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레온하르트…야? 맞아? 진짜야?]
[그렇네만… 그 이름으로 불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지라 좀 어색하니 그냥 로이드라고 불러주게나.]
눈앞에 앉아있는 협회장 로이드는 조금 늙기는 했지만, 내가 느꼈던 대로 레온하르트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태현 저 자식은 대체 왜…….’
나는 로이드의 옆자리이자 유선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이태현을 바라봤다.
‘이래서 그렇게 찾아다녔어도 다른 용사들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던 거구만.’
‘그랬지. 애초에 헌터 연맹에 들어갔던 이유 중 하나가 그것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야.’
데모닉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이태현과 잠시 만났을 때,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용사들을 찾아다녔다는 그의 말을 꽤 인상 깊게 듣고서 ‘로크다운 행동이다’라고 생각했었기에, 아직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저 말에는, 자기 자신도 나 말고 다른 용사를 만난 적은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협회장이, 로이드가 레온하르트라면… 이태현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건가?’
이태현이 나에게 일부러 정보를 숨겼다는 말인가? 아니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잠시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로이드가 해답을 말해줬다.
[그건 그렇고, 다행히 자네는 한 번에 알아보는구만. 혹시 이번에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내심 조마조마했다네.]
[…이번에도?]
[로크 놈, 아니 이태현을 말하는 걸세.]
레온하르트는 몰래 전음을 보내는 와중에도 이태현을 살짝 흘겨보았다. 뭔가 한심한 걸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이태현 저 녀석은 이제 거의 6년 째 보고 있는데도 내 정체를 모르고 있다는 말일세. 쯧… 거, 자네가 봐도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그런가?]
[…당신이? …늙어 보이냐고?]
나는 로이드의 전음을 받고 다시 한 번 정면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봤다.
하얗게 샌 백발과, 세월에 따른 노련함이 물씬 풍겨나오는 분위기를 제외한다면, 그에게서 시간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그의 질문은 단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었다.
[그런 쓸 데 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이태현이 당신을 못 알아본다고?]
[그렇다네. 처음에는 직접 말하기도 뭣해서 내버려 뒀었지만… 나중에는 너무 답답해서 몇 번 눈치를 줘보기도 했다네. 하지만 지금은 과연 언제까지 못 알아차릴 건지 한 번 내버려 둬보기로 했네.]
[…뭐 아저씨 모습이 워낙 많이 바뀌긴 했지만.]
사실 내가 레온하르트라는 걸 알아본 것은 그의 외모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그 체격과 특유의 분위기로 알아본 것뿐이었다.
그에게서는 중압적인 위엄이나 근엄함 같은, 그야말로 기사단장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레온하르트의 외모는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스트레아에서 레온하르트는 항상 갑옷을 입고 다녔고, 쉴 때가 아니라면 투구도 벗지 않는 고지식한 녀석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미지도 약간 달라진 것 같고…….’
로이드는 다른 녀석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레이크나 고은소가 말했던 것처럼 그냥 털털한 동네 할아버지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스틴 제국에는 철혈의 왕녀와 철혈의 기사단장이 있다.’
아스트레아에서는 그렇게까지 불렸던 레온하르트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아니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용사들의 시간축이 뒤틀려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로이드와 만났다. 만약 그 사실을 모른 상태로 로이드를 만났다면 나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게다가 로크 녀석은… 여자에 대한 거는 기가 막히게 기억해도 남자는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했지.’
이태현, 즉 로크는 여자에 대한 관찰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였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도 거의 없었다.
그냥 길을 걸으며 스쳐지나갔던 노점상 아가씨의 헤어핀 색깔은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의뢰까지 맡겼었던 제국 삼황자의 얼굴을 기억 못해 길 한복판에서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태현. 잠깐만 보자.]
[무슨 일이야, 원호?]
[혹시 레온하르트나 애던에 대해 새로 얻은 정보는 없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태현에게 전음으로 질문을 보냈다.
[없어. 이미 늙어 죽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걸까?]
‘…정말이었군.’
멍청한 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고 있는 그를 보자니, 답답하다기보다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진짜네. 진짜 몰라.]
[그렇다고 했잖나.]
회의가 끝나면, 로이드가 레온하르트라는 사실을 이태현에게 말해줘야겠다. 나는 가볍게 다짐했다.
[어쨌거나, 슬슬 회의를 진행해야하니 나중에 따로 대화하도록 하지.]
레온하르트가 이쪽을 흘깃 바라보면서 전음을 보냈다.
나는 전음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마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 회의가 끝나고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아, 회의가 끝나고 나면…]
[음? 설마 약속이라도 있는 겐가?]
[뭐 그런 비슷한.]
회의가 끝나면 소연이가 봐뒀다는 레스토랑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었다. 이태현이 한 턱 쏘는 걸로 말이다.
[호오, 아크. 자네가 그런… 아니, 아니지. 나도 이렇게 변했는데, 자네도 변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나.]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로이드는 잠시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뭔가 흐뭇해하는 모습이었다.
“자자, 그럼 인사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그 직후, 로이드는 두 차례 박수를 쳐서 참가자들을 주목시켰다.
“이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자고. 슬슬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지 않았겠나.”
방금 전까지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털털한 웃음을 보이던 모습과 달리, 박수를 치고 난 후 그의 모습은 사뭇 진지해보였고, 특이의 묵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가 많으니까 말이야.”
* * *
사실 S급 헌터가 소집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꼽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S급 헌터 한 명 한 명은 다른 헌터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력의 차이를 보인다.
요새도시로 안정화를 취하고 있던 시절에도 S급 헌터 한 명의 전략적 가치와 영향력은 어마어마했었다.
게다가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 S급 헌터들이 한 자리에 소집시킨다는 것은, 그들이 담당하고 있던 영역,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이 속해있는 국가들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S급 헌터를 소집시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 중에서 불만을 표하는 헌터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모두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들었던 상태였고, 그 일은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S급 헌터 전원이 소집되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 모여서 여태동안 느긋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었던 모습들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갑자기 S급 헌터 다섯, 아니 여섯 명이 사라진 셈이네.’
원래는 다섯이었지만, 나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이다.
S급 헌터 여섯 명이라니.
새삼스레 한국에 속해있는 S급 헌터의 숫자에 놀랐다.
말도 안 되는 숫자다. 거의 독점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한국은 사실상 기존 헌터 전력의 6할은 잃어버린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뭐, 유선이 알아서 처리해뒀겠지만.’
평소처럼 턱을 괸 채로 로이드를 바라보고 있는 유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게을러 보이지만 필요한 일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의외로 철저한 사람이었다. 관련 일들을 류환에게 위임해뒀다고는 하지만, 필요한 대책들은 이미 충분하게 세워둔 상태이리라.
“우선… 좋은 일이 하나가 있고, 안 좋은 일이 세 개가 있군.”
로이드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묘하게 빨려드는 목소리였다.
“좋은 일부터 전하자면, S급 헌터에 새로 등록된 사람이 있네. 뭐, 누구일지는 이미 모두 짐작 했을 테지만 말이야.”
“그야 모이던 사람만 모이던 곳에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거지.”
로이드의 말에,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 손으로는 창을 꼬나 쥐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얀… 그래, 일본의 S급 헌터로군.’
카마이타치, 카이노 얀.
나는 그의 앞에 놓여있는 명패를 읽고서 그의 이름을 알아냈다
얀은 S급 헌터들 중에서도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헌터로 유명했다.
다만, 그건 그가 그만큼 인상 깊은 활약들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가장 자주 대중 앞에 나선 헌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론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은 물론, 심지어 자기 능력이 바람을 다루는 능력이며, 그 능력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내는 지까지 완전히 공개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묘하게 평가는 좋단 말이지.’
내가 회의실에 들어와 처음 그를 보고 느꼈던 첫 인상처럼, 녀석은 양아치처럼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얀에 대한 이미지는 양아치라기보다는 조금 과격한 악동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가 많았고 헌터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은근히 좋았다.
[이보게, 아크.]
[아, 응? 왜… 아.]
로이드의 전음을 듣고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는 호기심에 가득 찬 순진한 눈빛으로. 누구는 귀찮다는 눈빛으로. 누구는 흥분과 흥미가 반씩 뒤섞여있는 눈빛으로.
[간단하게나마 소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다들 자네 이름도 잘 모를테니 말이야.]
모르기는 무슨. 회의실에 명패가 놓여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확실히 여기서 가만히 앉아있는 건 모양새가 너무 안 좋겠지.’
어쨌거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함께 지낼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동료가 될 사람들한테까지 굳이 미운털을 박아 넣을 만큼 비뚤어진 성격도 아니었다.
“음, 이번에 S급 헌터가 된 조원호입니다. 현재 15위에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서 살짝 고개를 숙여 간단한 목례를 건넸다.
좋아. 이 정도면 예의도 바르고 적절한 인사였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인데요.”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기, 실례되지 않는다면 질문하나 드려도 될까요?”
아뇨.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나는 질문을 던진 남자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앞에는 헤인이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역시 지금 대한민국에 속해계신 건가요?”
‘음…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지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실수했군.’
“아, 실례했습니다. 질문을 하기 전에 제 소개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저는 오스트리아에 속해있는 헌터, 헤인이라고 합니다. S급에서 14위에 있습니다.”
굳이 소개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나는 감사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서 그에게 대답했다.
“일단은 뭐, 반갑습니다. 그리고 대답을 하자면, 예. 전 한국에 속해있습니다.”
내 대답에 회의장 안이 잠시 술렁거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