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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8화 (58/135)

58화

그 갑작스러운 만남에, 엘라보르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지구는 마나도 거의 고갈된 황무지 같은 세계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아크 같은 녀석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냐!!’

하지만 굳어있는 엘라보르와 달리 아크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야, 너 그럼 이제 마왕 된 거야? 승진했네?”

“아니, 마왕은… 아니고. 악마 대공일 뿐이다. 마왕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

“바리트인가 하는 녀석은 네가 마왕이라고 하던데?”

“…죽을 때까지도 멍청한 놈이었나 보군. 그렇게나 일러뒀건만. 신경 쓰지 마라.”

사실 엘라보르는 자기 부하들에게 자신을 마왕이라 부르라는 명령을 내려뒀던 상태였다.

마왕들의 숫자가 상당히 줄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대공이라는 자신의 위치는 사실상 하위급 마왕정도는 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마왕들도 묵인해주고 있는 어느 정도의 기정사실이었다.

바리트가 자신을 마왕이라고 부른 건 당연한 일이다. 엘라보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라보르가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자만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자만심이라는 것은 원래 자신보다 강자 앞에 설 때면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아크는 엘라보르보다 강자였다.

엘라보르는 자신이 아크에게 맞서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차마 아크의 앞에서 자신을 마왕이라고 자처할만한 엄두가 전혀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보지만… 일단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것부터 해결하자고.”

“…?”

“바리트가 저쪽 세계에다가 소환한 마왕군이랑 몬스터들, 전부 다 니네 소속이지?”

“그렇다만.”

“그럼 지금 당장 다 자살시켜줘. 코어라도 터트려서 말이야.”

“…!!”

“해줄 수 있지?”

아크는 친밀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엘라보르는 그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알아서 상상하고 알아서 선택하라는, 일종의 제안이자 선언이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보자보자 하니까!! 다시는 그 입을 열지 못하게 해주마. 엘라보르님,물러서주십시오!!”

그 때 엘라보르의 뒤쪽에 서있던 자작급의 마족이 두손을 모으고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꽤나 충성심이 높고 재능도 보이던 녀석이었기에, 엘라보르가 최근에 데리고 다니던 측근이었다.

“하아, 젊은 놈은 이래서 곤란하단 말이야.”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자작의 머리통은 단숨에 터져나갔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크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죽여도 괜찮은 거야? 측근 같아 보이던데.”

조금 신랄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크가 말했다.

“흥, 어차피 네놈한테 비굴거리는 추태를 보인 시점에서 살려둬서는 안 될 놈이었다.”

엘라보르는 끌어올렸었던 마나를 갈무리하며, 무신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건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처리를 했을 뿐이다.’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대답을 마친 후, 엘라보르는 손가락 끝에 마나를 끌어 모으고서 허공에 룬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시나 명령을 전달할 수 없을 때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지금 허공에 그리고 있는 룬의 내용은 간단했다.

‘코어의 폭주.’

룬은 이윽고 완성되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구에 남아있는 그의 수하들은 잠시 동안 피아식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미쳐서 날뛰다가, 급격한 속도로 마나가 메말라가면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엘라보르는 허무하게 죽어나갈 자신의 군대들이 아쉽기는 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상당히 힘겹게 모았던 군대들이었고, 회수할 수도 있었던 병력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군대는 다시 모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모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은 단 하나였다. 두 번째 목숨 같은 건 없다.

부활의 권능이라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자기와 별로 인연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일단은 자기 목숨부터 건사하는 게 우선이다.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는 군대들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같은 저울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엘라보르는 아크와 싸워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물론 그도 악마대공이라는 위치에 있는 최고위 마족 중 하나였기에, 아크와 싸우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전투가 아니라 어느 정도 공방이 오고가는 나름 봐줄만한 전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자신이 진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진다. 그건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엘라보르는 굳이 바위를 쳐볼 생각이 없었다.

물론 헛고생은 아닐 것이다. 바위에 노른자 정도는 묻힐 것이고, 기적적으로 흠집 정도는 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약속된 파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 발자크를 죽인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다.”

용건을 마치자 아크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엘라보르는 조금 기분이 언짢았지만, 별 수 없이 대답했다.

엘라보르는 아스트레아에서의 아크를 떠올렸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오히려 다른 용사들보다 떨어져보이던 녀석이었다.

용사들 중에서도 요주의 인물이었던 철가면 여기사와 함께 모험을 다니기에 같이 관찰하기는 했지만, 말이 좋아 함께였지 사실상 빌붙어 다니던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동료를 잃고 난 이후에는 도시 구석에 쳐박혀서 폐인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가끔 용병의뢰나 받아서 도시 밖으로 기어 나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때문에 엘라보르는 그를 견제해야할 용사 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그 이후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저렇게 살다가 다른 흔한 용사들처럼,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엘라보르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 엘라보르는 아크라는 그의 이름을 다시는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단신으로 발자크의 마왕성에 쳐들어와 군대를 박살내고 성 안을 헤집어놓고 떠난 인간의 이름을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겟는가.

그리고 다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엘라보르는 아크에게 패해 무릎을 꿇었다.

그 때 그는 아크에게 목숨을 애걸하여 겨우 살아남았고, 지금 당장 아스트레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으며, 마왕을 죽이는 일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겠다는 기아스를 맺고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일은 그에게 가장 굴욕적인 사건인 동시에 가장 공포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악몽의 당사자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있었다.

사실 본심을 말하자면, 엘라보르는 지금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크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럼, 내가 좀 바빠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네.”

아크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했다.

“흠흠,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출구를 열어주도록 하지.”

엘라보르는 밀고 들어오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애써 감추며, 아공간에서 지구로 연결되는 출구를 열었다.

“으음… 이거 말한 게 아니었는데.”

“…? 아, 저번처럼 기아스를 말하는 건가.”

엘라보르는 발자크의 마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기아스를 맺으려는 것인가.

귀찮은 일이었지만, 살기 위해 뭔들 못하겠는가. 그는 긍정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네. 내용에 따라서는 거부해야할 수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받아들이도록 하지.”

“쓰으… 이거 괜히 미안한 느낌이네.”

“무얼, 이미 한 번 맺은 적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것 말고.”

그리고, 다음 순간 아크의 손에서 에테르로 이루어진 칼날이 튀어나와 엘라보르의 코어를 꿰뚫었다.

“크헉…?!”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순진하게 나와 주니까 미안한 느낌이 든다는 거지. 그렇다고 ‘이제부터 널 죽이겠다―’ 같은 소리를 하긴 좀 부끄럽잖아?”

‘어째서…?’

엘라보르는 코어가 깨져나간 상황에서도 충격에 휩싸였다.

아크의 갑작스런 공격 때문이 아니다.

자신은 아크와 전투를 피하고 싶을 뿐이지, 그를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언제든지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기습은 기사도를 울부짖는 멍청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옳은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방어마법을 구축해뒀다. 언제 공격을 받더라도 여유시간은 벌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마법이 단숨에 깨져나갔다.

그가 충격에 빠진 건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허억… 끄으으윽…….”

그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대공이라는 칭호는 어디서 주워서 달은 건 아닌지, 코어가 깨졌음에도 그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살려, 살려다오… 아니, 살려주십―”

그리고 아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을 쳤다.

나름대로의 자비였다.

“마족은 좋아하지 않아. 너처럼 비열한 놈은 더더욱.”

손에 쥐어져있던 에테르 소드를 사라지게하면서, 아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엘라보르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발자크의 마왕성에서 살려둔 것도, 발자크와 싸우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기 위한 어쩔 수없는 조치였을 뿐이었다.

그는 마족을 믿지 않았다.

마족들은 애초에 타인의 영혼을 갈취하기 위해 움직이는 놈들이었고, 녀석들의 말은 언제나 거짓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신뢰라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녀석들이었다.

그가 마족에 대해서 믿는 사실은 오직 딱 하나 뿐이었다.

좋은 마족은, 죽은 마족뿐이라는 것.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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