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76화 (76/135)

76화

“뭐야, 이번에도 또 한국에서 나온 거야?”

회의실 안에서 술렁거리고 있는 이야기를 대놓고 입에 담은 것은 얀이었다.

“한국에는 무슨 꿀단지, 아니 에테르 단지라도 묻혀있는 거냐? S급 헌터가 무슨 이렇게 줄줄이 나와?”

“나는 호주 출신이네만.”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얀이 말하자, 레이크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레이크 형씨를 뺀다고 해도 다섯 명이잖아.”

“전에도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로군.”

“뭐, 나나 유선은 원래 협회소속이고, 한국에 소속되어 있는 건 일시적일 뿐이니까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지 않겠어?”

“애초에 누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지가 뭐가 중요한가. 강한 동료가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믿음직한 것이고, 믿음직한 동료가 늘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일 터.”

얀과 다른 사람들이 불만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이태현과 록슬리가 말했다.

“록슬리 말이 맞지. 사람 일손 하나도 부족한 마당에 무슨 소속국가를 따지고 앉았어?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얀?”

“으윽, 유선 누님…….”

그 뒤를 이어 유선이 얀을 나무라는 듯이 말했고,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낸 얀은 마치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뭐, 록슬리가 말했듯 새로운 헌터가 나타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너무 복잡한 생각들은 하지 말게나. 그냥 가볍게 자기소개 하는 시간일 뿐이었는데 왜 그런 반응들을 보이나.”

“…….”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로이드가 말을 꺼내자, 그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꽤나 존중받는 지도자이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헌터에 관한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지.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어디까지 안 좋은 일들 쪽이니까 말이야.”

로이드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회의장 내의 분위기도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올 것이 왔다’라는 듯한 반응 이었다.

“로이드, 그에 관하여 질문 드릴 일이 있습니다만.”

“뭔가?”

“…케이트에 관한 질문입니다.

진갈색의 머리에 고급스러운 웨이브가 정성스레 들어가있는 여자가 말했다. 펠트라는 이름의 헌터였다.

“아직 안건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 뭐 어차피 그 일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질문하도록 하게.”

로이드가 말하자 펠트가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질문을 시작했다.

“케이트 언니는… 정말로 죽은 건가요? 솔직히 저는 아직 케이트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펠트라는 자는 잠시 감정을 억누르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토드도 그렇고, 케이트 언니도 그렇고. 아직 시신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들었어요. 로이드. 케이트 언니가 죽었다는 건 확실한가요?”

펠트의 질문은 크리스를 제외한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안인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로이드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공통적으로 약간의 기대감들이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S급 헌터가 죽은 적은, 여태동안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조사해본 사람이 말해주는 것이 좋겠지. 크리스가 대답해주게.”

로이드가 크리스 쪽을 바라보고서 말하자, 이번에는 크리스한테로 그 시선들이 옮겨갔다.

“크흠.”

크리스는 이런 수순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펠트의 말대로 토드와 케이트 둘의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못 찾아 낸 것이 아니라, 찾아낼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크리스의 말에 몇몇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선이나 이소연, 록슬리 같은 몇몇 헌터들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토드의 죽음은 주위에 함께 있었던 다른 헌터들이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푸른 불꽃에 휩싸여 산 채로 타들어가더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더군요.”

“…….”

“제가 찾아갔을 때는 뭔가가 맹렬히 타올랐던 까만 흔적만 남아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그 의미를 깨달은 듯했다. 그렇지만 크리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트는 주변에 있던 목격자는 없었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무전을 보냈다고 하는 종탑에서 토드 때와 마찬가지로 뭔가가 타올랐던 까만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케이트의 말을 들으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펠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케이트라는 헌터와 꽤나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다.

“펠트 말대로 혹시나 라는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죠. 그런 개인의 기대심까지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케이트는 죽었습니다.”

크리스의 말은 얼핏 펠트를 배려하려는 것 같으면서도, 가차없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렇구나.”

크리스의 말에, 펠트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네.”

하지만 펠트는 그녀의 말에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다는 듯, 힘이 빠진 것 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이는군…….’

하긴, 헌터들에게 다른 동료 헌터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으며,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물며 적어도 몇 년 동안은 헌터 생활을 해왔을 S급 헌터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단지, 펠트라는 여자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은 S급 헌터가 죽은 일이 여태동안 처음 있었던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제는 우리 S급 헌터들도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네.”

“착각하지 마, 펠트. 우리들이 안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칼 맞으면 조각나 죽고, 밟히면 터져 죽는다. 우리도 똑같아. 단지 여태동안 운이 좋았을 뿐이지.”

펠트가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유선이 무신경한 목소리로 매몰차게 말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같은 S급 헌터들은, S급 헌터 동료들은… 다른 사람들이랑 달리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살아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을 뿐이야.”

“…흥, 약한 소리나 하기는.”

펠트는 다시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에는 유선도 뭐라 나무라지 못하겠는지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언니, 걱정마. 마슈는 죽지 않아.”

그 때 펠트의 옆에 앉아있던 소녀가 말했다.

“그리고 언니도 죽지 않아. 마슈가 지켜줄게.”

뭔가 외견상으로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위치가 뒤바뀐 대사였지만, 왠지 소녀의 말에는 믿음직한 뭔가가 담겨 있었다.

펠트는 마슈라는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꼭 껴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무리 되었다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안타깝게도 아직 할 이야기들은 남아있으니까 말이야.”

로이드는 턱을 가볍게 짚은 상태로 말했다.

“다음 안건은, 최근 몬스터들의 움직임의 변화에 대한 것일세.”

“몬스터들의 움직임이라면…….”

“확실히, 요 근래 갑자기 바뀌기는 했죠.”

로이드의 말에 몇몇이 납득하는 반응을 보였다. 로이드는 그런 반응들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최근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몬스터들의 전체적인 등급과 전투력들도 상승했음을, 좋든 싫든 모두가 조금씩은 느꼈을 거다.

“최근 시애틀 인근 게이트에는, 크림슨 레드급 2마리가 동시에 나타난 적도 있었죠. 큰일이었습니다.”

“아, 그 일 말이지.”

록슬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하자 이태현이 거들었다.

크리스가 이태현을 데리고 미국으로 지원을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때의 일인 모양이었다.

“요코하마에도 데스나이트가 떼거지로 나온 적이 있었지. 내가 막아내기는 했지만 말이야. 한 20기 쯤 됐나.”

그 뒤를 이어 얀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고, 다른 헌터들도 조심스럽게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과거에는 끽해야 전 세계에 2~3번 있을까 말까했던 사건들이, 요 근래에 마구잡이로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카오스 게이트라는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지.”

“카오스 게이트…….”

그 말에, 다른 S급 헌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만 해도 질색이라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혹시 카오스 게이트에 관한 조사결과는 새로 나온 게 있습니까?”

헤인이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로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다른 진척은 없네. 카오스 게이트는 말 그대로 예측 불가능한 현상이야.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1시간 내로 열릴 수도 있고, 어쩔 때는 느긋하게 나타나 3일 후에 열리기도 하지.”

카오스 게이트는 그야말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경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의 게이트는 차원간의 접촉이나 충돌 때문에 자연스럽게 열리는 일종의 자연현상에 가까웠지만, 카오스 게이트는 마족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억지로 공간을 여는 일종의 마법이었다.

그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이태현도 알고 있을 것이고, 로이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카오스 게이트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안 좋은 소식을 이야기하도록 하지. 몇몇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해뒀던 내용이지만 말이야, 몬스터들의 지도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몬스터들의 지도자라면… 저번에 제가 말했었던 그 바리크 같은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그 녀석들은 마족이라는 종족이라는 걸 알아냈네.”

이소연의 질문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리크? 바리크라면, 저번에 한국에 터졌던 데모닉 게이트 사건 때 나타났었다는 그 뿔 달린 녀석을 말하는 건가?”

“맞네. 그 녀석도 마족이지. 대신 녀석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는 꽤나 높은 녀석에 속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녀석들… 그러니까, 마족? 아무튼 그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새로 얻어낸 정보가 있는 모양이죠?”

“최근에 포로로 잡힌 녀석이 하나 있지. 가펫트라는 녀석인데… 마족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마족들의 계급구조, 심지어 자신들의 전반적인 능력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준 친절한 친구지.”

‘으음… 꽤나 연기를 잘하는데?’

나는 이미 마족들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저 앞에 앉아있는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트레아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철저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로이드는 마치 자기도 최근에 알아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족들에게는 몬스터들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네. 그리고 그 지휘 능력은 그 마족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그리고 작위는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네.”

“아, 그럼 데모닉 게이트 사건 때 몬스터들이 모두 방어선 쪽으로만 돌진해온 것도…….”

“그렇지. 그 때도 마족들의 지휘능력이 발현된 것이라네.”

이소연이 벌어진 입을 살짝 가리며 말하자, 로이드가 대답했다.

“말하자면… 몬스터들의 숫자도, 각자의 전투력도 늘어난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지휘관도 등장한 상황이라는 거군요.”

조용히 로이드의 말을 듣고 있던 록슬리가 상황을 정리해서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