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소연이를 바라보니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킥.”
소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웃음소리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던 탓인지, 소연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물론 아직 나를 두려워하는 시선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선들도 분명히 있었다.
주변 상황을 대충 마무리 지어놓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로이드와 이태현은 별 반응 없이 애매한 미소만 짓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크라는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중절모를 벗고서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얀이라는 남자는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선은 애초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평소처럼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고, 그녀는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내뱉고 나서야 이쪽을 바라봤다.
나쁘지 않았다.
용사 아크로 지내던 시절과는 다른 반응들이었다.
“내가 여길 두고서 다른 곳으로 떠날 리가 없잖아.”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나는 다시 소연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썩 나쁜 표정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아직 불안하다는 듯 소연이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아 포개놓은 채로 말했다.
그 여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든가, 무방비 상태인 그 연갈색 머리를 상냥히 쓰다듬어주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
나는 무심결에 닿을 수도 없는 손을 내뻗고 있었고, 나는 어색하게 그 손을 다시 밑으로 내렸다.
‘…그래, 나에겐 이 정도 거리가 딱 어울릴 테니까.’
바라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거리.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바라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었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먼저 처리해둬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루시퍼를 죽이겠다는 맹세로 기아스를 걸어둔 상태였고, 그건 당연히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살의 맹약.
게다가 맹약에 걸려있는 대가는 나의 에테르 코어였다.
기아스의 경고와 저항에는 익숙해진 몸이지만, 그래도 이대로 방치해두면 내 에테르 코어가 깨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아내야 할 것도 있고 말이지.’
나는 루시퍼를 어깨에 들쳐 멘 채로 아공간 결계 안에 한쪽 발을 들이밀었다.
“…오빠.”
다시 한 번 소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 미소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워보였지만, 억지로 짓고 있는 미소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한 덕분인지 나는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한 20분 정도밖에 안 걸릴 텐데.’
걱정이 심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싫지는 않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서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아공간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대 답지 않은 모습이었군, 이블아이.”
“음… 그래? 소연이다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직 멀쩡히 남아있던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이소연에게 로이드와 이태현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작업은 다 끝났어요?”
“뭐, 협회장이 할 일은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
로이드는 그녀를 마주보면서 맨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주변에는 협회의 인원들이 나와서 한참 피해정리를 시작하고 있었고, 일대로 흩어진 몬스터들을 쫓기 위해 헌터팀들이 출동한 상태였다.
“미안해요. 수색이라도 도와드려야하는 건데.”
“됐네. 이미 말도 안 되는 전투를 치룬 상태이지 않나. 휴식도 중요한 법일세.”
비록 단기간동안 벌어진 전투라고는 하지만 S급 헌터들은 루시퍼의 군대와 직접적으로 맞붙었었다.
다들 이미 에테르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고, 헤인이나 록슬리 같은 경우는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로이드는 그런 인원들을 무리하게 다음 임무에 투입시켜 말도 안 되는 강행을 펼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야, 그건 그렇고, 소연이한테도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건가!”
이태현이 벤치의 빈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그 차가운 이블아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 아주 난리가 나겠는 걸?”
“…하여간, 그대는 아스트레아에서부터 그런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구만.”
이태현을 바라보던 로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이, 뭐 그야 그게 재밌으니까 그러는… 예?”
로이드의 말에 적당히 대답을 하던 이태현은 뒤늦게 당황하며 로이드를 바라봤다.
“아스… 뭐라고요? 설마, 회장님, 설마…!”
“흥, 멍청한 건 약으로도 못 고친다더니 딱 그 꼴이군.”
혼란에 빠진 이태현을 내버려둔 채 로이드는 이소연을 바라봤다.
“그건 그렇고. 이블아이, 뭔가 느끼기라도 했던 건가?”
그녀는 그 능력 때문인지 직감이 굉장히 좋았다. 때로는 미래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로이드는 그녀가 조원호를 대하는 모습이 단순한 연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조금, 불길한 예감을 느꼈어요.”
이소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겠죠? 그런 일, 일어날 리가 없는데.”
“…흐음, 그건 걱정하지 말게. 아공간 결계에서 탈출하는 것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야.”
물론 조원호에게 공간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로이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방금 전 조원호가 차원석을 사용하는 모습을 봤었다.
그가 대체 언제 차원석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아크라는 걸 생각하면 대충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손쉽게 해냈었으니까.
그리고 차원석이 있다면 아공간 결계 정도야 얼마든지 뚫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별 일은 아니었나. 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런데, 로이드.”
“음? 왜 그러는가.”
이소연은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며 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아스트레아가 대체 뭐에요?”
이소연은 방금 로이드가 했던 말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로이드가 그 단어를 꺼냈을 때, 이태현은 수상한 반응을 보였고 아직까지도 허둥거리는 중이었다.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으음. 그래… 이제 슬슬 그대들 정도에게는 말해 둬야할 거라고 생각했던 참이었지.”
로이드는 잠시 동안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마족들도 지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태동안은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녀석들만 간간히 나타났을 뿐이지만, 이제 곧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헌터들에게도 마족들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전파할 필요가 있었고, 그 설득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아스트레아라는 건 말이지…….”
로이드는 잠시 말문을 줄였다.
뭔가 말하기 힘든 내용인 걸까.
이소연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로이드?”
하지만 그 침묵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이소연은 고개를 들어 로이드를 바라봤다.
“로이드?”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현 오빠, 회장님이…….”
이소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옆에 앉아있던 이태현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태현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이소연은 급하게 감지망을 펼쳐냈다.
아직 피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아낸 건, 적어도 이태현과 로이드가 이 주변에서는 자취를 감췄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말도 안 돼…….’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끼며 이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원호가 아공간 결계로 넘어가던 때 느꼈던 예감과 비슷한 예감이었다.
* * *
철퍼덕.
“크헉!!”
바닥에 루시퍼를 내팽개치자, 녀석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공간 결계까지 따로 열어서 들어온 것은 저 녀석이 편하게 바닥에 누워있는 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나는 다시 새로 돋아나기 시작하던 팔과 다리에 에테르의 검을 한 자루식 꼽아 바닥에 고정시켜두고서 말을 걸었다.
“이봐, 루시퍼.”
“히윽, 헉, 흐끄으으윽…….”
녀석은 고통 때문인지 내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하긴, 이제 막 재생되고 있을 땐 어느 부위건 간에 연약하면서 또한 예민하다. 고통스러워할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배려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찍어주고 나서 다시 말을 걸었다.
“루시퍼. 내 말이 같잖게 들려? 아직도 하찮은 인간의 말은 들을 생각이 나지 않는 건가?”
“아, 아니야! 아뇨, 아닙니다. 아닙니다!”
루시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마빡에서 핏물이 줄줄 흐르는 게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서 내가 만족하면, 그 때마다 네 사지를 묶고 있는 검들을 하나씩 뽑아줄 거야.”
루시퍼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은…….”
나는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할로우 나이트는, 어떻게 만들어낸 거지?”
선생님이 언데드 몬스터로 살아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그리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지만, 어쨌거나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그 끔찍한 진실이 현실인 이상,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했다.
“용사는 죽는 순간 육신과 영혼이 그 자리에서 파괴될 텐데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유, 육신은 맞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아닙니다.”
“영혼은 아니다? 무슨 의미지?”
“물론 영혼이 파괴되는 건 맞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곧바로 파괴되어 세계에 흡수되는 육신과 달리 영혼은 마계로 이동되어 마신님에게 흡수됩니다.”
“…그래서?”
루시퍼는 계속해서 자신이 할로우 나이트를 만들어낸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우선 눈여겨보고 있던 용사에게 군대를 보냈고, 그 용사가 죽는 것을 지켜본 다음 영혼이 빠져나오는 순간 차원의 틈을 강제로 틀어막고서 그 영혼을 빼돌렸다고 했다.
“요 근래동안 만들었던 작품 중에 제일 훌륭했던 작품이었죠. 역시 소재가 좋아야― 끄아아아악!!”
루시퍼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칼 한 자루를 추가로 루시퍼의 몸뚱이에 내리꽂았다.
“듣자듣자하니 아주 기세등등하다? 뭐 훌륭한 일이라도 했어? 자랑이야?”
“아, 아닙니다. 끄억, 죄송합니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번에는 목에 꽂힐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낸 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녀석은 목숨을 위협받아서 그러는지 내가 묻는 데로 순순히 전부 털어놓았다. 뭔가를 감추는 듯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선생님의 혼이 두 개로 나뉘어져있는 상태라는 거냐?”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차원 이동자를 대상으로 한건 저도 처음이라서요. 하지만 아크님의 말대로라면 나눠졌다기보다는 하나 더 생긴 쪽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만…….”
조금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지금 미카엘라와 할로우 나이트는 한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