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모험가님, 정말 그대로 가시려는 겁니까?”
로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상황을 피하고 싶어 몰래 나갈까도 생각해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는 하고 가는 게 예의일 거 같아 로튼에게만 넌지시 말해뒀었다.
물론 케이트에게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예.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죠.”
그 전에는 다른 용사들이 모이기 전까지는 어차피 수도에 있어야하기에 조금 느긋하게 움직여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일행에 합류해 마차에도 탑승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움직여야할 이유가 생겼다.
우선 40년 동안 이 세계에 어떤 변수들이 생겼는지를 확인해야한다. 물론 중세시대의 40년은 그리 큰 변화가 생길 세월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약의 변수라도 모두 파악해둬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크라고 사칭하고 있는 녀석이 대체 뭐하는 녀석인지, 꼭 봐두고 싶었다. 사칭범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아, 사칭범들이 아크님을 사칭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제국의 보물고에는 아크님의 막대한 재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사칭범들의 목적에 대해 케이트에게 물어봤을 때, 그녀는 그들의 목적이 제국의 보물고에 남아있는 아크의 재화라고 말했다. 즉, 돈이다.
돈이라. 심플하고 명쾌한 목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를 납득시킬만한 목적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를 구해보겠다, 또는 마왕을 처치해보겠다 같은 거창한 목적이 있어도 기분이 더러울까 말까한 상황인데, 돈을 얻기 위해서라니!!
“모험가님도 아실 테지만, 밤길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제 말대로 기사 한두 명은 호위로 데려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아이고, 됐네요.
명색이 새벽의 기사단인데 고작 모험가 나부랭이 호위에 붙여주면 참 좋아라 하겠습니다.
하여간, 저런 쓸 데 없이 사람 좋은 양반들은 호의가 지나치다 못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가 되어버려서 문제다.
그래도 이 일행들에 대한 인상이 결코 나쁘지는 않았기에, 나는 로튼의 호의를 공손하게 거절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서 말이다.
“자, 그럼 일단은…….”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여관을 나와, 도시 밖으로 나온 나는 우선 메아리의 반지를 작동시켰다.
그동안은 케이트 일행의 눈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지만, 일단은 리리스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둬야 할 것도 있고 말이야…….’
나는 조금 비정한 심정으로 반지를 작동시켰다.
[아, 아크?]
메아리의 반지를 작동시키자, 조금 놀란 목소리로 리리스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연락을 보내다니, 무슨 일이에요?]
[미안, 리리스. 지금 내가 오랜만에 차원을 넘어와서 그런지 시간감각이 애매해서 말이야. 지금 몇 분이 지났지?]
[이제 겨우 1시간 정도 지났어요. 1시간마다 보고할 작정이지는 않을 테고. 아, 혹시 반지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해본 건가요?]
이제 겨우 1시간.
아무래도 지구에서는 1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아스트레아에와서 체감적으로 흐른 시간이 대략 10시간 정도였으니 시간축의 차이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10대 1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리리스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감정이나 어조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후우.’
리리스가 내게 이 사실을 감춘 것은 아니었다는 것에, 나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나와 용사들은 아스트레아에 고립되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만약을 위한 대처를 해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리리스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한다면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맞아. 그냥 반지가 잘 작동하는지 한 번 더 확인한 거야. 뭐든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건 좋은 습관이니까.]
나는 일부러 시간축이 엉켜있다는 말을 리리스에게 꺼내지 않았다. 아직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면 되도록 정보는 감춰두는 게 좋다.
[음… 저기, 아크. 심심할 때면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상관없어요.]
리리스는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왠지 수줍어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무리 네가 마족이라도 그런 쓸 데 없는 이유로 귀찮게 굴 정도로 경우 없는 인간은 아니라고.]
[…아니, 그런 의미가… 휴우.]
뭐지. 왜 한숨을 쉬는 것이지.
나는 나름 리리스를 배려한다고 말한 것인데, 정작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됐어요. 그보다 다음 연락은 언제쯤에 주실 거죠?]
[음, 한 일주…]
일주일이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말을 멈췄다.
여기서 일주일은 지구에서 하루도 되지 않으니까.
[대충 하루 정도?]
[으음, 일일보고 같은 느낌이군요.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리리스와의 연결을 끊었다. 조그맣게 빛나던 메아리의 반지의 불빛이 그와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용히 내려오는 달빛만이 주위를 은은하게 비추었고, 뒤쪽에 있는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그럼 이제 아스테라로 가는 일만 남았구만.”
나는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은 후, 앞으로 힘차게 도약해냈다. 마차를 타고 왔을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주위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이대로 달리면 조금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해가 뜰 무렵에는 아스테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 * *
아스틴 제국의 수도, 아스테라.
아스틴 제국은 아스트레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였으며, 또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일종의 패권 국가이기도 했다.
그런 제국의 수도인 아스테라는 그 국력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시원시원하게 정리된 건물 구획들과 넓게 펼쳐진 도시 내 대로만 봐도 아스틴 제국이 수도 설계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거 밀지 좀 마쇼. 이러다 사람 하나 찌그러 들겠네 정말.”
“형씨, 같이 좀 봅시다. 좋은 자리 다 차지하고 있으면 뒷사람들은 어떻게 보라는 건가 그래?”
“허허, 난 아침부터 여기 앉아있었소.”
그리고 그 아스테라의 대로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파들 사이에는 큰 길이 하나 나타나있었다. 마치 무형의 벽이라도 존재한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에 그들이 서있는 이유도 그 길을 걸어올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정작 길을 틀어막아버린다면 어불성설이다.
“이보게,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겐가?”
뒤늦게 나타난 노신사가 뒤쪽에서 까치발을 듣고 있던 청년에게 물었다.
“아니, 것도 모르요? 오늘 그 소문만 무성하던 진짜 아크가 남문에서 황궁으로 올라오고 있다잖소.”
“진짜 아크…? 예끼, 또 사칭범이 오는 모양이로구나.”
“아니, 이번에는 진짜라고들 소문이 파다합디다. 그 금발이 아주 찬란하다 못해 빛을 발하고, 등 뒤에는 미스틸테인을 매고 다닌다하요.”
“하. 됐네. 젊은이들 헛소문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애매한 나이라 말일세. 젊은이들이나 실컷 보시게나.”
“거 웃기는 양반이네. 누가 영감님보고 꼭 봐야했다고 말했소? 맘대로 하쇼.”
청년은 대답을 마치고서 다시 까치발을 내디디며 적당한 자리는 없는지, 아크는 언제쯤에나 오는지 확인했다.
“쯧쯧, 거 할일이 없으면 밭이라도 일굴 것이지…….”
하지만 잠시 후 그 노신사도 인파 사이에 끼여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온다!! 아크다!!”
그 때,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오오오!!”
“아크니이이임!!”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감탄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은 남문 쪽에 가까운 곳에서 먼저 터져 나왔고,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기린마냥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앞을 살피고 있었다.
뚜벅. 뚜벅.
그리고 그 인파의 한 가운데를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싱긋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주변 인파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의 금발은 태양빛을 받아 더욱 선명히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은빛 망토는 긴 모험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지하나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등 뒤에 메여있는 미스틸테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아크가 지나가기 전에는 모두가 소란스럽게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아크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고요함이 남았다.
기분 나쁜 침묵에서 비롯된 고요함이라기보다는, 예배당의 숭고함에서 비롯되는 고요함과 같은 느낌이었다.
“흐윽… 아크님.”
결국 누군가 눈물을 터트리며 흐느꼈다.
허구헌 날 선술집에 앉아서 ‘내가 왕년에는 마족의 목을 적어도 백 개~’같은 소리를 해대는 퇴역군인이었다.
“아크님이다. 그 때 부르툭 백작과의 전투에서 보셨던 모습 그대로야. 내가 아크님을 다시 볼 날이 올 줄이야…….”
그의 눈에서는 감격에 찬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괜히 주변 사람들의 눈시울까지 붉어지는 광경이었다.
‘…지랄이 났네.’
그리고 그 퇴역군인의 바로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조원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 진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원호는 그래도 행여 자신이 잊어버렸을 뿐일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기억을 돌이켜봤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부르툭 백작이라는 마족은 기억에 없었다. 애초에 정규군에 합류해서 함께 전투를 치룬 경험은 극히 적었다.
이 양반이 노망이라도 난 것일까.
조원호는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붙잡고서 소속 부대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리그래도 그건 좀 심술궂은 일이라 생각되어 그만뒀다.
영감탱이가 허풍 좀 칠 수 있지 않겠는가. 원래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추억과 허세, 그리고 허풍만이 남는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저 꼴은 좀 심하잖아.’
아크랍시고 나타난 녀석의 꼬라지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물론 케이트가 묘사했었던 모습과 완전히 동일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상을 해보는 것과 실물을 직접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저게 대체 어딜 봐서 마족과의 험난한 전투를 준비하는 용사의 모습인가.
망토는 길이가 늘어지다 못해 싸움에 방해가 될 정도였고, 머리는 마치 왁스라도 바른 것처럼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런 무식하게 커다란 검을 마족들 상대로 휘두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마족은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것 정도는 거의 모든 마족들에게 간단한 일이고, 저런 검으로는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어온 마족을 쫓아낼 수가 없다.
저 정도면 모험가가 아니라 그냥 아이돌이지 않은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