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으윽…….”
나는 땅바닥에 누운 채로 조금씩 올라오는 불쾌감에 이마에 손을 얹고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차원의 문에 들어설 때는 내 두발로 걸어 들어갔거늘, 도착해서는 왠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공간이동으로 인한 부작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차원단위의 이동에는 아직 내성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어딘가의 숲인 모양이었다.
주변에는 나무들이 가득했고, 발목정도 높이의 잡초들과 수풀이 빽빽하게 자라나있었다.
‘으음… 그래도 지구는 아닌 것 같군.’
일단은 아스트레아에 제대로 도착한 건 맞는 것 같았다.
대기 중에 떠도는 마나의 밀도가 지구보다 훨씬 짙었고, 은근히 몸에 익숙했다. 무엇보다도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아스트레아의 풀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있는 채로 나는 주위에 감지망을 펼쳐냈다. 간략하게나마 지금의 위치가 어느 쯤 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숲. 숲. 그리고 다시 숲.
갑자기 높아지는 부분도, 갑자기 낮아지는 부분도 없이 그냥 평탄하고 무난한 지형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 위에는 모두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 레크릴 숲인가.’
레크릴 숲은 노트르 왕국과 아스틴 제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숲이었다.
그리고 그 숲의 가장 큰 특징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는 점이었다. 어디서부터가 노트르 왕국이고 어디서부터가 아스틴 제국인지조차 애매할 정도로 말이다.
‘레크릴 숲이면, 잘 됐네.’
레크릴 숲에서 남쪽으로 가면 아스틴 제국이 나온다. 그리고 내 계획은 우선 아스틴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는 거였다.
왜냐하면, 일단은 다른 용사들과 합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황제의 유적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당시 그 안에 갇혔을 때 내가 약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도 용사들의 평균 이상 수준은 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엘리트 기사급은 된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도 유적 안에서는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특히 수호골렘들은 지능이 없을 뿐이지 마왕에 버금가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백골만 앙상히 남은 해골이 껴안고 있던 미스틸테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도 지금쯤 그 옆에서 백골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헤맸던 곳은 유적의 1층에 불과했지…….’
잘은 몰라도 용사의 제단이라는 건 유적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요소이니 유적의 끝에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는 건 당연히 그 거지같은 유적을 끝까지 돌파해야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유적은 어떠한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런 곳을 혼자서 돌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실력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짓은 대개 ‘무모하다’고 불리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우선 다른 용사들과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같이 온 용사들과 합류를 하지 못하더라도 조력자들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로크, 그리고 레온하르트와 애던, 마지막으로 김세율의 공통점은 모두 아스틴 제국의 수도 아스테라에서 활동해왔다는 점이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갈 곳이 없어지면 익숙한 곳을 향해 발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이 모일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아스테라였다.
만약 그들과 합류하지 못하더라도 아스테라에는 수준 높은 기사단들이 배치되어있고, 잘나가는 용병단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륙에서 제일 규모가 큰 마탑도 존재했다.
그나마 쓸 만한 조력자를 고용하기에 아스테라보다 적절한 곳은 찾기 힘들었다.
‘…뭐 그래도 그런 녀석들이 별로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꿩이 없으면 닭으로라도 대체하는 게 차선책이다. 전투력에는 별 쓸모가 없더라도 공간술사나 용병단의 트레져 헌터 정도는 쓸 구석이 있으리라.
단기간 동안의 목표를 설정한 나는 남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 *
“…겨우 발견했군.”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나는 문득 이대로 내려가면 아스틴 제국에 도착할 뿐, 아스테라에는 도착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레크릴 숲에 정비되어있는 아스틴 제국의 도로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머리 위에 떠있던 해가 어느 정도 기울어 갈 때쯤에야 도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점토로 구워낸 벽돌로 만들어진 도로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도 꽤 여유가 남을 정도로 넓었으며, 또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제국 도로가 깔끔하고 정돈되어있기로 소문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었나.’
물론 군데군데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마법을 제외했을 때 이 시대의 기술력이 중세 수준에 머물러있음을 생각하면 믿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아스테라 주변의 중심대로가 아니라 레크릴 숲의 한복판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관리순위가 떨어지는 곳이었고, 심지어 노르트 왕국의 땅인지 아스틴 제국의 땅인지도 애매한 곳이었다.
하긴, 내가 여길 떠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마지막에 니드호그와 바르바토스를 죽이겠답시고 산골을 헤매던 시절까지 감안하면 6년이 지난 셈이었다. 강산이 바뀌기는 애매하지만 도로 정도는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은가.
대충 납득한 나는 도로 주변의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며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자리에서 감지망을 펼쳐뒀다.
‘얼핏 잡히는 것만으로 사람이 대략 서른. 말이 대략 스물… 그 중에서 중무장을 한 기사가 열여섯. 그리고 마차가 하나. 미친, 그럼 사두마차인건가?’
내가 도로를 찾을 수 있었던 내 감지망에 저들이 발견된 덕분이었다.
나는 감지망을 통해 어림잡아도 서른은 넘기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단체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 정도 인원이 함께 이동한다면 당연히 도로를 이용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그건 그렇고, 사두마차면… 적어도 자작급. 혹은 국책에 관여할 정도의 대상인이라는 뜻인데.’
아스틴 제국에서 사두마차가 허락되는 것은 자작 이상의 귀족, 혹은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인정되는 소수의 평민들뿐이었다.
하지만 사두마차를 끌 권리를 받더라도 어지간한 재정수준이 아니라면 사두마차를 마련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다. 평민들 중에서 그 정도의 여유가 있는 건 몇몇 대상인들 정도뿐이었다.
‘아니, 귀족이겠군.’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말을 몰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사 두 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갑옷의 양식을 보아하니 제국 황실에 소속된 정식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갑옷의 가슴부분에 새겨진 방패 문양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상인이라고 할지라도 황실의 기사단을 마음대로 데리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다. 카를라가 그런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두 기사는 어느새 바로 내 근처까지 다가왔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마하여 내게 걸어왔다.
“이봐, 지금 여기서 무엇을―”
“후… 레이드먼,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로튼, 저 녀석 복장도 수상하고―”
“물러서라고 말했네.”
먼저 앞장서서 걸어온 기사는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말을 꺼내다 뒤따라온 기사에게 제지를 당했다. 레이드먼이라는 녀석은 약간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새벽의 기사단의 로튼이라고 하네. 미안하군. 부하의 실례를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로튼이라는 남자는 쓰고 있던 헬름을 벗고서는 정중하게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아뇨, 뭘. 그럴 수도 있지요.”
레이드먼이라는 녀석의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딱 봐도 신입기사인 녀석에게 화를 내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정중한 사과를 거절하기도 좀 애매했기에 나는 가볍게 목을 숙이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건 그렇고 새벽의 기사단…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새벽의 기사단은 다름이 아니라 레온하르트가 만들어낸 기사단의 이름이었다.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네.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는 일행의 순찰대 역할을 맡고 있어서 말일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신원을 묻고 싶네만.”
“전 아스테라에서 길드의뢰로 먹고 사는 모험가입니다. 지금 레크릴 숲에 나타난 오크들을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만…….”
나는 최대한 안쓰러워 보일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마나는 이미 극히 일부만 남겨놓고서 코어 속에 꽁꽁 감춰둔 상태였다.
“보시는 바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준비해왔던 보급품들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구요.”
“저런, 그것 참 큰일이 아닌가.”
로튼은 걱정이 담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진지한 표정이었다.
“으음, 알겠네. 조금만 기다려보게. 자네에 대해서 한 번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지.”
“잠깐, 로튼.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녀석인데요?”
말을 타러가는 동안 레이넌드라는 놈이 로튼에게 달라붙어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며 말했다. 물론 내 귀에는 생생하게 들려왔지만 말이다.
“의심이라는 건 때로 미덕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 그대의 의심은 자신의 경지가 미천함을 드러낼 뿐이라는 걸 알게. 상대의 수준조차도 읽지 못하는가.”
로튼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내용은 명백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판단은 케이트님이 하신다. 우리는 케이트님의 말을 따를 뿐이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튼은 자신의 말에 올라탔고, 바로 말을 출발시켰다. 더 이상의 반발은 듣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레이넌드는 군말 없이 말에 올라타 로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 조금 찝찝하구만.’
로튼이라는 양반은 꽤 괜찮은 사람 같아보였는데, 엉겁결에 속인 셈이 되어버렸다. 상대의 수준을 읽지 못한 건 로튼이 된 셈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대로 일만 잘 풀린다면 일행에 합류하여 말 한 마리 정도는 얻어 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이 길바닥에 앉아서 우스운 촌극을 연출한 이유였다. 수도까지 내 발로 직접 걸어가는 고생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으니까.
제국사람들의 전통 중 하나는 길에서 만난 모험가를 정중히 대접하는 것이다. 특히 귀족들 간에서는 반드시 갖춰야할 기본 매너 수준으로 여겨졌다.
‘뭐, 그렇다고 해도 생색만 내는 정도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하지만 그래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다. 그런 게 소문이 났다가는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가문의 품위에 흠이 되기 때문이다.
다각, 다각, 다각.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다시 가까워져왔다.
나는 로튼의 손에 쥐어진 빈 고삐와, 그 고삐에 끌려오는 말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