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3명의 모임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원호. 나머지 사람들도 금방 데려올 테니까.”
“으응… 그래. 빨리 다녀와야 된다.”
말을 마치고서 크리스는 싱긋 미소를 짓고서는 곧장 눈앞에서 홀랑 사라져버렸다.
나를 이 낯선 방 안에 혼자 내버려둔 채로 말이다.
그리고 낯선 방 안에는, 먼저 오신 낯선 분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고, 그 사람들도 갑자기 나타난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한 시선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처음 보는 상대를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살피는 느낌이었다.
당연하게도 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과 어색한 분위기만 흘렀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에서 데려가야 되는 사람들이 좀 많으니까, 모아서 한 번에 포탈로 갈 거야. 상관없지?'
크리스는 나를 여기로 데려오기 전에 그 짧은 한 마디로 설명을 마쳤었다.
크리스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데려가야 되는 사람들의 목록으로 가장 먼저 소연이를 떠올렸고, 다음으로는 유선과 이태현을 떠올렸다.
S급 헌터들이 모이는 회의장에 데려가야 되는 사람들이라면 S급 헌터들밖에 더 있겠는가.
그 세 명은 다 나와 친밀하거나 최소한 안면은 튼 사람들이었기에, 나는 별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그 세 명 말고도 내가 모르는 두 명의 S급 헌터가 더 존재하고 있었고, 하필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3명의 헌터들은 나와 그 두 명이었다.
조금 왜소한 체격의 여자아이 한 명과 남청색의 슈트차림에 중절모까지 쓰고 있는 남자가 한 명.
뻘쭘하게 서있는 나와 다르게 둘은 이 장소가 나름 익숙한 지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외국인이잖아?’
여자는 남자라면 순간 시선을 보내게 될 정도로 귀엽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 앉아서 이쪽을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였다. 심지어 눈동자까지 새파랳다.
“…그 쪽이 이번에 새로 S급에 뽑혔다는 그 헌터인가?”
먼저 인사라도 건네야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앉아있던 남자가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자연스레 말을 건네왔다.
외모와 달리, 마치 모국어처럼 자연스러운 한국말이었다.
…뭐, 하긴 미카엘라도 한국말은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나는 영어를 할 줄 몰랐기에 혹시 몰라 준비하고 있었던 번역 마법을 취소시켰다.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서, 약간의 불쾌감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경계심을 풀어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을 던지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
물론 저 쪽이 나보다 연상자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불쾌감을 느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아… 음, 반말이 기분 나빴다면 이해해주게. 내가 아직 한국말은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요, 레이크. 익숙하지 않기는. 나도 못 알아듣는 사투리까지 알아들으면서.”
“…뭐, 정확히는 한국말 중에서 존댓말을 잘 못하는 거지. 내가 살던 곳과는 존댓말의 개념이 조금 달라서 말이야.”
조용히 옆에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지적하자, 레이크라 불린 남자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어찌됐건, 그 쪽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이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랬다면 사과하도록 하지.”
“아니 뭐… 상관없습니다만.”
레이크라는 남자는 정중하게 이쪽으로 허리까지 반쯤 숙이면서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정중한 사과를 거절할 정도로 매몰차지도 않았고 싸가지 없는 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자네가 그 소문만 가득하고 밝혀진 내용은 없다는 15번째 S급 헌터인거지?”
“네, 맞습니다만.”
“오오!! 역시 그랬군. 자네가 여기에 나타나는 순간 딱 알아차렸지. 혹시나 하면서 여태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는 했지만 말이야.”
레이크는 한 쪽 손으로 턱을 짚은 채, 마치 어려운 수수께끼라도 맞춘 것처럼 털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문득 턱을 짚은 손에 끼고 있는 흰색의 실크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렇고, 그 쪽에 대한 소개를 못들은 것 같은데요.”
원래 초면에 남의 이름을 묻거나 소개를 부탁할 떄는 자신을 먼저 밝히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이었다.
“아, 그렇군. 이거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실례를 범한 셈인가.”
레이크는 내 말에 흠칫하는 반응을 보이더니, 뒤늦게나마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S급 헌터 중에서 7위를 차지하고 있는 레이크라고 하네. 호주 출신의 헌터이고, 한국에 온지는 이제 3년 정도 되었지. 하하, 어떤가? 3년 동안 배운 것 치고는 꽤나 자연스럽지?”
‘호주라면…….’
호주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걸로 취급받는 국가였다.
호주는 게이트가 막 열리기 시작했던 초반부에 대처가 늦는 바람에 수도가 폐허가 되어버렸고, 그 때 이후로 급격히 쇠약해져 이미 4년 전에 사실상 모든 기능을 상실한 국가였다.
지금 그곳은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 벼래별 막장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레이크, 왜 이명은 얘기 안하는 거에요?”
“그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걸. 낯짝이나 간지러워질 테니 말이야.”
“레이크라고 하면… 이미 알고 있어요. S급 헌터들 중에서는 유명한 편이잖아요. 폭탄마 레이크.”
다른 S급 헌터들은 몰라도 레이크 같은 경우는 얼굴이 안 알려져 있을 뿐이었지 꽤 유명하게 알려진 헌터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원래 호주에서 활동하던 그가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는 것은 당시에 가장 큰 이슈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언론들은 그에 대해 한참동안 집중적으로 떠들어댔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고국을 등지고 한국에 와 예민해져 있던 그가 한국 기자들의 무례한 행패들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결국 화가 치솟은 나머지 그는 도시 한복판에서 능력을 발휘해 주변 일대를 폭발시켜 버렸다.
다만, 신기하게도 피해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 엄청난 폭발 속에서도 피해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건 과연 그가 S급 헌터에 어울리는 실력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바였지만, 덕분에 폭탄마라는 그의 이명은 한층 더 유명해졌었다.
“하… 별로 자랑스러운 이명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전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 주변에 고은소, 그대밖에 없다고 내가 누누히 말해왔던 것 같은데.”
레이크는 한숨을 내쉬며 여자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고은소면… 그 쪽도 S급 헌터인 거죠?”
나는 고은소라 불린 여자아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레이크와 고은소.
둘 다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데모닉 게이트 때 작전 회의에서도 들었었고, 이후 유선과 만났을 때도 은연중에 스쳐지나가듯 언급됐었다.
그리고 최근 TV에서도 S급 헌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나오는 이름들이었다.
“저는 S급 10위, 마탄의 사수 고은소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오빠.”
고은소는 공손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첫인상은, 다소곳하고 얌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소연이랑은 정반대의 인상이군.’
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소연이와 눈앞의 고은소라는 소녀를 대조해보며 생각했다.
하긴, 고은소는 말 그대로 ‘여자아이’였다.
외모도, 인상도, 분위기도 전부 말이다.
나이가 많아봤자 중학생이 됐을까 말까해 보이는 정도?
소연이는 약간 아담할 뿐이지 아이 같은 인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좀 성장발육이 덜했을 뿐이라고나 할까. 물론 좀 여기저기가 많이 아담하기는 했지만…
“뭔가 실례가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원호 오빠?”
“힉.”
흠칫.
그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잠시 몸을 떨었다.
그 타이밍이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이었던 탓이기도 했고, 그 목소리에 담긴 기운이 살기에 가까운 탓이기도 했다.
“하, 하하하… 많이 늦었네, 소연아. 오래 기다렸잖아.”
나는 적당히 말을 돌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막 열린 것처럼 보이는 포탈이 열려있었고, 그 앞에는 크리스와 유선, 그리고 이소연이 서있었다.
“그건 유선 언니가 일이 좀 길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포탈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부터 붙이고서 유선이 말했다.
“길어져봤자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될 예정이라고는 해도, 한국에 있던 주력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는 셈이 될 테니까, 그걸 위한 대비는 해야 되지 않겠냐.”
“에이… 언니, 어차피 일은 다 류환 오빠가 하면서 생색은. 결국 마지막에 내린 결론도 그냥 류환 오빠에게 위임하는 거였잖아요.”
“…적임자에게 위임하는 것도 일이잖냐.”
소연이의 말에 더 이상 말을 맞받아칠 자신이 없었는지 유선은 조용히 담배를 물었다.
“근데, 태현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
“…아저씨라니.”
이태현은 포탈이 아니라 방에 있던 문을 열고서 나타나면서 소연이의 말에 서운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신세 지고 있네, 이태현 군.”
“새삼스럽게 신세는 무슨. 이 방은 이제 내 집 같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마십쇼.”
이태현은 툴툴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쨌거나, 다행히 적당한 타이밍에 도착한 것 같네.”
“뭐… 그 쪽이 꼴찌긴 하지만요. 이따 점심 사세요.”
머리를 긁적이며 이태현이 말하자, 크리스가 말했다.
“점심? 이 한밤중에?”
“거기는 이제 막 점심 먹을 때니까요.”
“아, 제가 협회 주변에 새로 생긴 근사한 레스토랑 알아놨어요.”
“…너희 저녁 안 먹었니?”
“좀 일찍 먹어서 괜찮아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이태현에게 소연이가 대답했다.
“쯧… 뭐 그래 밥 한 끼 사는 게 뭐 대수냐.”
“오!! 역시 태현이 아저씨는 통도 크시군요!”
“아니… 그러니까 그 아저씨 소리 좀 그만 하라고!! 27살밖에 안됐는데 뭔 놈의 아저씨야!!”
이태현은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고은소에게 진심을 담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조금 안타까워 보이는 광경이었으며, 동시에 조금 한심해 보이는 광경이기도 했다.
“흠… 포기하면 편하다네, 이태현 군.”
“…그러지 말아줄래요 레이크 아저… 아니 레이크 형?”
이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아저씨 소리를 입에 담다 기겁을 하면서 말을 고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슬슬 이동하죠. 이야기는 가서도 한참동안 나누게 될 테니까.”
크리스는 어느새 워프 포탈을 열어두고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치 핀잔을 주는 듯한 목소리였다.
‘으… 눈부셔.’
포탈 건너편은 이쪽과 다르게 환한 대낮이었다. 포탈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뭐, 그게 맞는 거겠지. 놀자고 모인 건 아니니까.”
말을 마치고서 유선이 가장 먼저 포탈로 들어갔다.
“흠… 그럼, 독일에서 봐요, 여러분.”
그 다음으로 소연이가 들어갔고, 모두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는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시차적응은 어떻게 하는 걸까.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뒤바뀌는 느낌일 텐데.
언젠가 한 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또한 포탈 너머로 발을 내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