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일곱 대죄의 회담
마계, 그곳은 일찍이 신과 대립하던 마신이 창조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세계를 말하며, 마족이란 지성이 없는 몬스터들을 제외한 마계의 종족들 전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마족들은 종족에 따라 그 생김새도, 특성도, 구조도 전부 달랐으며, 사회도 계급이 엄격히 구분되는 계급사회였지만, 모든 마족들에게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마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적인 믿음.
사실 마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은 이젠 시간이 흘러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천계와 마계가 맞붙어 전쟁을 일으켰다는 천마대전은 이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그 전쟁의 마지막에서 천계의 신과 함께 쓰러졌다는 마신에 대한 기억 역시 신화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들에게 마신이란 존재는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이자 신이었다. 그들이 마신에게 갖고 있는 믿음이란, 단순한 종교를 떠난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었다.
‘마신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시는 날, 우리 마족들은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마신에 대한 복종은 마족들의 신앙이었으며, 동시에 이상이자 신념이었다.
그들의 마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마계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신의 신전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마신의 신전은, 마계의 그 어떤 건물보다도 높고, 그 어떤 건물보다도 넓으며, 그 어떤 건물보다도 견고한 건축물이었다.
마신에 대한 복종심과 신앙심을 직접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마족들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쌓아올린 그 신전은, 다른 차원과 세계들을 전부 통틀어 살펴보아도 비견할만한 신전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쯤 되면 사실상 신전이 아니라 요새 수준 아니냐?”
그리고, 그 거대한 신전의 회의장 안에 앉아있는 일곱 마왕들 중 한 명, 질투의 군주 루시퍼가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벌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인간 나부랭이들처럼 마신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이렇게 넓은 신전이 필요해? 그것도 중앙부에 말이야.”
“불경한 소리하지마라, 루시퍼.”
그 때,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루시퍼의 말을 잘랐다. 루시퍼의 옆에 앉아있던 분노의 군주 레비아탄이었다.
그는 여전히 판금 갑옷을 두르고서 회의장에 앉아있었다.
절대로 벗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 그의 판금갑옷에는 서리가 맺혀있었으며, 그가 뿜어내는 냉기에 따라 그 서리의 영역은 점차 갑옷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 레비아탄. 너는 입 좀 다물어줄래? 춥단 말이야.”
레비아탄이 입을 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냉기의 기운을 가리키며 루시퍼가 말했다.
하지만, 명색이 일곱 대죄의 마왕쯤이나 되는 루시퍼가 정말로 그 정도에 추위를 느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정말로 춥다는 듯 어깨를 문지르면서 능청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비아탄은 그의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은 마신님의 신전. 불경한 말은 삼가야한다는 걸, 아무리 멍청한 네놈이라도 알고 있을 테지.”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시비로 들리는가. 사실 그 자체를 말했을 뿐이거늘. 말 하나도 제대로 못 들어먹는 반 푼어치를 군주로 모시는 녀석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아아, 좋아. 밖으로 튀어나와라, 이 개 같은 깡통대가리 새끼야.”
루시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후… 조금 시끄럽네요. 당신은 시끄럽게 떠들지 않으면 말 한마디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건가요?”
“2:1이냐? 좋아, 시발. 년놈으로 둘 다 덤비라고. 아주 그냥 작살을 내줄 테니까. 앙?”
보다 못한 리리스가 추가로 입을 열었고, 루시퍼는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한 기세로 그녀에게 대응했다.
“자자, 진정들 하시죠.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보는 거고, 이제 막 모인 참인데 벌써부터―”
“애초에, 이 회의가 열린 것도 네놈의 부하들 때문이 아니더냐.”
“…뭐라고?”
“네놈의 대공 중 한명인 엘라보르, 그 놈이 행방불명 됐다는 것은 이미 온 마계에 퍼진 사실이다.”
“엘라보르? …엘라보르가 죽었다고?”
“…그대가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로 네놈들의 수하들이 진심으로 불쌍해지려 하고 있다. 만년설원의 메피스토라 불리는 나에게 동정심이라는 감정이 들게 하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구나.”
“아니, 진짜 이 새끼가―”
루시퍼의 마나가 활성화되며,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었다.
레비아탄 역시 반쯤 자세를 일으킨 상태였으며, 그의 마나가 이미 활성화되어 회로에 가득 맴돌고 있는 상태라는 건 이 자리에 앉은 모두가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래 신전의 주변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전투 활동 자체가 금지되어있었으며, 신전 내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마족에게 있어서 금지라는 건 개한테나 던져주는 것이라는 걸 마왕들이 직접 선보이기까지 찰나의 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내리꽂혔고, 그 기운에 몸이 꿰뚫리는 듯한 공포에 모두가 말과 행동을 멈췄다.
“…내가 부탁하나하지.”
상석에 앉아 턱을 괴고서, 여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바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고귀함을 느낌과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절대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대들이 개처럼 치고받는 건 상관없네. 하지만, 이제 좀 회의를 시작하고 싶군. 혹시 도와줄 수 있겠나?”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 목소리는 상당히 가벼운 편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기운과 살기는 한없이 어두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 그럼… 물론이지, 바알.”
“…사과 하도록 하지.”
레비아탄과 루시퍼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고,
바알이 직접 나선 이 상황에서 다시 입을 나불거릴 만큼 용기 있는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좋군.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바알은 그 때까지 뿜어내고 있던 자신의 기운을 그제야 거두고,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회의장 안에는 일곱 대죄의 마왕들이자, 1석부터 7석까지의 마왕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제 7석. 나태의 군주, 왜곡의 현자 오로바스.
제 6석. 질투의 군주, 불사의 지배자 루시퍼.
제 5석. 폭식의 군주, 광기의 맹견 벨제부브.
제 4석. 분노의 군주, 만년설원의 레비아탄.
제 3석. 색욕의 군주, 심연의 주인 메피스토.
제 2석. 탐욕의 군주, 비탄의 날개 리리스.
그리고, 제 1석. 오만의 군주 절대자 바알.
마신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은 지금, 실질적인 마계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23마왕들 중에서도 상위 존재에 속하는 7명의 군주들이 모두 모여 있는 회의장에서, 바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루시퍼 휘하에 있던 악마대공 엘라보르의 죽음과 바리트 백작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세.”
“…엘라보르가 진짜로 죽었어?”
“그대가 멍청한 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 새삼스럽게 짚어줄 필요는 없네. 루시퍼.”
“…큭.”
레비아탄에게 덤벼들던 모습과 달리, 루시퍼는 자신에 대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공 정도의 마족이 죽은 것도 물론 아쉬운 일이네만… 뭐 사실 그 정도로 내가 굳이 회의를 소집할 이유도 없지. 진짜 본론은 이거일세.”
바알이 손짓을 하자, 구석에 서있던 비서관이 들고 있던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작동한 아티팩트는 공중에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 빛은 점차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있던 리리스는, 그 형상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고 있었다.
올 게 왔구나. 리리스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리트가 죽은 세계다. 바로 지구라는 곳이지. 본래는 리리스의 관할 구역 것으로 알고 있네만…….”
“맞아요. 제가 담당하고 있는 세계죠.”
바알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리리스를 바라보며 묻자, 리리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답했다.
“그대가 저번에 했던 말에 따르면, 지구는 마나도 고갈되어있고 인간들도 별 볼일 없는 세계라고 했었는데… 바리트가 보고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군.”
“…지구는 마나가 있더라하더라도 다른 차원과의 게이트를 통해 흘러들어온 게 고작이에요. 심지어 마나 유저의 숫자도 급격히 떨어지는, 그야말로 황무지 같은 곳이라구요.”
“아니지, 중요한 건 마나가 아니야.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영혼의 숫자일세. 그렇지 않은가?”
바알은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좌우에 앉아있는 다른 마왕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마왕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흥미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네. 질은 확실히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 있는 인간의 숫자는 47억이라고 하니까.”
“47만…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만이 아니다. 억이다. 47억이란 말이다. 루시퍼.”
루시퍼의 멍청한 소리에 바알이 직접 정정해주었다.
“…뭐? 47억이라고?!”
“그렇다. 바리트가 보고한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면 말이지.”
“말도 안 돼, 한 세계에 그만큼의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나?”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 충격적인 수치에, 그 때까지도 얌전히 회의장에 앉아있던 다른 마왕들도 동요를 보였다. 다만, 리리스만은 그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바알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체크했다.
“충격적이지만, 지금까지는 사실로 보인다. 지구에 있었던 바리트의 내통자의 상세한 자료까지 첨부되어 있기 때문이지.”
“믿을 수가 없군. 47억이라면…….”
레비아탄은 말을 하던 도중에 말을 잊었다.
47억이라면, 자신들이 이 기나긴 세월동안 모아온 영혼의 총량과도 맞먹는 수준이다.
“아직 세계에 마나가 없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지. 별 반항 없이 일방적으로 유린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않겠나?”
바알이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내가 갈래!! 바알, 내가 가게 해줘!”
바알의 말에 루시퍼가 손을 들고서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다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눈치 채고서, 그녀는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태도를 바꿨다.
“크흑… 내 소중한 엘라보르를 죽인 녀석들을… 내 손으로 복수하게 해줘!! 제발!! 부탁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에서는 장난 끼가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살짝 윙크를 건네기 까지 했다.
여기에 앉아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저 루시퍼라는 녀석은, 단지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녀석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모든 마족들은 마신의 부활을 위해 다른 세계에 침략하여 학살을 저지른다고 하지만, 사실상 다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녀석은 당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루시퍼라는 녀석은 그 예시의 가장 대표적인 녀석 중 하나였다.
루시퍼가 직접 나서려는 것을 보며, 리리스는 결심을 굳히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지금 당장 마왕군을 편성하여, 지구로 출진하도록 하지요. 제 관할 구역이니, 제가 직접 나서도록 하겠어요.”
“―아니, 자네는 빠지도록 하게.”
바알이 리리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어째서죠. 관할 구역에 대한 간섭은 금지되어있을 텐데요.”
바알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리리스는 굴하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바알의 얼굴에는 무거운 냉소가 드리워졌다. 마치, 배신자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나도 그대의 관할 구역에 대한 간섭은 하고 싶지 않고, 그대를 의심하고 싶지도 않네. 하지만, 굳이 저 세계의 가치를 감춰온 그대의 저의가 궁금해서 말이지.”
“…….”
바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리리스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빛은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눈초리였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어버리겠다는 그런 눈빛.
상대의 몰락과 파멸을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아니라면 뭔가. 자네는 저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기라도 하는 건가? 뭐,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내 존중은 해주겠네만…….”
자신은 이미 빈틈을 보인 상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허점을 노출시켰다가는 끝장이었다. 그 사실을, 리리스는 절절히 알고 있었다.
“…….”
그녀는 더 이상의 반대를 말하지 못하고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구로 침략하는 마왕군은 루시퍼가 지휘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바빠지겠네! 먼저 가볼게~”
회의가 끝나고, 루시퍼는 신나 보이는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리스는 결국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