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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4화 (94/135)

94화

아크라고

“이봐, 아크가 돌아왔다는 말 들었어?”

“아크? 그 용사 아크 말하는 거야?”

수염 난 남자가 말을 꺼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래, 마왕 살해자 아크 말이야.”

“그 양반 사라진지도 꽤 되지 않았어?”

남자는 턱을 기댄 채로 곰곰이 아크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려봤다. 취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별다른 이야기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크와 용사들은 그 날 마왕 바르바토스와 함께 사라졌다. 그게 남자가 알고 있는 아크의 마지막이었다.

“헛소문이겠지.”

한 마디로 동료의 말을 일축한 후, 남자는 내려뒀던 맥주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저 친구는 다 좋은데 취하면 헛소리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이 양반 속고만 살았어? 레다 왕국에 아크가 나타나서 드레이크를 쓰러트렸다니까?”

“허, 아크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레다 왕국에 있을 이유가 없잖나.”

“그래서 지금 레다 왕국에서 아스테라로 올라오고 있다고. 이미 레다 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야!”

수염 난 남자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조금 과격하게 말했다. 여기서 더 반박하면 내기라도 걸 모양이었다.

“킥킥, 그럼 여기도 거치게 될 테니까 남쪽 성문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그 아크라는 양반 얼굴도 볼 수 있는 건가? 좋은 일이구만, 좋은 일이야.”

그간의 술자리 경험들로 인해, 남자는 이렇게까지 상황에 치달으면 적당히 고개나 끄덕여주는 게 빨리 끝내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야.”

그제야 수염난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역시나의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실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신 역시 앞에 놓여있는 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이제 한 잔이나 하자고―…?”

기세 좋게 맥주잔을 내밀던 남자는, 문득 시야에 들어온 뭔가에 정신을 팔려버렸다. 남자의 맥주잔은 허공의 어중간한 위치에 멈춰 섰다.

“자네 왜 그러나?”

수염 난 남자는 앞에 앉은 동료의 모습에 의아함을 품고 그 시선을 따라 가봤다.

“…….”

그리고 그 또한 말을 잃었다.

손에 힘도 풀렸는지 수염 난 남자의 맥주잔이 땅바닥에 굴렀고, 그의 신발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맥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몸에 은빛의 망토를 두른 한 모험가의 모습이 있었다.

잔뜩 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빛을 발하는 은빛의 망토.

‘찬란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화려한 빛의 금발.

그리고, 등 뒤에 메여있는 거대한 크기의 그레이트 소드. 다만 그 검은 거대한 묵직함을 보이면서도 장식용 검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한 장식을 갖고 있었다.

“위스키로 한잔. 얼음은 필요 없습니다.”

주인장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그는 메뉴판도 살펴보지 않은 채 주문을 끝마쳤다.

“…주인장?”

주문을 마쳤음에도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시선을 밑으로 향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주인장을 불렀다.

“아, 아. 예. 알겠습니다. 마운틴으로 럼 말씀이시죠.”

“으음… 그것도 괜찮겠지요.”

주인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허겁지겁 움직였다. 비록 주문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 아크다…….”

들어 올렸던 맥주잔을 다시 밑으로 내려놓으며, 남자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모험가의 모습은 전설처럼 전해지던 아크의 모습과 완전히 동일했다.

설마, 이 친구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앉아있는 동료를 바라봤다.

“앗, 차거.”

수염난 남자는 뒤늦게 발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 * *

“모험가님! 모험가님들은 평소에 어디서 지내시는 건가요?”

“음, 그건 말이죠…….”

맞은편에 앉아있는 케이트의 물음에 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내가 모험가 연기를 하고 있기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난감한 기분이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이었다.

‘아니, 길을 가다가 만난 모험가를 마차 안에 태워주기까지 하는 양반이 대체 어디 있냐고.’

나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좀 전의 일방적인 대화를 돌이켜봤다.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저는 레스드로프 가문의 영애, 케이트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모험가님을 뵙는 건 처음이에요.’

‘어머, 아스테라까지 가신다고요? 잘 됐군요. 마침 저도 아스테라로 가고 있답니다.’

로튼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도착했을 때, 케이트라는 소녀는 마차 바깥으로 나와 귀족의 예법을 갖추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 덕분에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굉장히 좋았다. 평민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는 귀족은 그리 많지 않다. 제대로 된 예법을 갖추는 귀족은 더더욱 없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빠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누군가가 옆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낄 사람이겠지.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얼굴에서 난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음, 하지만 남는 말이 없어서 조금 곤란하네요. 괜찮으시다면 소녀와 함께 마차에 오르실까요?’

그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조금의 수줍음도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다만 그건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끈적한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뼛속까지 자리 잡은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멍청한 걸지도.

어느 쪽이건 간에 이 영애가 속해있는 레스드로프 가문이 가정교육에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찌됐거나 오해사기 딱 좋은 그런 귀찮은 상황에 휘말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수도까지 걸어갈 각오를 다지면서 케이트의 부탁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그녀는 마치 글썽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모험가님을 그냥 보낸다면, 그건 저희 가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아, 혹시 저와 함께 타는 게 불편하신 거라면 제가 마부석에 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행여 내가 말이 끝나기 전에 떠나기라도 할까봐 걱정된다는 것처럼 저 장문의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쏟아냈다.

순진한 눈매는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그리고 그 눈망울이 글썽거리고 있다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다.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 순수한 호의라면 더더욱 말이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마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나도 그런 호의를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매몰찬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곱게 자란 귀족가의 영애를 마부석으로 내몰 수는 없었기에, 나는 케이트라는 소녀와 서로 마주보며 마차 안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과연 사두마차답게 마차 내부는 여섯 명 정도는 거뜬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굉장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이 케이트라는 귀족 영애께서는 모험가라는 족속을 만나본 적이 정말로 단 한 번도 없던 것인지, 계속해서 나에게 모험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대고 있었다.

모험가님은 평소에 어디에서 생활하시나요?

모험가는 평소에 어떤 일을 하시나요?

아스테라에도 모험가 길드가 있는 건가요?

그녀는 지금 모험가의 A부터 Z를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모험가라고 설정을 잡았던 건 실수인걸까.

내가 아스트레아를 떠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고, 모험가 생활이라고 해봤자 용사 생활 초창기에 간간이 의뢰 몇 개 받았던 것들이 전부였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머릿속에 얼마 있지도 않은 모험가에 관한 지식과 기억들을 쥐어짜내야만 했다.

‘…이래서 사람은 솔직하게 살아야한다는 건가.’

나는 옛날부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틀린 적이 없음을 새삼스레 다시 느끼고 있었다.

“저기, 케이트님.”

“아, 예. 왜 그러시죠?”

“케이트님은 왜 모험가의 생활을 궁금해 하시는 겁니까?”

이대로 계속해서 케이트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건 힘들다는 판단에, 나는 내가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로 했다.

머리를 굴리는 것도 슬슬 한계가 보였고, 무엇보다 이제는 귀찮다는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건… 멋있으니까요.”

“멋있다고요?”

모험가가 ‘멋있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양반들이었나?

나는 잠시 모험가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을 떠올려봤지만 ‘멋있다’라는 표현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씻지도 못하고 잠도 편히 못자는 생활을 누가 멋있다고 표현하는가.

하지만 케이트는 볼까지 살짝 붉힌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멋있다기보단 동경하게 된다고 할까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는 걸…….”

‘흐음. 그런 느낌을 말하는 거였군.’

요약하자면 자신과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인 것이다. 행동이 속박되어있을 수밖에 없는 귀족영애로써는 한번 쯤 해볼법한 생각이다.

거지를 동경한 왕자도 있고, 대학생을 동경하는 고등학생들도 있지 않은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모험가들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못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크님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신 분도 계시고요.”

“콜록, 콜록.”

갑작스럽게 쑤시고 들어온 불의의 일격에 나는 그만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괜찮으신가요…?”

“아, 예.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크님이라뇨?”

숨을 고른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스트레아를 구해주신 위대한 분, 용사 아크님을 말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이 있나요?”

케이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걸 왜 묻느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아하하… 그 아크 말하는 거였군요. 그럼요, 아주 훌륭하신 분이죠. 아하하.”

다시 한 번 깊게 찌르고 들어오는 일격에 나는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다행히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케이트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모험가님이나 저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그냥 전설 속의 인물에 불과하죠. 이 땅에서 마왕들이 물러난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으니까요.”

“…뭐?”

40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40년이라고? 무슨 소리야. 4년이 아니라?”

“그,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아니, 아니야. 아닙니다. 조금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케이트에게 대답했고, 잠시 양해를 구하는 제스쳐를 취한 다음 고개를 숙여 곰곰이 생각해봤다.

‘…답은 하나밖에 없겠군.’

결론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그 내용이 충격적일뿐,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 내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구와 아스트레아의 시간 비율이 다르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그 비율은 대략 10:1.

놀랍기는 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크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니, 정말 잘 된 일이에요.”

“…? 아크가 살아있다고요?”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케이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잘은 몰라도 지금 내 표정에서는 어이가 싹 빠져나가 있을 것이다.

“예. 갑자기 레다 왕국에서 나타나셨다고 해요. 지금은 아스테라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오고 계시다는데, 마침 제가 아스테라에 볼일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후후훗.”

케이트는 살짝 홍조를 띄운 채 수줍게 웃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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