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하하, 이제야 이야기가 조금 통할 것 같군. 역시 이래서 아랫것들보다는 윗대가리들이랑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까?”
“…그 쪽도 조금은 예의를 지켜줬으면 하는군. 여기서 그 쪽은 어디까지나 불청객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게. 하다못해 문이라도 두드리고 왔더라면 커피 한 잔 정도는 내줄 수 있었네만.”
소년이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로이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 또한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로이드의 말에 소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서는, 다시 다리를 꼬아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 나서는 등 뒤로 돋아난 두 날개를 조심스레 허벅지 위쪽에 올려뒀는데, 인간이 날개를 움직이는 그 기묘한 광경에 회의실 안의 모든 인원들이 아닌 척 하면서도 흘깃흘깃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식.
자신의 날개에 관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내심 만족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곳에 앉아있는 것은 그의 본체가 아니라 분신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날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꽤 높은 모양이로군…….’
방금 전 얀이 그의 날개를 한낱 닭털로 묘사하며 비하했을 때, 원래 목적도 잊고 진심으로 분노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흠… 뭘 먼저 말해야 되지? 대화로 이야기를 시작해본 적은 얼마 되지 않아서… 특히 인간들 상대로는 말이야.”
한동안 팔짱을 낀 채로 침묵을 지키던 소년은, 뒤늦게 자기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되는 입장임을 깨달은 듯 턱을 살짝 짚으면서 말했다.
“우선, 나는 그 쪽이 대체 뭐하는 양반인지가 궁금한 데 말이야.”
평소처럼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지만, 표정은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유선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자기소개라는 건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큰 실례를 범할 뻔했구만.”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는데, 마치 로이드의 목소리를 흉내 내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 장난스러운 태도에 록슬리를 비롯한 몇몇 헌터들의 표정이 찌푸려졌지만, 정작 기분이 나빠야 할 로이드는 소년에게 집중한 채로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을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가.
저 소년이 정말로 루시퍼가 맞는가.
그게 앞으로의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이자 기본이 되는 정보였으니까.
“나는 마계의 마왕들 중 제 6석을 맡고 있는 질투의 군주, 불사의 지배자 루시퍼라고 해. 반가워 지구의 인간들.”
“마계…? 마왕?”
“질투의 군주? 무슨 소리야?”
다짜고짜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명칭들이 튀어나오자 주변 사람들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언짢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소년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 루시퍼 본인이었군.’
그 말에 표정이 굳어진 것은 나와 로이드, 그리고 이태현뿐이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 셋 뿐이리라.
“하하, 반갑다는 말은 진심이니까 오해들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
“반갑다…고? 무슨 의미지?”
이소연이 언짢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방금 전부터 계속해서 에테르를 활성화시켜놓은 상태였고, 눈에는 특유의 푸른 안광이 들어 와있는 상태였다. 경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큭큭, 그야… 숨겨져 있던 명당자리를 발견한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어? 아니면, 맛집이라고 해야 하나?”
“…!!”
“뭐라고…?”
루시퍼의 표정은 마치, 사냥터에서 먹잇감들을 내려다보는 포식자의 시선과도 같았다.
그의 말과 표정에는 명백한 악의가 형형하게 드러나고 있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아, 장난이야 장난. 인간들은 자기들끼리는 장난도 잘 치면서 우리 마족들이 장난치면 꼭 정색을 빨더라? 차별 없이 대해달라고. 지구의 인간들은 싫어하잖아? 차별이란 거.”
루시퍼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얼버무렸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헌터들은 각자의 코어를 활성화시켜 전투준비를 시작했으며, 각각의 에테르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며 방 안에는 기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워워, 무서워라.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그래도 이쪽은 나름 그쪽 방식대로 예의를 지키려고 여기까지 와준 건데?”
그 때, 협회 건물의 상공에서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얼핏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녀석…….’
상대는 몰래 다가오기 위해서인지 감지 차단 마법을 겹겹이 걸어두고 있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생생하게 이쪽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감지망을 최대한으로 펼쳐내 주변 탐색에 집중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상대의 기운이 워낙 엄청난 것이었기에, 그가 감추려고 했더라도 그 기운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저 정도 수준의 상대가 나타난다면… 짐작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
바로 눈앞에 있는 루시퍼의 본체가 나타난 것이리라.
대화를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마족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혹시나 해서 주변 일대에 감지망을 최대한 펼쳐놨던 것이 정답이었다.
[오빠, 혹시 느끼셨나요?]
‘소연이군.’
[지금 우리들 위에 나타난 녀석 말이지?]
[예, 맞아요. 눈앞에 있는 녀석의 본체인 것 같아요.에테르 패턴이 완전히 동일해요.]
소연이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자세하게 알아낸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라웠다.
그녀의 옵저버 능력이 수준급인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나 역시 주변 탐색에 최대한 힘을 기울인 상태였다.
“일단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세계는 마나 유저… 아니, 이 세계는 에스퍼라고 부르지. 에스퍼들을 어떻게 관리하나?”
“…….”
“에이,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이야기 상대 정도는 해달라고. 궁금한 게 천지란 말이야. 응?”
루시퍼는 잡다한 이야기를 시도했고, 그 얼굴에는 정말로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저런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지금 본체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동안 그 시간을 벌기 위한 것도 있으리라.
루시퍼의 정면에 앉아있던 헤인이 잠시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고, 로이드가 살짝 눈을 감자 헤인이 루시퍼의 이야기 상대를 시작했다.
[로이드.]
[그래… 알고 있네. 역시 그대도 느끼고 있던 모양이로군.]
나는 소연이에게 아직 눈치 채지 못했을 사람들에게도 알려두라고 말한 다음, 로이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혹시 이곳에 있는 S급 헌터들 중에 일정 지역을 보호하는 데 특화된 능력자가 있어?]
없다면 무리해서라도 이쪽에서 선공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조금 위험한 도박이 될 터였다.
[있지. 저기 앉아있는 마슈라면… 보호 능력만큼은 자네보다도 뛰어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네.]
[음, 나는 보호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적절한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내 전투 방식은 어디까지나 공격과 내 자신의 호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보호막을 활용한 최소한의 보호 능력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수준에 불과했다.
아스트레아에서 오랜 시간동안 혼자서 전투를 하는 방식이 익숙해져 아예 몸에 배어버린 탓이었다.
물론 미스틸테인의 수호의 축복이라는 절대적인 보호능력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을 보호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애초에 루시퍼 정도나 되는 상대와 전투를 벌이는 데 미스틸테인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건 오만조차도 뛰어넘은 단순한 자살행위였다.
[흠, 그렇다면 나보다도 뛰어나다고 해두지. 저 소녀는, 나이가 어려서 순위가 낮을 뿐 나보다도 강력하니 말일세.]
[뭐?]
나는 놀란 나머지 고개를 돌려 로이드 쪽을 바라봤고, 로이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잠시 후 상황이 벌어지면 일행들의 보호를 부탁한다고 전해줘. 내가 말하는 것보단 네가 말하는 게 더 좋겠지.]
[알겠네.]
로이드의 지휘관으로써의 안목은 나를 월등히 능가했다. 갓 신설된 최하위 기사단을 제국 최고의 기사단으로 성장시켰던 것은 행운이나 요행 따위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싸움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 왜소한 소녀에 대한 그의 믿기 힘든 평가를, 우선은 믿어보기로 했다.
“이봐, 루시퍼.”
“쯧, 무슨 일이야? 아크.”
그 때까지도 헤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시퍼는, 이야기를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한참 재밌어지던 참이었다고? 내 말을 잘라가면서까지 꺼내야할 정도로―”
그 순간, 루시퍼의 분신의 바로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빙하의 창이 솟구쳐 올라와 건물의 천장을 깨부쉈다.
그 중심에 태평하게 앉아있던 루시퍼의 분신은 빙하의 창에 꿰뚫린 채로 천장에 내리꽂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글레시얼 팽(Glacier Fang).
중간에 전음으로 이야기를 맞춰뒀던 유선의 마법이었다.
“가라. 조원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배틀 스태프를 꼬나 쥔 채로 완전한 전투태세를 마친 유선이 말했다.
그녀의 배틀 스태프는 보관소에 맡겨져 있었지만, 상황이 시작되자마자 크리스가 잽싸게 무기소에 다녀와 각자의 무기를 분배한 것이다.
이미 소연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다른 헌터들 또한 즉각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하!! 마족의 뒤통수를 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전개인 걸?]
어느새 가까운 상공까지 내려온 루시퍼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법으로 강화되어, 마치 데스나이트들의 목소리처럼 머릿속으로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시원하게 뚫린 천장 너머로 그가 회색빛 날개를 활짝 편 채로 하늘에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 답례를 해야겠지.]
루시퍼가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곳에서는 기분나쁘게 일렁거리는 검은 불꽃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비스 플레임(Abyss Flame).
마계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심연의 불꽃.
그 검은 불꽃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타오르는 빛마저도 집어삼키기 때문에, 불을 뒤집어쓴 대상은 마치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암흑계열 마법 중 최상급에 속하는 마법들 중의 하나로, 대부분의 마왕들이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이자 상징과도 같은 마법이었다.
그녀가 과연 이걸 막아낼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내 옆에 선 마슈라는 소녀를 바라보며,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미스틸테인을 꺼내들고 에테르를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로이드의 말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이걸 막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여길 떠났을 때 남는 건 끔찍한 학살뿐일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크리스의 포탈을 활용한 도주를 먼저 생각해둬야 할 것이다.
“흠흠.”
하지만 정작 소녀의 모습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는데, 그 손에는 자그마한 보석이 박힌 7개의 반지들이 각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그 직후 앞으로 뻗었던 두 손을 조금 격한 동작으로 교차시키자, 그녀의 주위로 푸른빛을 발하는 7개의 에테르 구가 생겨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로이드의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심연에 물들거라!!”
시전을 마친 루시퍼는 손을 내뻗으며 기세 좋게 외쳤고, 그의 손에 일렁거리던 검은 화염은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나와 거센 불길이 되었다.
“막아! 아이기스!!!”
그에 질세라 마슈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7개의 에테르 구들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넓은 평면의 모양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하윽?!”
“크윽…!!”
검은 어둠과 푸른빛의 장막들이 서로 맞부딪힌 곳에서부터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 검은 화염이 장막을 깨부수고 이 위로 쏟아져 내릴 듯한, 그런 격렬한 소리였다.
몇몇은 그 소리를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았고, 로이드와 유선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만약의 사태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름끼치는 소리는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린 채로 거세게 타오르던 검은 어둠은 힘을 잃고 사라졌다.
“진짜냐…?”
그 광경을 생생하게 지켜본 나는, 저절로 어이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루시퍼의 심연의 불꽃은 푸른빛의 장막을 뚫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