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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2화 (92/135)

92화

나의 질문에 리리스는 제대로 된 용사의 힘이란 게 뭘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한참동안을 설명했다.

“…그래서, 그 용사 아르트의 유적에 용사들의 힘이 전부 모여 있다는 거야?”

“예,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유적에 있는 용사의 제단에 모여 있는 거지만 말이죠.”

내 말을 정정해주면서 리리스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용사라는 개념은 아스트레아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개념이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용사 아르트의 유적에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그의 힘이라고 했다.

천마전쟁에 참여했던 유일한 인간.

아스트레아를 구원해낸 초대 용사.

신살검 미스틸테인의 주인.

아스트레아 최초의 왕.

그리고, 마신을 죽인 신살자(神殺者).

리리스가 말한 아르트의 업적들은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것들뿐이었다. 잘은 몰라도 어마어마하게 대단했던 양반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비록, 아스트레아에 있던 시절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 아르트의 유적은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당신도 아실 텐데요. 당신이 미스틸테인을 찾아냈던, 바로 그곳이에요.”

“아, 거기는…….”

고대 황제의 유적.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유적 안으로 전송되어 수많은 사경을 헤맸었던 곳이었으니까.

수호 골렘에게 쫓겨 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미스틸테인이 아니었다면 거기서 죽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를 유적 안으로 전송시켰던 장본인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녀석이었다.

“…거, 배짱도 참 두둑하네. 가해자가 굳이 본인 면전 앞에서 엿 먹였었던 일에 대해 직접 언급하다니 말이야.”

“아뇨, 그건 당신에게 미스틸테인을 건네기 위한― …아니, 그래봤자 전부 핑계겠죠. 당신을 이용하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가는 치르도록 하지요.”

“아냐, 됐어. 아니, 좀!!”

나는 기어코 반대쪽 뿔까지 잘라내려는 리리스의 손을 붙잡고 막아야만 했다.

조금 무른 행동일까.

아니, 자해 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이뤄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내 자존심만 상할 뿐이다.

“…과거에 대한 일은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그 대가도 치르게 할 거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지금은 이야기부터 마치도록 해.”

굳이 과거의 일을 언급했던 건 나였기에 조금 뻔뻔한 말이기도 했지만, 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 민망한 말을 끝까지 마쳤다.

“…고마워요, 아크. 진심으로요.”

리리스는 자신의 말대로 진심을 담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 시선과 마주한 나는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너무 어색한 상황이었다.

수상한 꿍꿍이 없이 마족이 사죄를 하는 것도, 이런 진지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도, 전부 말이다.

“크흠,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보자고.”

나는 머쓱한 기분에 급하게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아르트라는 양반이 죽기 전에 자신의 힘을 용사의 재단에 남겨뒀었고, 용사들이 소환될 때마다 그 힘이 용사들에게 분배된다는 거지?”

“조금 두리뭉술하게 넘어간 부분도 있지만… 맞아요.”

리리스는 턱을 짚은 채로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용사들에게 분배됐었던 힘들은 용사가 죽었을 때 다시 제단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고?”

“예, 정확해요.”

‘…그 말이 맞다면, 리리스의 말도 사실이겠군.’

리리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용사의 제단에는 무려 9할 이상의 힘이 모여서 남아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용사 소환에는 무려 1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소환되어 100명의 용사가 나타났었고, 그 용사들 중에서 살아남은 숫자는 5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카엘라를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6명.

리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죽은 용사들의 힘은 다시 제단으로 모여들었을 것이고, 용사의 제단에는 94명분에 해당되는 만큼의 힘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힘을 아직 남아있는 용사들끼리 나눠가지라고?”

“예.”

“다른 녀석들은 이미 아스트레아로 보내놓은 상태고?”

내 말에 리리스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죄책감 같은걸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족에게 죄책감이라. 그것도 어울리지 않는구만.

‘…그러고 보니.’

그러다 나는 문득 떠올린 생각에 급하게 질문을 꺼냈다.

“리리스. 그러면 설마 미카엘라도 지금 아스트레아로 가있는 건가?”

“…미카엘라라면, 요즘 당신과 함께 다니는, 영혼이 두 개 존재하는 그 소녀를 말하는 거군요.”

사실 리리스가 미카엘라를 알고 있을 확률은 드물었기에, 미카엘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고 설명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리리스는 미카엘라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대체 왜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소녀는 일부러 제외시켰어요. 그녀가 아스트레아에서 죽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때문에 무슨 오류가 날 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 그러냐.”

리리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퉁명스러워진 걸로 보아서는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같았지만, 그게 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알아봤자 피곤해질 게 뻔하다는 직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

“한 가지만 묻자.”

“…예.”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고, 내 목소리에 리리스 또한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너는, 마족을 배신한 거냐?”

리리스는 마족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도움을 주려하고 있었다.

용사의 제단이라는 정보를 말해주고, 아스트레아로 이어지는 차원의 길까지 열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족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배신 그 자체에 해당되는 행동이다.

“…나는, 너를 아군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냐?”

나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그녀의 왼쪽 뿔의 절단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마나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군이라고 말하면, 저를 다른 사람들처럼 대해주시는 건가요?”

리리스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는 애틋하게 들려왔다.

그래, 애틋하게 들려왔다. 놀랍게도 말이다.

“아니, 그럴 일은 없는데.”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복수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후훗.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네요.”

리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군은, 아니겠죠. 저는 어디까지나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당신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를 좋을대로 이용하면 되요. 그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작은 아공간을 열더니, 그곳에서 뭔가를 집어 꺼냈다. 그 다음 마나로 반지를 띄워서 내 쪽으로 보냈다.

“반지, 아니… 통신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인가.”

나는 반지를 건네받고 신중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네, 맞아요. 지금 아스트레아는 지구와 완전히 분리된 차원. 공간마법과 별 인연이 없는 당신이 아스트레아에서 지구까지의 차원의 틈을 열기는 힘들겠죠.”

리리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또 다른 반지를 꺼내들었다. 내가 손에 쥔 반지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반지였다.

“두 반지를 함께 합쳐 메아리의 반지라고 부르는 아티팩트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더라도, 설령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흐음.”

나는 리리스가 건네준 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 반지도 줘봐.”

“음?? 상관은 없는데, 왜 그러시죠?”

“내가 마족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잖아. 확인해볼 게 있어.”

“…알겠습니다.”

리리스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져서는 자신의 반지도 내 쪽으로 보냈다.

나는 건네받은 반지를 살펴보는 동시에, 리리스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손가락으로 작은 룬을 그려 간단한 마법을 새겨 넣었다.

새겨진 마법각인 위에 빠르게 불가시의 마법을 두 차례 추가로 얹은 후, 나는 그녀에게 다시 반지를 건넸다.

“의심해서 미안해. 내가 마족한테 뒤통수 맞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녀가 반지를 받아들었을 때 내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크.”

그리고 리리스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기소침하다 못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였다.

“역시 오른쪽 뿔도 잘랐어야 했나요…….”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내가 묻자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세운 대략적인 계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나는 곧바로 아스트레아로 출발한다.

마왕군이 언제부터 침공을 시작할지 모르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리스가 먼저 제안한 내용이었고, 나또한 동의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리리스는 이 아공간에 남아 루시퍼의 잔재를 정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정화가 완료되면, 다른 S급 헌터들을 설득시켜 이곳에서 수련을 시킨다.

그리고 용사의 제단에서 용사의 힘을 되찾는데 성공하면, 내가 리리스에게 연락을 보내 지구로 귀환한다.

만약 내가 아스트레아에 있는 동안 지구에 군주급의 마왕이 나타나거나 돌발적인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리리스가 메아리의 반지를 통해 나에게 연락을 보내고, 강제 송환을 준비한다.

반대로 내 쪽에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내가 리리스에게 연락을 보낸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계획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 있는 S급 헌터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배웅했었던 소연이가 떠올랐다.

약속을 어기는 셈이 되려나.

리리스를 불러 잠시 지구에 다녀오려는 생각까지 해봤지만,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나름 긴박한 상황이었다.

지금에야 여유가 있지만, 뒷날에 지금의 1초를 아쉬워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리리스와의 연락수단에 대한 확인과 점검을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정말 출발하는 거만 남았다.

“아, 리리스.”

그리고 나는 리리스가 열어놓은 차원의 문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리리스를 불렀다.

“왜 그러죠?”

“우리 기아스 하나 맺기로 할까.”

“무슨…?”

“아니, 별 건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아직 손에 쥐고 있던 메아리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우면서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반지 빼지 않고 있기.”

“아, 아크, 갑자기 대체…….”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리리스가 말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반지가 끼워진 손을 쳐다봤는데, 반지는 약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아무거나 잡히는 손가락에 끼웠는데 딱 약지였던 모양이다.

“기아스의 내용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둘 다 반지를 빼지 않을 것. 상관없어?”

“예, 예… 안 뺄 거에요.”

리리스는 살짝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계속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건 분명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내가 준비한 것은 룬을 그리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간소화한 기아스였고, 간단한 구두서약만으로도 계약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낸 나는 룬을 그려 기아스를 성립시키고, 기아스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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