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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1화 (91/135)

91화

이 아공간의 마나 밀도를 측정한 리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곳에는 마계 수준의, 아니 마계보다도 월등히 높은 마나 밀도가 짙게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루시퍼의 기운이 아직 또렷히 남아있는 루시퍼의 잔재에 가까운 마나들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정화과정만 거치면 이 마나들은 순수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걸까요.’

리리스는 이 아공간에 들어선 순간, 아크가 그 공간을 만들어낸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아크가 이 공간을 만들어낸 의도와 자신들이 용사들을 아스트레아로 불러낸 의도가 어느 정도 겹친 셈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아크가 여길 만든 이유는, 그와 동료들이 힘을 쌓기 위해 효율적으로 수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으리라.

마나가 풍부하고 밀도가 높은 곳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련의 효율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아공간은 힘을 쌓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공간이었다. 비록 조금 협소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특히, 지구처럼 마나가 고갈된 황무지나 다름없던 곳에서 지내던 마나유저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크가 알아서 잘 해결했을 일을, 자기가 쓸데없이 크게 벌려놓은 것일까.

‘아니, 아니에요. 이 정도로는 바알을 이길 수가 없어요.’

리리스는 괜한 참견을 했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아크라면 모를까, 다른 녀석들은 일곱 군주는커녕 공작급의 마족들과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크도 바알이나 메피스토와 맞붙는다면 고전을 면치 못하겠지요.’

아크는 분명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크가 바알과 1:1로 싸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부정적인 대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알이 지금 나서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그가 신중한 성격이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용사들을 다시 아스트레아로 돌려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바알의 침공에 맞설 수 있도록 힘을 키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바알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도록.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아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오랜만이군요, 아크.”

“…같잖은 수작부릴 생각이라면 다시 꺼지고, 할 말이 있다면 용건만 간단히 말해.”

아크는 검을 들어 올린 채로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자신과 대화를 할 의사는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조금 무리해서 강제로라도 아크를 아스트레아에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리리스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뇨, 이런 생각은 조금 위선적일지도요.’

방금 전까지 자신은 다른 용사들과 함께 아크까지 한꺼번에 아스트레아로 소환시키려고 했었다. 그로 인해 그와 적대하게 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로 찾아와 직접 그의 얼굴을 보고나니, 그런 각오는 전부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이제 와서 그에게 미움을 사는 게 두려워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보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추잡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알겠어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아크, 저와 협상을 하도록 하죠.”

“…뭐?”

리리스의 말에 아크는 당장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미 활성화 되어있던 코어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고, 하얀빛에 감싸인 미스틸테인은 날카로운 칼날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동안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되었지만, 그건 평온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고요함이었다. 아크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코어를 꿰뚫을 것처럼 살기와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꿀꺽

그리고 리리스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살기와 에테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 버겁기는 하군요…….’

리리스는 고통스러운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으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무방비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아크가 뿜어내는 살기를 받아내는 건 생각보다 고통이 심했다.

그게 자신의 감정 때문이라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리리스는 말없이 서있었다.

* * *

아크, 저와 협상을 하도록 하죠.

갑자기 나타난 리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방금 전의 기억을 곰곰이 돌이켜보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들어볼 가치도, 고려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마족과 협상이라니, 머저리 같은 짓에도 정도가 있다.

“…….”

하지만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밑으로 내리고, 에테르를 다시 가라앉혔다.

그녀와 협상을 할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리리스의 모습이 너무 얌전했기 때문이다.

리리스는 살기는커녕, 마나 코어조차도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백기만 안 들었다 뿐이지, 이건 마치 투항병이나 마찬가지인 모습이 아닌가.

아무런 적의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살의까지 풍겨내며 경계하는 것도 꽤 우스운 꼴이라 생각되어, 나는 긴장의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두기로 했다.

“마족과 나눌 협상 같은 건 없어. 조용히 꺼져.”

그렇다고 내가 리리스와 대화를 나눌 의사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녀석들은 언제나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좋은 마족은, 죽은 마족뿐이다.

축객령을 내린 나는, 계속 리리스를 바라보고 있을 필요를 못 느꼈기에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루시퍼의 잔향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직이었다. 이 공간을 제대로 훈련장으로 활용하려면 꼭 필요한 작업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물론, 맨 입으로 제 말을 믿어달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서걱.

직후 단단한 뭔가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기운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영향만으로 주위의 대기가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인가.

하지만, 뒤돌아본 내가 본 것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리리스의 오른손에는 그녀의 검이 들려있었지만, 그 검은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에는 아직까지도 검은 마나를 뿜어내고 있는 회색빛의 물체가 들려있었다.

내가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뿔을, 잘라냈다고…?’

리리스의 왼손에 쥐어진 그것은 바로 그녀의 뿔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왼 뿔에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절단면만이 남아있었다.

“대체, 무슨…….”

마족들의 뿔은 단순히 단단한 신체부위 정도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었다.

마족들에게 있어서 뿔은 코어에서 형성된 마나가 저장되는 곳이었으며, 또한 그 마나를 증폭시키는 역할도 수행하는, 코어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마나 기관이었다.

물론 재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뿔을 재생시킨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세월동안 축적되어있던 그 마나까지 재생되는 건 아니었다.

뿔을 잃는다는 건 그동안 모아왔던 마나의 대부분을 뭉텅이로 잃게 된다는 뜻이었다. 잘은 몰라도 리리스 정도나 되는 마족의 뿔에 담겨있던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 절단된 뿔에서 새어나오는 마나만으로도 주위의 대기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 뿔에 담겨있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지?”

“그런가요… 하긴, 한 쪽만 잘라내는 것도 참 우스운 짓거리겠죠.”

“그런 말이 아니라… 하아.”

내 말에 리리스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왼손에 바꿔 쥐고 다짜고짜 반대쪽 뿔도 잘라내려 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단숨에 리리스에게 다가가, 다른 쪽 뿔도 잘라내려는 리리스의 손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일단 멈춰봐.”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일방적으로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조차도 모른 채 그녀의 의도대로 끌려 다니는 상황은 피해야만 했다.

“당신에게는 사죄해둬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무작정 믿어달라고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요.”

리리스는 조금 고통스러운 듯 뿔을 감싸 쥔 채로 말했다. 다만 그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다만 시간이 없는 상황이고, 제 목을 내드리기는 조금 난감하니 급한 대로 그나마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이고자―”

“아니, 잠깐. 그건 좀 심하…씁, 그래. 좀 심하잖아.”

내 생전에 마족에게 심하다는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기에,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오만하게 지껄이는 마족의 뿔을 강제로 뜯어낸 적은 많았지만, 자기 스스로 뿔을 잘라내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목숨에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사죄’라는 말을 입에 담는 마족도 처음이었다.

“하아…….”

나는 여러모로 내 상식과는 많이 다른 낯선 광경에 적잖은 당황을 느꼈다. 결국 나는 천천히 제자리에 주저앉아, 손에 턱을 괸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은… 이야기라도 들어보자고.”

적어도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마족과 한가롭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낯선 경험이었지만 말이다.

* * *

“…그래서, 그 바알이란 놈이 마왕들을 다 죽이려고 한다고? 마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모아놓은 영혼에너지를 자기가 독차지하려고?”

“예. 바알은… 애초에 마신을 부활시킬 생각자체가 없었던 거예요.”

리리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말이야.”

“무엇이죠?”

“바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마왕들과 연합하면 되는 일 아니야? 왜 굳이 나와 협상을 하려는 거지?”

루시퍼의 말에 따르면 바알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곱 군주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군주들이 바알에게 반기를 든다면, 바알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내부의 동료들끼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나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왕들은, 마신님을 섬긴다는 걸 제외하면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아요. 겉으로는 협력관계를 유지하지만, 언제든 기회가 나면 얼마든지 뒤를 칠 수 있는 사이에 불과하죠.”

리리스의 표정에 씁쓸한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다른 마왕들에게 바알의 계획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거에요. 제가 바알을 노린다고만 생각하겠죠. 설령 믿는다하더라도 그들은 바알 쪽으로 붙을 거에요. 당장은 그쪽이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흐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내가 여태동안 보아온 마족이란 놈들은 그런 족속들이었으니까.

적어도 납득은 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아스트레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지?”

리리스는 다짜고짜 나를 아스트레아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했었다.

“말 그대로에요. 아크, 당신을 비롯한 용사들은 아스트레아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용사의 힘을 손에 넣어야 해요.”

“…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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