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뒷정리
바로 옆에서 크리스가 아공간 결계를 펼치고 있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작업을 하기로 했다.
‘차원의 틈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딱히 그런 낌새가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색이 일곱 군주라는 놈들이, 자신들의 일원 중 한 명이 죽어나가고 있는 지금 상황을 그냥 방치해두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차원의 틈이라도 몰래 열어 놓고서 이쪽을 훔쳐보고 있겠지.
‘대충… 저쪽이로군.’
나는 차원석을 꺼내들고 주위에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살펴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한 쪽 구석에 조금이지만 차원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는 정말 미세하게 차원의 틈이 벌어져있었으며, 그 작은 틈새에는 보안마법들이 몇 겹이나 겹쳐있는 주시자가 빼꼼히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주시자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곳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뻗은 채 좌우로 흔들었다.
“…뭐해?”
“아,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멋쩍게 대답하면서도 손가락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
“아니,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크리스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고서, 나는 내뻗고 있던 가운데 손가락에 마나를 담고서 공중에 도발의 의미를 담은 룬어를 그렸다.
대충 해석하자면,
<수작부리지 말고 올 거면 한 놈씩 와라. 꼬우면 찾아오던가.>
룬어를 완성시키고, 나는 주시자를 향해 에테르로 만들어낸 단검을 투척했다.
“!!!!”
그 때까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주시자는 갑작스럽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시자는 단순한 아티팩트에 불과했으니,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들의 감정이 반영된 움직임이리라.
설마 자신들의 위치까지 파악했을 줄은 몰랐겠지.
주시자에게 이동기능은 있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응할만한 능력은 없었으므로, 주시자는 에테르의 단검에 꿰뚫린 채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는 의미가 사라진 차원의 틈이 천천히 닫혀가는 걸 끝까지 확인한 후, 나는 차원석을 다시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 * *
리리스와 루시퍼를 제외한 다섯 명의 군주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오로바스가 주시자로 보여주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크는 루시퍼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 아공간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루시퍼가 죽으면 지구에 대량이― 마나가 풀려버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화면에서는 아크가 곧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왼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화면에 보이는 건 손등 쪽 방향이었다.
“그으으으음…….”
살얼음이 낀 판금 갑옷의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리며, 그와 동시에 차가운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레비아탄은 바닥에 꽂아 넣은 검 손잡이에 양 손을 포갠 채로 근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분노를 느끼다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건 다른 마왕들 역시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레비아탄도, 메피스토도, 바알도, 오로바스도.
오직 벨제부브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뭔데? 저게 뭔데?”
벨제부브는 평소처럼 멍청한 질문을 해대고 있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들 처음 겪고 있는 지금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마왕은 마족들의 정점에 속하는 존재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마왕들 중에서도 정점에 속하는 일곱 군주였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존재였다.
공포, 좌절, 절망.
자신들과 마주하는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은 거의 대부분이 저 셋 중 하나에 포함되었고, 때로는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가끔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필사의 각오.
불굴의 의지.
마지막 긍지.
이런 낯짝 간지럽기 딱 좋은 표현들이 어울리는 놈들은 있었다.
소위 영웅이라 불리는 녀석들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악문 채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녀석들은 자주 나타났다. 그런 놈들은 적어도 세계에 한 명 정도 씩은 존재했다.
하지만 저딴 식으로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도발하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난생 처음 겪어보는 낯선 경험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지.”
그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바알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미 그는 주위에 투기와 살기를 거침없이 뿜어내고 있었고, 덕분에 주위는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저 제스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윽, 그, 글쎄? 오로바스, 넌 아냐?”
바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메피스토는 말을 얼버무리며 오로바스를 바라봤다.
메피스토가 저 제스쳐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제스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바알에게 저 제스쳐의 의미를 말해주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메피스토에게는 그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휴우.”
메피스토의 눈빛에 담긴 은근한 눈치와 압박에 결국 오로바스가 입을 열었다.
“대충 말하자면… ‘엿이나 먹어라’정도겠네요.”
“큭,”
오로바스의 말에 바알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바알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본 채 꽤 오랫동안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썩 좋은 징조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다른 군주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 녀석이 뭔가를 적고 있는데요?”
아크의 가운데 손가락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공중에 룬어를 적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장으로 완성된 룬어가 하얀빛으로 번쩍였다.
“수작부리지 말고 온다… 아니, 올 거면이군요. 수작부리지 말고 올 거면 한 놈씩 와라. 꼬우면 찾아오던…가.”
오로바스는 해석을 하다가 그 내용이 방금 전 도발보다도 더욱 막나가는 것임을 깨닫고 말을 흐렸다.
“뭣?”
그러다 오로바스는 조원호의 시선이 주시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이라도 터진 것처럼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주시자와의 연결이 끊겨버렸다.
“큭, 크크크크큭! 끝까지 유쾌한 놈이로구나!!”
그 말과 달리 바알이 뿜어내는 분위기와 표정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분명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뿜어내는 투기와 살기는 한층 더 짙어졌으며 얼굴에는 핏줄까지 서있는 상태였다.
“좋아, 그게 소원이라면 소원대로 해줘야겠지.”
“오오, 직접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역시… 히익?!”
오로바스의 말에 바알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고, 그 시선에 담긴 살기에 오로바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말게, 가끔은… 그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드니까.”
바알은 오른손을 내밀고서 뭔가를 비트는 시늉을 냈다.
그와 동시에 한쪽 벽에 세워져 있던 갑옷의 몸통이 통째로 비틀어져, 배배 꼬인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에 오로바스는 목 주변을 더듬으며,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두 차례 끄덕였다.
바알은 오로바스를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섰다.
‘…그래, 그 소원대로 해주지.’
하지만 오로바스가 물어봤었던 것처럼 혼자서 쳐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마왕들을 희생양으로 보낼 생각도 없었다.
기껏 보내봤자 루시퍼처럼 죽지도 못하고 생포나 당해서 험한 꼴이나 볼 것이다.
“바알, 바알!!”
그 때 벨제부브가 총총 걸음으로 로비를 달려 나와 자신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인가.”
바알의 물음에 벨제부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쟁이야? 응? 전쟁이야?”
하여간 싸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녀석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알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벨제부브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초롱초롱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눈동자였다.
흥분한 상태인지 귀는 바짝 세워진 채로 움찔거리고 있었고, 호흡까지도 조금 가빠져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뒤에 달린 꼬리는 정신없이 좌우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피식.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알은 실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어딜 봐서 그 광기의 맹견이란 말인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나의 군대를 움직이도록 하지.”
“그럼 나도!! 나도 보낼래!! 나도 갈래!!”
벨제부브에게서는 어떤 계산적인 면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순수한 욕망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알은 턱을 짚으며 말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그대가 바로 움직이는 건 무리겠지. 우선 군대들부터 움직이게. 자네는 때가 되면 부르도록 하지.”
“응!! 기다릴게!!”
그리고 벨제부브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우선은 총공격이다.’
모든 군대를 모아서 아낌없이 지구에 퍼붓는다.
차원에너지가 풀리지 않도록 마왕을 죽이지 않겠다면, 마족들과 몬스터들을 지구에 쏟아부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 * *
“원호, 완성했어. 여기로 집어넣으면 될 거야.”
아공간 결계를 완성시킨 크리스가 차원 간의 통로를 열어둔 채로 말했다. 집어넣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내가 아공간 결계를 어떻게 활용할 지 대충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다.
“고마워. 그럼 잠깐만 빌려 쓸게.”
나는 크리스에게 미소를 건넨 후,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루시퍼를 들어올렸다. 이것저것 떼 낸 다음인지 조금 가벼웠다.
“지, 지금 어디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냐!! 네놈…? 아니, 아닙니다. 실수입니다. 히익!!”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서 주먹을 들어 올리자 녀석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일곱 군주고 나발이고 위엄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꼴이었지만, 이미 숱하게 보아온 장면이었기에 별 감흥도 없었다.
“아, 크리스. 그리고 말이야.”
“응? 왜?”
“내가 들어가면, 아공간 결계를 아예 닫아줘.”
“…아예 닫아달라고? 그게 무슨 의미지?”
크리스는 재차 확인하며 나에게 되물었다.
“아예 이쪽 세계와의 연결을 끊어달라고. 독립된 세계가 되도록 말이야.”
“안 돼요, 오빠!!”
어느새 근처까지 달려온 소연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친 탓일까? 왠지 그 표정도 조금 절박해 보였다.
“오빠가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뭐?”
소연이는 다시 한 번 급하게 외쳤고, 나는 그제야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게 대충 어떤 내용의 오해일지는 짐작이 갔다.
마왕과 함께 다른 세계에 봉인되는, 뭐 그런 느낌?
이제는 평범하다 못해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흔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나로써는 조금 당황스러운 오해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