 아스테라로 향하던 중, 아티팩트를 통해서 보내진 영상을 보았고, 거기서 레다 왕국에 나타났다는 아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꽝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했다.

찬란한 금발에 번쩍이는 은빛 망토. 그리고 등에는 그레이트 소드와도 비견될 만큼 거대한 대검, 미스틸테인.

아크의 모습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렸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스틴 제국의 황실이라고 케이트는 말했다.

“할머님의 생각이었죠. 어차피 언젠가는 사칭범들이 꼬여들게 될 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 쪽에서 미끼를 던져 놓자고요. 사칭범들은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었죠.”

케이트는 말을 마치고서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어 올려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일련의 과정들이 조금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아크라는 건 대체 어떻게?”

결국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케이트도 말했듯, 내 원래 얼굴과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직접 본 사람은 아스트레아에 카를라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케이트가 나를 알아본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야 뭐… 여자의 감이라고나 할까요.”

“…….”

케이트는 조심스레 입가를 가린 채로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은 편해진 모양이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 아래쪽을 더듬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딱딱한 분위기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소녀가 농을 한 번 던져봤습니다.”

케이트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내 질문에 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여자의 감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죠. 레크릴 숲 대로에서 아크님을 처음 뵈었을 때, 할머님에게 들었던 아크님의 모습과 분위기와 조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은 덕분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냥 ‘할머님께서 말씀하셨던 아크님과 느낌이 비슷하다’정도에 불과했죠. 점차 제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던 것은 제 질문에 대한 아크님의 대답들을 들으면서였습니다.”

“질문? 무슨?”

내가 되묻자, 케이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아스테라에는 모험가 길드가 없답니다. 기사단이 주변 치안을 거의 전부 담당하기에, 모험가 길드가 직접 나설만한 일거리가 없기 때문이죠.”

“…으음.”

‘아스테라에도 모험가 길드가 있는 건가요?’

마차 안에서 케이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케이트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질문이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철없는 철부지 귀족영애의 목소리로 던져댔던 질문들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가 40년 전에 아스테라에서 봤었던 모험가 길드의 위치를 그녀에게 말해줬었다.

“그거… 참. 그런 건 카를라에게 참 잘 배웠군요.”

“어머, 아크님. 칭찬인건가요?”

“예. 칭찬인걸로 해두죠.”

내 말에 케이트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보다는 긴장이 풀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카를라와 서로 빈정대며 가볍게 농담이나 던져댔었던 시절이 생각나 조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건 제가 아크님의 사칭범에 대한 묘사를 했을 때 보여주셨던 반응이었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금씩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한다.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입 꼬리도 조금씩 씰룩이면서 말이다.

“잘 배우셨네요. 카를라가 아주 좋아했겠어요.”

“후후, 감사합니다.”

어린 나이에 사람 표정도 그토록 세세하게 읽어낼 줄 아는 그녀에게 나는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어조로 말했고,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제 모습이 모두 거짓된 것은 아니었답니다. 아크님에 대한 제 동경은… 진심으로 했던 말이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케이트는 다시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만 방금 전 긴장으로 위축되어 있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약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담겨있는 모습이었따.

하지만, 그녀의 말에 나는 멋쩍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애매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본 적이 없을 텐데.

그냥 단순한 이야기로만 나를 들었을 뿐일 텐데.

애초에 아크라는 영웅은 어디에도 없는, 허상에 불과한데.

이곳에 있는 건 영웅의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한 한낱 소시민에 불과했으니까.

“…….”

자연스럽게 내 말문은 닫혀버렸고, 방 안에는 고요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케이트도 말을 멈춘 채 조금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내 쪽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저기…….”

그러던 중,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크님. 피곤하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을?”

“예, 사실은 할머님께서…….”

케이트는 조금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를라 할머님께서 아크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굳은 결심 같은 것이 심어져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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