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비록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기는 했지만, 지저분하다는 인상은 조금도 없었다. 그 물체에 담긴 것은 신성함 그 자체였다.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루시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왼쪽 날갯죽지를 더듬어봤다.
없다.
자신의 날개가 없다.
그곳에서 만져지는 건, 깔끔하게 베여나간 절단면뿐이었다.
“으, 으아아아아!!”
그제야 루시퍼는 저 물체가 바로 자신의 날개라는 사실을 직시했으며, 뒤늦게 절규했다.
“죽이겠, 죽이겠다, 인간!! 감히, 감―”
“시끄럽다.”
빠악!!
하지만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원호는 오른발로 자신의 무릎 언저리까지 올라와있던 루시퍼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감히? 감히라고?“
“컥, 커헉, 크윽.”
조원호는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시퍼의 멱살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고, 머리를 걷어차여 잠시 정신이 혼미한 루시퍼는 조원호의 팔에 붙들린 채로 축 늘어져있었다.
조원호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루시퍼의 상태를 살펴봤다. 과연 마족답게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지 타박상은 물론이고 깊게 찔렸던 검상마저 거의 회복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
곱게 죽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조원호는 땅바닥에 루시퍼를 집어던졌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다.”
그리고 훤히 드러나 있는 그 등짝을 발로 눌러 고정시킨 후, 온전히 남아있던 오른쪽 날개 중 하나를 붙잡았다.
“멈춰, 멈춰!! 멈추란 말이다!!”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직감적으로 눈치 챈 루시퍼는 괴로움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위엄도, 권위도 없는 애원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그리고 조원호에게는 그 애원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꾸드드득, 찌직.
그는 거추장스럽게 날뛰기 시작한 날개를 단숨에 뜯어냈다.
“끄아아아아악!!”
방금 전에는 날개가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조차도 뒤늦게 깨달을 정도로 깔끔하게 베여나갔었다. 그렇기에 그때는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일방적인 폭력에 자신의 날개가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고통이 루시퍼에게 생생하게 느껴졌고, 그 느낌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동시에 치욕적이었으며 굴욕적이었다.
“히익, 흐윽, 키아아아악!!”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며, 그 치욕과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흘러나온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조원호는 담담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속이 시원하다거나, 통쾌하다던가, 혹은 변태처럼 희열을 느낀다던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조원호는 루시퍼를 짓밟을수록 그런 감정들이 마모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지금 행동은 무엇일까.
심판? 정의집행?
아니,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런 숭고한 단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단순한 복수. 보복. 앙갚음.
그래, 지금 자신의 행동은 그런 저열한 수준에서 비롯된 행동일 뿐이었다.
“큭, 큭큭큭…….”
문득 조원호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메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기계적으로 루시퍼의 날개를 한 장씩 천천히 뜯어냈다.
“흐아아아악!! 이, 이 자식!! 미안, 미안해!! 아니, 죄송합니다!!”
고통과 굴욕으로 패닉상태에 빠진 루시퍼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내뱉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 소리나 내뱉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원호가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허무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같잖았다.
같잖고도 하찮았다.
이 녀석은 단순한 애새끼에 불과했다.
자신은 이런 같잖은 존재에게 놀아났었다는 말인가.
이런 같잖은 존재에게 선생님을 잃었었단 말인가.
감히 이딴 녀석이 선생님을 농락했다는 말인가.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일곱 군주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지금 이 순간만 하더라도 루시퍼에게는 아직 상황을 뒤집을만한 힘이 남아있었다.
그러면 뭐하는가.
지금의 그에게서는 그 어떤 위엄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일말의 냉정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녀석은 비참하게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아까 전까지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갔냐?”
“죄송합니, 죄송합니다, 흐윽, 이거 놔, 제발, 제발… 끄아아악!!”
조원호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날개를 잡아 뜯었다.
아직도 발밑에 눌려있는 루시퍼는 마나를 끌어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 칠뿐이었다.
이젠 뜯어낼 날개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목숨을 끊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뜯어낼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 * *
“역시. 나는 저 꼴이 날 줄 알았다.”
차원 너머에서 루시퍼와 아크의 싸움을 지켜보던 레비아탄이 말했다.
“지, 지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차원에 틈을 열어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던 오로바스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로바스, 언제나 말하지만 그대는 너무 유약한 것이 문제라네.”
바알이 핀잔을 주듯 오로바스에게 말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긴장하고 있다기보다는 기품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루시퍼의 생사여부가 아니라, 우리들이 침입할 수 있을 정도의 차원 에너지가 풀리는 것일세.”
바알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차원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는 비단 마족들과 마계에만 국한되어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아스트레아처럼 마나가 풍부한 세계라면 별 문제가 없다. 급한 대로 마나를 차원 에너지로 전환시켜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처럼 마나가 거의 고갈된 세계일 때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자잘한 몬스터들이나 귀족급의 마족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아무리 마나가 부족한 세계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마왕급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왕급들은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세계 자체의 마나 순환의 구조가 바뀔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집결체.
그런 마왕들이 다른 세계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차원 에너지가 필요했고, 때문에 한 세계에서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마왕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오로바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바알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 계획은 오로바스, 그대가 꺼낸 것이지 않은가.”
“저, 저는 그냥 ‘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꺼내봤을 뿐이었는데요.”
바알은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지구에 머무를 수 있는 마왕의 숫자는 고작해야 한 명, 무리해서 구겨 넣어야 겨우 두 명이지.”
“…예, 그렇죠.”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내 실력에 그다지 자신이 없는 편이라 말일세. 행여 각개격파라도 당할까봐 두렵군.”
“바, 바알님께서 나서신다면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로바스의 말에 바알은 싱긋 미소를 지어보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오로바스의 말은 적당히 무시한 셈이었다.
“하지만, 루시퍼가 죽고 루시퍼의 코어에 담긴 마나가 저 세계에 퍼진다면?”
마나가 고갈된 세계에서 차원 에너지를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강한 마력을 보유한 개체를 그 차원으로 보내 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원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에서 죽은 개체는 육신과 영혼이 마나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퍼는 신의 축복과 마신의 축복을 동시에 받은, 마나 보유량 그 자체만으로는 바알에게도 버금갈 정도로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마왕이다.
그런 루시퍼가 지구에서 죽는다면, 지구에는 단번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풀리게 된다.
“어차피 마왕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던 타천사 나부랭이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영광스러운 일이겠지. 그러니 그대도 크게 신경 쓰지 말도록 하게.”
“윽… 알겠습니다.”
바알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반박을 불허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루시퍼, 약해?”
그 때까지 조용히 차원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던 벨제부브가 바알에게 물었다. 머리 위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늑대의 귀가 쫑긋거렸다.
바알은 벨제부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벨제부브는 얼굴을 찌푸리며 오로바스에게 말했다.
“약한 녀석이 죽는 건, 당연한 거야.”
말을 마친 벨제부브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침 남아있던 반대쪽 팔까지 작살나는 장면이 보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리리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리스, 어디가는건가?”
“바람 좀 쐬러 다녀오겠습니다. 남정네들만 가득한 곳에 있으려니 숨이 좀 막히는 군요.”
바알의 물음에 리리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흠, 그래. 조심히 다녀오게.”
“…흥.”
리리스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비웃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바알에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서는 밖으로 나섰다.
‘…뭐, 상관없겠지.’
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알은 생각했다.
저 멍청한 년이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저 년도 자신이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겠지.
바알에게는 어찌됐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저 년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면, 그 때는 저 년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길 뿐이었다.
영혼의 숫자는 이제 거의 목표치만큼 쌓인 상태다.
이제는 슬슬 마왕의 숫자를 줄일 때였다.
* * *
“끄으으윽… 으윽…….”
루시퍼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땅바닥에 널부러져 신음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이제는 재생속도도 느려져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앞에 선 채로 조용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에 절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있어 조금 불편했다. 물론 내가 흘린 피는 아니었지만.
‘…이 놈을 어떻게 할까.’
일단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간단한 치료마법을 걸어둔 후,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처치할 지를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숨통을 끊어 물고기 밥으로라도 던져버리고 싶었다. 바닥에 널부러져 숨을 쉬고 있는 모습조차도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이 녀석을 죽이면 지구에 막대한 양의 마나가 풀려 버린다. 그렇게 되면, 몇 명이나 되는 마왕들이 단숨에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겠지.
이 세계에 루시퍼 한 명만을 보낸 건 녀석들이 멍청해서가 아니었고, 우리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마왕의 숫자는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
나는 뒤로 돌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를 불렀다.
“아… 아, 예. 아니, 응.”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식.
그럴 만도 하겠지.
주위의 시선들은 모두 나에게 집중되어있었고, 그 표정들은 다양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감정은 경악과 공포였다.
익숙한 시선이다.
아니, 익숙했었던 시선이다.
“아공간 좀 열어줄래?”
이럴 때는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좋다.
나에게도, 저들에게도.
나는 그 시선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
약간 머뭇거리긴 했지만, 크리스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친근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사실이 조금 기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