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0화 (90/135)

90화

리턴

“에이, 쓰읍… 대체 뭐지?”

이태현은 욱신거리는 엉덩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낙법도 취하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강제적인 소환마법으로 인한 불쾌감도 아직 남아있었고, 자연스레 그 표정은 오만상을 다 찌푸린 모습이 되었다.

“히이이이익!!”

“…?”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앞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질겁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겁을 준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눈을 마주친 사람들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하.’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이태현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깔아뭉개고 있는 지를 보고 나서야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주위 사람들은 서로 같은 일행인 게 아니라 두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무리와, 짐짝을 매고 있는 무리.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자기는 어떤 대머리 아저씨를 깔아뭉개고 있는 상황이었다.

머리빡에는 커다란 흉터가 박혀있었고, 온몸은 우락부락한 것이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산적 우두머리에 딱 어울리는 양반이었다.

“음, 거, 시대라도 역행하신 양반들인가. 그래도 그렇지 요즘 같은 때에 산적질은 좀…….”

이태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한 때는 이런 산적질이 흔하게 벌어지던 적이 있었다. 인류가 곧 멸망할 거라 여겨지던 게이트 오픈 초창기의 일이었다.

아마 그 잔재 같은 놈들이겠지.

“거, 같은 사람들끼리 웬만하면 칼부림하는 일 없이 원만하게 해결들 합…시?”

그러던 중 이태현은 문득 눈에 들어온 무언가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그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구석에 몰려있는 일행들 중에 한 명의 가슴에 매달려있는 방패모양의 브로치.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브로치였다.

하지만 그가 그 브로치를 봤던 건 지구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문이 막힌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스틴 제국의, 상단이라고…?’

그 표식은 이 상단이 제국의 허가를 받아 활동하는 것임을 증명했으며, 또한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의 복장들도 아스트레아의 것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특이하다는 건 처음부터 눈치 챈 점이었지만, ‘그냥 이 지방에 전통 민족 의복이겠거니―’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의식하면서 일일이 살펴보니, 기억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스트레아에서 자주 봤었던 양식의 의복들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그 때 이태현의 몸통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여태 깔아뭉개고 있던 산적 우두머리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것이다.

잠시 멍하니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던 이태현은 가볍게 하늘로 떠올랐고, 직후 산적 우두머리가 휘두른 거대한 몽둥이에 얻어맞았다.

몽둥이에 얻어맞은 이태현의 몸뚱이는 거대한 나무에 부딪혔고,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크으, 이런 시발!! 재수가 없으려니. 대체 뭐하는 새끼야?”

“형님, 마저 처리할까요?”

“엉? 병신아, 방금 늑골 후려친 거 못 봤냐? 저거면 얄짤없이 사망이야, 사망.”

“…하지만, 저 새끼 지금 움직이고 있는데요.”

산적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태현은 그들이 뭐라 떠드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번역 마법이 기동하고 있어.’

이태현은 땅바닥에 누운 채로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은은하게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허허.”

그 반지가 빛을 발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했기에, 이태현은, 아니 로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그마한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그 반지는, 처음 아스트레아에 소환되었던 로스릭 왕국에서 용사들을 준비해준 일종의 아티팩트였다.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는 쓸 일이 없어졌음에도 이미 끼고 다니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기에 악세사리로 계속 끼고 다녔었던 반지.

그 반지에 걸려있는 건 아스트레아의 언어들에 대한 통역마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통역마법이 자기 멋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큭큭, 푸하하하하!! 시발. 실화냐 이거?”

이태현은 상체를 일으킨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탓이었다.

“죽어, 이 새끼야!!”

그 순간 대머리 산적 우두머리의 몽둥이가 갑작스럽게 이태현의 눈앞에 나타났다. 얼굴을 직격으로 노리고 들어오는 명백한 살수였다.

“꺼져, 아저씨.”

콰자자자작!!

이태현은 몸을 일으키면서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 몽둥이를 깨부쉈고, 몽둥이를 깨부순 주먹은 그대로 산적 우두머리의 얼굴에 꽂혔다.

“…형님?”

“힉, 히이익!!”

인간의 힘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상인들도 산적들도 모두 말을 잃었다.

“쯧,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더럽게스리.”

이태현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처럼 간단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손을 털어내고 있었다.

“이봐, 수건 좀 하나 꺼내줘. 아, 그리고 니들은 도망갈 생각 말고 거기 서있어라. 물어볼 게 있으니까.”

이태현은 방금 막 도망치려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녀석에게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수, 수건이요…?”

“그래, 수건.”

“어, 없습니다만…….”

“아, 정 없으면 교역품 중에서 적당한 거 아무거나 꺼내주던가. 유도리가 없냐, 유도리가. 내가 직접 뒤져서 찾아야겠냐?”

“아, 알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배낭을 뒤지고 있는 상인들을 바라보다, 이태현은 문득 자신의 행동이 거칠어져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로크로 지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경이 좀 날카로워진 건가.’

이태현은 안색이 창백해진 상인이 건네준 실크드레스로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나의 밀도도 높아져있구나.”

일단, 잘은 모르겠지만 자기는 다른 곳으로 강제 소환을 당했다. 그리고 여기는 왠지 아스트레아일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드는 곳이었다.

뭐, 자세한 건 이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질문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워어, 워―”

“…진짜네. 이거.”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멈춰 세우는 소리.

당연하게도 지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굳이 말을 타러 목장까지 찾아가기라도 하지 않는 한 말이다.

한 때 익숙했었고 지금은 낯선 그 소리에 이태현은 고개를 돌렸고, 그는 판금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이제 막 말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징표는 그들이 아스틴 제국의 순찰대라는 것을 말해줬고, 그들의 존재는 여기가 아스트레아라는 걸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 * *

“…곤란하게 됐네요.”

허공에 떠오른 상태에서 탐색을 끝마친 리리스가 난감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방금 전에 대량의 마나를 사용해서 소환 의식을 치뤄 냈다. 다름 아니라 과거에도 한 번 실행했던 적이 있는, 용사 소환 의식이었다.

그녀는 저번과 같은 대상들에게 같은 의식을 행했다. 즉, 아스트레아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을 다시 아스트레아로 보낸 것이다.

물론 지구의 시간이 멈춰있었던 저번과 달리 지금은 두 세계의 시간이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이었고, 시간축이 뒤틀렸던 저번과 달리 용사들의 시간축 역시 동일했다.

때문에 새롭게 고려해야할 사항들도 많았고, 마법의 구조와 방식도 조금씩 바꿔야만 했다.

그러나 리리스에게 그 정도는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녀는 광장에 앉아있던 용사 두 명이 사라지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한 참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락되어버리고 말았다.

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가는 것을 보고 리리스는 안심했지만, 의식에서 아크가 제외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마나를 움직였다.

“지금 아크는 이 세계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그녀가 알아낸 결과는 아크를 찾을 수 없다는 거였다.

혹시 그가 자신의 마법에 저항해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환 의식에도 불응한 것이고, 탐색 마법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리리스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탐색 마법 정도에 저항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소환마법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설령 아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공간마법은 절대적인 수준이다.

이 공간마법만으로 2석의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지금 지구에 아크가 없다는 거였다.

‘루시퍼를 처리하려고 아공간으로 들어간 걸까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루시퍼를 죽이겠다는 기아스를 맺었다. 그는 반드시 루시퍼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루시퍼를 죽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죽일 다른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다. 당연한 귀결이다.

손쉽게 진실에 도달한 리리스는 요 근래에 형성된 아공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차원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공간 압축을 끝마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어떤 녀석이지.’

타인이 아공간에 침입하는 건 상당히 복잡한 마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최상급에 속하는 마법인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떤 세계와도 연결점이 존재하지 않는, 말하자면 차원에서 고립되어있는 완전히 독립된 세계였다.

또 다른 차원석을 가지고 있는 상대인가.

아니면, 그 정도의 차원 간섭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대인가.

어느 쪽이건 간에 상대가 나와 우호적인 사람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전자라면 마족일 확률이 높았고, 후자가 가능한 녀석은 일곱 군주들 정도밖에 떠오르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쯧… 바알? 아니면 메피스토?”

일곱 군주가 상대라면 누가 나타나건 간에 가볍게 끝낼 수 있는 전투는 아니었다.

나는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원의 틈을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의외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일곱 군주 중에 한 명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크, 이 세계는 대체…?”

“…리리스?”

리리스.

일곱 군주들 중에서 2석을 차지하고 있는 탐욕의 군주이자 나와 오랜 악연을 맺고 있는 마족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나타나자마자 당황스런 표정을 지은 채 좌우를 살펴보고 있었고,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휘저어 보기도 했다.

‘…뭘 하는 거지.’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투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투에 대비하는 움직임은커녕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방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쪽의 의욕도 꺾이고 있었다.

싸울 생각으로 온 건 아닌가.

이미 루시퍼와의 전투로 지쳐있던 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 정도면, 마계보다도 마나 밀도가 더 짙은 것 같기도 한데요…….”

리리스는 두 손을 모아 주변의 공기를 동그랗게 감싸 쥐는 것 같은 동작을 취하면서 말했다. 마나의 밀도를 분석할 때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기습을 노려볼까 생각해봤지만 바로 접었다. 기습이 통할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전투가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리리스.”

나는 계속 검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