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크가 살아있다.
눈 앞의 소녀, 케이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다름 아닌 내가 바로 아크였기에, 나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아크가 나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아무리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 순진무구 귀족영애라고 할지라도, 당사자 본인을 눈앞에 두고서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들을 지껄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나는 지금 레크릴 숲에서 아스테라로,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에 케이트가 말한 이야기 속의 아크는 레다 왕국에서 아스테라로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레다 왕국은 남쪽에 있는 나라의 이름이었다.
즉, 그녀가 말하는 아크와 나는 목적지만 같을 뿐 그 행로는 완전히 정반대인 꼴이었다.
누군가 퍼뜨린 헛소문인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아크를 사칭하고 있는 것일까.
“저기, 케이트님. 혹시 레다 왕국에 나타났다는 그 아크… 아니, 아크님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나는 내가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케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내 이름에 직접 ‘님’자를 붙여야하는 상황에 조금 어색함을 느꼈지만 말이다.
“아, 그렇죠.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여태동안 아크님을 사칭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요.”
“…예??”
케이트는 나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 둘이 아니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에요. 레키투리아 가문의 영애께서 연회장으로 운 좋게 아크님이 찍힌 영상 아티팩트를 가져왔었거든요. 덕분에 아크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케이트는 두 손을 가슴팍에 모은 채로 말했는데, 마치 신의 가르침을 타인에게 전파하려드는 수녀가 떠오를 것같은 모습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부담스럽다 못해 낯짝이 팔려서 도저히 못 봐줄 것 같은 수준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과는 별개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티끌만큼의 흠도 찾아볼 수 없는 은빛의 망토, 그리고 신에게 축복을 받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금발. 전설로만 들어왔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죠.”
응. 사칭이구나.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쓸데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는 깔끔한 증언이었다.
은빛 망토? 찬란한 금발?
그런 (진)용사스러운 요소들은 나한테 눈곱만큼도 없단 말이다.
아니, 머리카락의 색깔은 선천적인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겠지만,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모험가가 은빛 망토처럼 눈에 띠기 딱좋은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하지만 역시나 아크님의 상징은 따로 있지요.”
“아크의 상징이라고요?”
나도 모르는 내 상징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 후후. 모험가님도 참!! 아크님의 상징하면 역시 성검 미스틸테인이지요!!”
케이트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입가를 가린 채, 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성검이라고…?’
신살검이라는 흉흉한 말을 들은 적은 많았지만.
가끔 마검이라고 부르는 놈도 본 적이 있었지만.
심지어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무시하고 달려들다가 목이 날아갔던 녀석도 있었지만.
미스틸테인이 성검이라는 표현으로 불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를 모르겠지만 말이다.
“등 뒤에 매어도 땅에 닿을 것처럼 그 거대한 모습은 틀림없이 미스틸테인이었어요!! 가운데에 박혀있는 에메랄드와 루비들은 그야말로 성검의 증명과도 같았죠. 으으, 그 분을 직접 볼 수 있다니 너무 설레여요.”
케이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는 것처럼 두 뺨을 감쌌다.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후우.”
그리고 나는 그녀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마차의 창가쪽 벽에 머리를 기댔다.
‘가관이구만.’
방금 케이트에게 들었던 내용을 한 마디 말로 일축하고서, 나는 마차의 창문을 살짝 들어 올리고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주위에 맴도는 호위 기사들 너머로 먼 산이 보였다.
지랄도 정도껏 해야 지랄이지.
아무래도 40년 동안 아스트레아에 단체로 정신병이라도 휘몰아쳤던 모양이다. 아니면 누가 아크를 가지고 성경이라도 써냈던지 말이다.
‘…거, 영 찝찝하구만.’
이 세계에서 나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건 상관없다. 이 세계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사라진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증오로 움직이는 냉혈귀건, 정의감으로 뭉친 전설의 용사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인물을 어떻게 상상할 지는 개인의 자유다.
물론 케이트의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자유까지 간섭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사칭하려고 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 녀석이 악행이라도 저질러서 내 이미지가 구겨지는 것은 아닐까.
제국에 남겨둔 재산이라도 건드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들 때문은 아니다. 이미 떠난 세계인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누군가 내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것이 단순히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뭐, 그래도 홍보 역할은 제대로 해주겠구만.’
이런 귀족 영애들한테까지 소문이 퍼져있는 것을 보면, 이미 이 이야기는 뉴스 속보처럼 모든 도시로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선술집들에서는 이 이야기에 관한 말들로 정신없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을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 다른 용사 녀석들한테까지 이 이야기들이 들어가게 되겠지.
그리고 그 가짜 아크는 아스테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용사 녀석들 또한 아스테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덕분에 용사들이 모일 확률이 올라간 셈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상 참작을 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말이야.’
나는 열려있는 마차 창문의 창틀에 살며시 손을 얹은 채, 조금 힘을 줘 꾸욱 주먹을 쥐었다.
* * *
“흐음, 그래서… 그 전설의 아크가 나타났다, 이 말인가?”
잔뜩 피를 뒤집어 쓴 남자는 오우거 시체의 어깨에 걸터앉은 채로 말했다. 바닥은 오우거의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 예, 예에 그렇습니다요, 나으리. 제가 아는 용사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자 남자의 밑에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 남자의 복장을 보면 그가 상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지.”
이태현, 아니 로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잠시 앉아서 쉬고 있던 오우거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상인에게 다가가, 마치 막역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어깨에 손을 둘렀다.
“킥킥, 하하하하하. 거 참 재미있는 소리네. 내가 물어본 아크는 평범한 아크지 금발에 은빛 망토를 두른 아크가 아닌데 말이야.”
“흐, 흐으… 죄, 죄송합니다.”
“아니, 딱히 겁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태현은 난감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라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이태현은 일단 상인을 진정시켜보려했지만, 그럴 때마다 역효과가 날 뿐이었다. 결국 이태현은 상인을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시종일관 벌벌 떨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고, 나중에 가서는 오줌까지 지렸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쯧, 에잉.”
상인을 태우자마자 정신없이 뛰어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태현은 혀를 찼다.
주변 도시를 찾아 산길을 따라 걷고 있었던 이태현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오우거를 멀리서 발견했고, 그 앞에서 웬 상단 하나가 통째로 쫓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렇기에 이태현은 상단을 도와준 다음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어낼 심산이었다. 아스트레아에서 상단의 상인들 만큼 세상 이야기에 밝은 사람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상대가 쓸데없이 겁에 질려버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그래도 완전 실패는 아니구만.’
처음에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용사들도 지금 여기에 와있는 건 아닌지, 그 정보가 궁금했다. 상인에게 물어본 것 또한 그 내용이었다.
정작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은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아크를 사칭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은빛 망토를 두른 금발의 아크가 말이다.
큭큭.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로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그 많은 용사들 중에서도 아크를 사칭하다니.
목숨이 열두 개 정도는 되는 놈인가?
한참 아크가 활동했던 4년 전이라면 겁에 질려서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로크는 사칭범에 대한 간략한 묵념을 끝마쳤다.
“으으―!!”
로크는 허리를 뒤로 제기며 거하게 기지개를 폈다.
“우선… 아스테라로 가보실까.”
안 그래도 그동안 못 봤었던 아가씨들의 얼굴들이 아른거렸었기에 아스테라에 먼저 들를 생각이었는데, 가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아크 사칭범의 얼굴도 한번 보고 싶었고, 만약 다른 용사들도 아스트레아에 와있다면 아크 사칭범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스테라로 모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누군가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설명해줄 수 있겠지.’
그렇게 이태현은 아스틴 제국의 수도, 아스테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