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포탈을 넘어 그 너머의 광장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부신 햇살과, 정면에 높이 솟아있는 오벨리스크였다.
“저게 협회 본부의 상징이라는 수호석인가…….”
나는 요 근래 세워진 건축물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헌터 협회의 랜드마크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뭐야? 협회 오는 거 처음이라는 것처럼.”
“처음인데?”
크리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 S급 헌터로 뽑힐 때 면접 안 봤어?”
“그런 거 없었는데.”
면접이라고?
그런 귀찮은 게 있었다면 S급 헌터 제안을 내가 받았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협회 본부가 한국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면접을 볼 지 말 지 고민해봤을 마당에, 독일까지 면접 하나 보겠다고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그냥 류환한테 서류 받고, 그 자리에서 동의하고 끝냈었는데?”
내가 S급 헌터가 된 과정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류환이 서류를 내밀고 S급 헌터에 대해 설명을 한참 늘어놨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꽤 괜찮은 이야기라 생각했고, 서류에다 동의의 의미로 사인을 했을 뿐이었다.
“정말이야?”
내 말을 들은 크리스는 유선에게 고개를 돌렸고, 유선은 담배를 문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줬다.
“음… 로이드가 갑자기 무슨 변덕으로 그런 거지?”
“로이드?”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나는 크리스에게 되물었다.
“로이드는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야. 그리고 S급 헌터 3위이기도 하지.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야.”
“대단해?”
물론 헌터 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협회장으로써 이끄는 동시에 S급 헌터라는 힘까지 가졌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문무겸비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크리스의 ‘대단하다’라는 말에 담긴 무게감은 그 정도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뭐랄까… 선견지명이 엄청나다고 해야 되나? 어비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에스퍼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고, 곧바로 협회를 세웠으니까.”
“아, 그 이야기로군…….”
곳곳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튀어나왔을 때, 마치 이를 예견한 것처럼 곧바로 헌터 협회가 설립되고 신속하게 대응을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덕택에 헌터 협회가 이 재앙의 흑막이라는 별 같잖은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협회의 자랑스러운 업적 중 하나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 말고도 조직을 관리하는 운영 능력도 뛰어나고, 위엄도 있어! 게다가 S급 3위답게 전투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지.”
“뭐, 사실은 귀찮은 영감탱이일 뿐이지만.”
다 피우고 남은 꽁초를 저 멀리 튕겨내면서 유선이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튕겨나간 담배꽁초는 한참 떨어져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크리스 너는 로이드에 대한 환상이 너무 심해. 뭐냐? 그 사춘기 소녀같은 감상은.”
“그래도 너도 로이드 덕분에 교수 소리도 들어보고 있는 거잖아?”
“교수 소리는 무슨… 내가 언제 교수하고 싶다고 한 적 있냐? 그냥 영감탱이가 앉혀놨으니 마지못해 앉아있는 거지. 이명도 안 바꿔주는 빌어먹을 영감탱이.”
핀잔이라도 주는 듯한 크리스의 말에 유선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로이드… 그 양반은 좀 대하기 힘들어…….”
“오빠는 또 그 소리에요?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그 때 이태현이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고, 소연이가 대꾸했다.
“아니, 진짜로 가끔 나한테 애매한 시선을 보낼 때가 있다니까? 뭔가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빛이라고 해야 되나, 어이가 없어하는 눈빛이라고 해야 되나… 뭔가 질책이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이라고.”
이태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하, 나는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들이랑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음… 그냥 힘 좋은 동네 할아버지?”
앞쪽에서 걸으며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이크와 고은소가 말했다.
‘각자의 평가가 전부 다르구만.’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의외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무난한 사람이거나,
저 모든 요소가 함께 담겨있는 괴짜이거나.
그래도 확실한 건, 일개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헌터 협회를 지구 방위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 지금 수준까지 키워낸 사라미알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들 중에도 비슷한 양반이 하나 있었지…….’
나는 문득 아스트레아에서 만났었던 같은 용사들 중에 한 명을 떠올렸다.
새벽의 기사단장 레온하르트.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는 작위도, 돈도, 인맥도 없었다.
용사로써의 뛰어난 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부터 시작해, 제국 최고로 꼽히는 기사단의 기사단장까지 올라갔던 양반이었다.
‘아니, 제국 최고로 꼽히는 기사단을 직접 만들어냈다고 해야 되나.’
그의 기사단인 새벽의 기사단은 레온하르트가 카를라 왕녀에게 지원을 받아서 간신히 설립되었던 삼류 기사단에 불과했다.
나중에야 권력을 휘어잡고 철혈의 왕녀라 불리던 카를라이지만, 당시에는 계승권 다툼에는 끼지도 못하는 떨거지 왕족 중의 한 명에 불과했었다.
기사단장은 돈도 인맥도 없는 사람이었고, 후원자조차도 시원찮았다.
금방 생겨나고 금방 사라지는 기사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평가했다.
하지만 나중에 새벽의 기사단은 그야말로 제국에서 으뜸가는 기사단으로 성장했다.
대부분은 이를 철혈 왕녀 카를라의 운영 능력이라고 평가했지만, 그건 그저 레온하르트가 지나치게 과묵한 성격이어서 그랬을 뿐이었고,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그게 레온하르트의 업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양반은 어디서 뭐하고 있을라나.’
아스트레아에 있었을 때에는 내가 기사라는 양반들을 좀 꺼려하기도 했었고, 레온하르트 본인도 워낙 과묵한 성격이었기에 서로 간에 별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심지어 실내가 아니라면 투구도 벗지 않는 양반이었다. 안면까지도 가로막히는 그 답답한 판금제 투구를 말이다.
덕분에 그의 실제 얼굴을 봤던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도… 만나보고는 싶구만.’
로크, 아니 이태현과의 만남도 생각보다 즐거웠으니까.
나는 이 세계에서 이태현과 다시 만났던 때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아마 레온하르트와 재회하게 된다면, 그 때처럼 과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될 것이다.
* * *
그리고, 그 재회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생각보다 작네.’
회의실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그거였다.
헙터 협회라고하면 뭔가 거창하고 웅장할 것 같은 이미지를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수호석을 비롯한 협회 본부의 겉모습은 꽤나 웅장했다.
하지만 건물 내부는 의외로 단순하고 검소한 느낌이었고, 그건 이 회의실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실망감을 갖고 회의실 안을 살피자, 크리스의 말대로 이미 다른 사람들이 와있었다.
대충 봤는데도 건방짐이 흘러나오는 남자가 하나.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는 멋드러지게 수염을 기른 서양 남자가 하나.
약간 앳된 미모를 가진 미청년 느낌의 남자가 하나.
앞에 찻잔을 놓고서 고상한 분위기를 내고… 있기보다는 내고 싶어 하는 듯한 여자가 하나.
이 자리에 대체 왜 앉아있지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순진무구해 보이는 소녀가 하나.
그리고…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상석에 앉아있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 아마 그가 협회장이라는 로이드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일 리는 없었다.
협회 측에 내가 아는 사람은 크리스나 이태현, 그리고 가끔 지원부대 일을 하며 스쳐가듯 만났던 헌터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 중에 저런 백발의 노인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머리가 안 좋다고 하더라도 저런 사람을 보고서 잊어 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나는 분명 그를 어디서 만난 적이 있다고 느꼈다.
내 예감은 자주 빗나가는 편이었지만, 불길한 예감과 이런 사람에 대한 예감은 거의 항상 들어맞았다.
‘…대체 어디서 만난거지?’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지만 피부는 아직 20대처럼 탄탄했으며, 옷을 입고 있음에도 옷 테 너머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그의 몸은 그 자체로 잘 벼려진 무기, 아니 차라리 공성병기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동차에게 교통사고를 당하면, 오히려 용의자로 체포될 것 같은 양반이로군.’
경차 정도는 맨손으로도 찌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양반이었다.
저런 파격적인 인상을 가진 사람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정도 인상이면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게 될 수준이었다.
“…엥?”
그러던 와중,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 그 노인의 인상이 겹쳐보였다.
하지만 너무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와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인상이 얼핏 겹쳐 보인 이후로, 내가 떠올린 사람과 저 노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점차 커져만 갔고, 곧 확신이 되었다.
[…레온하르트?]
아스트레아에서 같은 용사로 활동했었던 남자.
그리고 제국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제국의 가장 뛰어난 기사단의 기사단장까지 올라갔던 남자.
나는 설마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그 쪽도 잘 지냈나? 아크.]
전음은 사람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법이지만, 그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시전자의 음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 전음에 담긴 음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른 차이만 조금 느껴질 뿐, 오랜 기억에 있던 레온하르트의 음성과 완전히 동일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아크라고 불렀다.
아크.
이 세계에서 아크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스트레아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들 뿐이었다.
“오랜만이야, 영감. 아직 쌩쌩하네?”
“흐음, 너도 별 일 없어 보여 다행이구나. 웬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기에 걱정했다만.”
유선이 레온하르트의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고,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와 전음을 나누는 동시에 말이다.
[역시 자네였군. 마족을 때려잡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혹시나 했었는데 말이야.]
나와 함께 들어온 다른 사람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전음을 보내왔다.
어찌 보면 두 가지 대화를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그는 굉장히 능숙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