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심연의 불꽃, 어비스 플레임은 간혹 드래곤들의 브레스와도 비유될 정도로 절대적인 파괴를 상징하는, 암흑계열 최상위의 마법이었다.
마왕을 비롯한 최상위 마족들의 상징과도 같은 마법이었으며, 또한 이런 최상위 마족들에게 시전시간을 내줘서는 안 되는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조원호 역시 어비스 플레임이 시전 될 경우에는 최우선으로 견제한다. 견제에 실패했을 경우에는 회피에 온 신경을 쏟는다.
만약 정면으로 받아낸다면, 아무리 미스틸테인의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정면에 서있는 마슈라는 소녀는 별다른 피해 없이 어비스 플레임을 막아냈다. 그리고 피해라고 해봤자 불꽃과 장막이 서로 부딪히던 여파로 인해 주변 일대의 천장이 녹아내린 정도 뿐이었다.
“우우… 펠트, 팔이 얼얼해.”
마슈는 어리광을 부리며 팔이 저리다는 듯 손을 탈탈 털어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놀라운 업적을 이뤄낸 것 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 감히, 감히!!”
반면, 하늘 위에 떠올라 있는 루시퍼는 화를 참지 못해 날뛰며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회의장에 분신을 보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장난이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전의 어비스 플레임은, 지상의 인간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진심을 담았던 일격이었다.
그 일격이 아무렇지 않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막혀버렸다.
루시퍼는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을 보고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순진한 미소년 같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브락쿠스!!”
“예, 루시퍼님.”
루시퍼가 바로 옆의 허공을 바라보며 고함을 지르자, 공간의 틈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부의 남자가 나타났다.
시뻘건 피부와 등 뒤에 돋아나있는 거대한 박쥐의 날개. 그야말로 악마의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마족이었다.
그와 동시에 약 이십 여기의 강력한 기운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모두가 작위를 가진 상급 마족들이거나 루시퍼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최상급 언데드들이었다.
“지휘를 맡아라. 모든 지휘권을 양도한다.”
“…루시퍼님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나는 저 불쾌한 년을 직접 도륙내겠―”
루시퍼가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면서 아공간에 있던 자신의 대낫을 손에 쥘 때였다.
갑작스럽게 솟구쳐 올라온 에테르의 참격에 루시퍼는 말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채, 자신의 무기만 겨우 챙겨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호오, 그래. 네놈도 있었지, 아크.”
자신이 뿜어낸 참격을 뒤따라 하늘로 올라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루시퍼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레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루시퍼는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색한 연기일 뿐이었다. 무기를 쥔 루시퍼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원호는 그가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식.
원호는 냉소를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전투에 임했을 때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전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중에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역시, 마왕이라는 것들은 가진 힘은 강력하더라도 실제 전투 경험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여태동안 만나왔던 모든 마왕들이 그랬고, 루시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들은 전사가 아니라 왕인 것이다. 학살은 숱하게 저질러봤어도 강자와의 치열한 결투는 벌여본 적이 없었다.
“밑에 있는 녀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꽤나 버거운 싸움이 될 텐데 말이야.”
루시퍼는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서로가 아는 사이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그의 말대로 밑에서는 S급 헌터들과 루시퍼의 수하들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원호는 그게 모두 이쪽의 빈틈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미 강화가 끝나 하얗게 빛을 뿜어내는 그의 검, 미스틸테인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앞으로 뻗어져나갔다.
“무엄하게 감히!!”
하지만 그의 검은 갑자기 끼어든 브락쿠스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성인 남성만한 거대하고 투박하게 생긴 방패였다.
“크으으으윽!!”
브락쿠스는 방패로 조원호의 일격을 막아냈으나, 그는 표정을 잔뜩 구긴 채로 뒤로 물러났다. 아니, 밀려났다.
‘이건 대체 무슨…!!’
마치 검보다는 거대한 둔기를 막아낸 듯한 충격이었다.
다행히 방패가 찌그러졌다거나 흠집이 생겼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충격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남아있어 방패를 들고 있는 손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비록 마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오로지 전투만으로 공작의 자리까지 오른 마족이었다.
그렇기에 전투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어지간한 마왕들보다도 뛰어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그만한 실력이 있었다.
‘마왕살해자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그는 조원호의 일격을 받아낸 순간, 저 남자는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브락쿠스, 꺼져라 너 정도가 낄 곳이 아니다.”
루시퍼는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브락쿠스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너한테 지시했던 건 백병전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지휘권을 양도한 의미를 모르겠나?”
‘큭… 젠장, 젠장!!’
브락쿠스가 조원호의 공격을 가로막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전사로써 가졌던, ‘마왕살해자 아크라는 자가 얼마나 강한 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둘째는 겸사겸사 자신의 상관 루시퍼에게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크는 자신이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대였고, 상관에게는 충성스러운 모습은커녕 무능한 모습만을 보이고 말았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만 잔뜩 본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루시퍼님.”
이렇게 된 이상 맡은 일이라도 잘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락쿠스는 지상으로 내려가면서 준비해뒀던 마법들을 일제히 가동시키는 시동 룬을 그렸다.
원호는 그가 룬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 일대에 차원에너지가 대량으로 솟구치는 것을 감지했다.
‘다크 포탈인가.’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라 거의 두 자리 수에 달하는 숫자다. 다급한 상황에서 적당히 감지된 것들만 해도 그 정도였다.
만약 저 정도 규모로 다크 포탈들이 열리게 된다면 이 도시는, 아니 이 국가는 단숨에 초토화돼버리고 말 것이다.
데모닉 게이트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때 나타났던 몬스터들은 어디까지나 악마대공 엘라보르의 개인 사병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곱 군주 중에 한 명, 분노의 군주 루시퍼가 여는 다크 포탈이었다.
데모닉 게이트 때의 마왕군이 대대급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마왕군은 사단급을 가볍게 뛰어넘을 규모인 것이다.
원호는 밑에 있는 S급 헌터들을 살펴봤지만 그들도 움직일 수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태현과 로이드, 그리고 이소연은 브락쿠스라는 마족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채고 움직이려 했지만 주위의 적들이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보낼 것 같냐!!”
결국 원호는 잠시 우선순위를 바꾸고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물론 저 브락쿠스라는 놈을 처치한다고 하더라도 다크 포탈은 루시퍼가 다시 시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저 자를 빠르게 처치하고 다시 루시퍼를 압박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원호는 자신의 이마쯤 되는 위치에 발판용 배리어를 만든 후, 몸을 거꾸로 뒤집어서 가볍게 즈려밟았다.
하지만 원호가 브락쿠스를 뒤쫓아서 쏘아져나가려는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대낫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형형하게 빛을 뿜어내는 예리한 칼날이 그의 목을 노리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앞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자신의 목은 저 대낫에 깔끔하게 잘려나갈 뿐이었다.
결국 원호는 브락쿠스의 뒤를 쫓는 것을 포기한 채로 일단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먼저 시작해놓고서 빠져나가는 건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루시퍼는 마치 비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도 조금은 놀아달라고, 아크.”
“쯧, 굳이 보채지 않더라도 잠깐 있다가 놀아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대화를 하는 그 짧은 사이에, 원호는 손에 자그마한 에테르의 단검을 만들어 브락쿠스의 등을 향해 내던졌다.
그가 던진 에테르의 단검은 백색의 잔상을 남기며 붉은 마족의 뒤를 쫓았지만, 갑자기 그 앞에 나타난 칠흑빛의 장막에 가로막혀 사라지고 말았다.
“하하, 그런 시덥잖은 수작에 당해줄 정도로 내가 등신은 아니잖아?”
“…그런 것 같네.”
방금 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포탈이 열리는 걸 막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몇몇 포탈들은 오픈되어 몬스터들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다른 포탈들도 줄줄이 오픈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원호는 조용히 검에 손을 얹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포탈이 열리는 건 막지 못했지만, 아직도 등을 보이고 있는 저 브락쿠스라는 놈을 죽이는 건 늦지 않았다.
“마왕살해자라고 하더니, 별 것 없잖아?”
“…나의 검은 한 번 휘두르면 반드시 한 번을 베어낼지니.”
루시퍼의 비꼬는 말에도 원호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시킨 채, 영문 모를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은 실망만 계속하는 것 같아.”
곧 에테르로 가득 찬 그의 검이 하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검에 새겨져있는 문양들이 선명하게 들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그 검에 새겨진 문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루시퍼는, 잠시 말을 잊어버렸다.
“신살검이라고…?”
천마대전의 마지막 순간에서 신을 꿰뚫었다고 전해지는 저주받은 성검, 미스틸테인.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등장에 루시퍼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으며, 그 때문에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일도양단(一刀兩斷).”
뒤쪽의 브락쿠스를 향해 검을 뻗어내고 있던 조원호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시동어를 입에 담았다.
그와 동시에 검에 담겨있던 에테르가 길게 뻗어져 나왔고, 주위를 감싸고 있던 칠흑빛의 장막은 에테르의 광선에 맞부딪히자 단숨에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 에테르의 광선은, 장막 너머에 있던 브락쿠스를 단숨에 꿰뚫어냈다.
“키아아악!!”
그의 비명이 들리기도 전에, 조원호는 뒤로 뻗어냈던 검을 그대로 정면까지 휘둘렀다.
그곳에는 활짝 펴놨던 날개를 살짝 웅크리고 있는 루시퍼가 있었다.
“…!!!”
잠시 동안 움츠리고 있었던 탓에 루시퍼는 그의 움직임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크 포그 쉘(Dark Fog Shell)!!”
루시퍼는 그렇게 판단했고, 다급하게 방어마법을 시전해 주위에 둘렀다. 그리고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저 거대한 에테르의 참격이 자신의 방어마법을 종잇장 베어내듯 단숨에 베어냈을 때, 루시퍼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피하기에는 늦었지만,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설령 신에 의해 빚어졌고 마신에게 축복을 받은 자신의 날개라고해도 말이다.
그 상황에서 루시퍼가 몸을 피해낸 것은, 과연 마족들의 일곱 군주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신체능력과 엄청난 반응속도 덕분이었다.
“크아아아악!!”
하지만 다급하게 펼쳐냈던 오른쪽 날개는 조원호의 참격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그대로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리고 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