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어라.”
일도양단을 시전하고 난 후, 손에 쥐고 있던 검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검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그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나뒹굴었다.
“하하, 뭐. 무리하게 써먹었으니 결국 이렇게 되겠지.”
일직선으로 곧게 광선을 뻗어내면서 거대한 빛의 참격을 그어낸 검은, 한계점을 뛰어넘은 에테르의 출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산산이 깨져버렸다.
조각조각으로 깨져 땅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은 점차 가루가 되어 서서히 흩날리듯이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보급용 검이 여기까지 견뎌낸 것도 대단한 거겠지…….’
데모닉 게이트의 바로 앞에서 몬스터 수 백 마리와 전투를 벌이고, 그 사이클롭스의 목덜지마저 베어냈던 검이었지만, 결국은 단순한 보급용 검에 불과했다.
한계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들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묵묵하게 견뎌내 준 잠깐 동안의 전우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 나는 쓰러져있는 바리트에게 걸어갔다.
“크륵, 우으으으윽… 이, 이 빌어먹을!!”
일도양단의 참격에 녀석은 도중에 잽싸게 몸을 피해냈지만, 즉사를 피했을 뿐, 검의 궤적에 걸려있던 어깻죽지와 허벅지가 잘려나가는 치명상을 입었다.
지금 녀석은 팔과 다리를 한 짝 씩 날려먹은 채로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죽인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이젠 무기도 없어진 네놈이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 직접 지켜봐주마!!”
그 와중에도 바리트는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머시기냐… 그 쪽 팔다리 간수하는 거나 신경 쓰시지?”
“하, 너희 하찮은 인간들과 달리, 본체로 돌아온 나는 마나만 있다면 팔다리 한 짝 정도는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다!!”
그의 말대로, 과연 바리트는 가고일 답게 뛰어난 재생력을 보이고 있었다.
잘려나갔던 다리는 허벅지 정도까지 재생되어있었고, 팔은 어느 정도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서 이쪽을 바라봤다.
그 꼬라지가 조금 같잖게 느껴져서, 난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무기가 없어졌으면…….”
나는 에테르를 오른손으로 집중시키고, 밖으로 뿜어냈다.
무작정 뿜어져 나온 에테르들은 사방으로 뻗쳐나가다 조금씩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고, 마침내 검의 형태가 되어 예리한 칼날이 형형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만들면 되지, 안 그러냐? 이 시발 놈아.”
“…이이익, 그런…….”
“네가 재생하는 게 빠를지, 내가 널 회쳐서 조져버리는 게 빠를지 어디 내기 한 번 해보자고.”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멈춰다오!!”
녀석이 뒤늦게 소리를 질렀지만,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이유는 쥐뿔만큼도 없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그냥 웃기는 소리였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서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씨이익.
갑자기 바리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미소를 보니 문득 짜증이 솟구쳐 ‘저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계속 와 보거라. 저 계집년의 목숨이 날아가도 상관없다면 말이지.”
“…?”
혹시나 싶은 마음에 미카엘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대략 이십 여개는 되어 보이는 다크 스피어들이 하늘을 맴돌며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흐흐, 후흐하하하하하!!”
내가 뒤로 돌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바리트는 또다시 제멋대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절대계약을 뚫고서 여기까지 쫓아왔을 정도로 네놈에게 저 계집은 소중한 존재일터!! 자아, 인간이여. 저 년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 당장 스스로 너의 목을 베어라!!”
‘…이 새끼 조울증이라도 있나? 태세전환은 또 왜 이렇게 빨라?’
나는 그 같지도 않은 소리에, 잠시 말을 잊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내가 아는 마족 놈들은 좆같기는 했어도 빡대가리들은 아니었는데.”
“무…뭐라고?”
“넌 백작급인데 왜 이렇게 대가리가 안돌아가는 거냐? 태생이 가고일이라 어쩔 수 없는 거냐? 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만만해보이나?”
“지금 이 상황이 보이지 않는 거냐? 내 손짓 한 번이면 저 년의 목숨이 날아간다! 저 년을 살리고 싶다면 닥치고 네 목이나 그으란 말이다!!”
“대가리가 달렸으면 생각 좀 해봐라. 여긴 절대계약의 공간이잖아? 막말로 네가 죽거나 네가 죽거나 미카엘라가 죽지 않으면 누구도 밖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미카엘라를 살려준다는 네 말을 내가 믿을 리가 있겠냐?”
급한 상황에서 일단 저질러본 것인지, 아니면 나를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할 병신으로 여긴 것인지. 어느 쪽이건 간에 녀석이 한심한 녀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크으윽, 오지마라!! 이대로 저 년을 죽여 버리겠다!!”
궁지에 몰린 녀석은 다급하게 다크 스피어 하나를 미카엘라에게 내리 꽂았다.
그녀의 바로 옆을 노린, 일종의 위협사격이자 위력시위였다.
하지만 밑으로 내리 꽂히던 다크 스피어는 갑자기 나타난 보호막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보호막은 바닥에 꽂힌 미스틸테인을 중심으로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설마 내가 네놈같이 비열한 마족을 상대하면서 아무런 대책도 안 세워 뒀을까봐? 내가 뭐 검 들고 다니기 무거워가지고 저기다가 박아놓고 온 줄 알았냐?”
“이, 이런 젠장할!! 지껄이지 마라, 인간!!”
바리트는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고, 그의 손짓에 공중에 머물러있던 다른 다크 스피어들 역시 차례대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미스틸테인의 보호결계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너 되게 한심해보여서 충고해주는 건데… 저거 깨트리는 것보다는 나를 죽이는 게 차라리 더 쉽고 빠를 거다. 뭐, 죽일 수 있다면 말이지.”
“크앗!!”
녀석은 충고에 대한 대답 대신 급하게 만들어낸 다크 스피어를 쏘아냈다.
느긋하게 걸어오는 내가 무방비해 보여서 빈틈을 노린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내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걸지도.
어쨌든 간에 나는 검을 들어 그 먹히지도 않을 시도를 가볍게 쳐냈고, 나의 걸음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기… 기다려, 나를 죽이면, 내가 섬기는 분께서 직접 나타나실 거다.”
“섬기는 분? 직접 온다고?”
나는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잘 됐네.”
“뭐…라고?”
“잘 됐다고, 이 새끼야.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잘 됐어. 자기 부하 하나 간수 못하는 반쪽짜리 마왕새끼 얼굴이나 좀 봐보자.”
“마, 마왕님이시라고? 너, 너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건 내 문제고, 네가 걱정해줄 문제는 아니지.”
“…….”
녀석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은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조아렸다.
‘…영 안 어울리는 구만.’
트롤과도 비슷할만한 몹집을 가진 육중한 가고일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광경은,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별로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었다.
자신이 보일 수 있는 모든 패를 보였음에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은, 그 순간 엄청난 속도로 태세를 전환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대인께서는 절대계약의 결계에 따로 들어오셨으니, 따로 나가시는 방법도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를 죽이지 않으셔도…….”
“누가 대인이야. 마족한테 대인이라고 불릴 만큼 더러운 짓을 하고 산 기억은 없는데.”
“선생님!!”
“누가 네 선생이야. 차라리 아까처럼 인간이라고 불러라, 짜증나니까.”
“이, 인간님, 저는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나가시는 동안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선처를…….”
“그래, 인간님이 차라리 듣기 편하네. 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 즉시 녀석의 목을 쳐냈다.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모습과 달리, 죽는 순간에 녀석은 제대로 된 비명하나 내지르지 못했다.
“마족이랑 한가롭게 얘기나 나누고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기억도 없어서 말이지.”
앞으로 고꾸라진 녀석의 몸통을 밟고 올라서서, 머리통이 다시 재생되기 전에 코어가 있는 부분에 에테르 소드를 쑤셔 박아 넣었다.
밟고 있는 발 너머로 바리트의 몸통이 꿈틀거리듯 움찔거리는 것이 간혹 느껴졌지만, 코어를 파괴당한 녀석은 곧 돌덩어리가 되어 바스라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은 가고일에게서 나타나는 특유의 현상이었다.
잠시 후,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투명한 막이 원래대로의 황금빛으로 돌아오더니 점차 그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결계가 해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압축되어있었던 결계 내 공간이 다시 재설정되며,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미카엘라에게 다가가, 박혀있던 미스틸테인을 다시 뽑아들고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 순간 결계는 번쩍하는 빛을 뿜어내더니, 결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들은 원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이제 마무리 작업인가.’
나는 차원석을 꺼내들고,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간이동을 찾기 위해 감지망을 펼쳤다.
차원석에는 공간마법에 대해 무지한 사람도 다른 공간이나 차원에 대한 감지 및 간섭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있다.’
찾았다.
지금 마계에서 이 세계로 오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궁지에 몰린 바리트가 한 말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던 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 녀석은 지금 마계를 떠나 중간지점으로 아공간을 열어둔 상태였고, 이제 그 아공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마왕이 나타면 또 개판이 될 테니까. 그리고… 시킬 것도 있고.’
나는 차원석으로 차원의 틈을 찢어, 그 아공간으로 연결되는 입구를 만들어냈다.
‘으음…….’
그리고 나는 안아들고 있는 미카엘라를 여기에 두고 가야할 지, 아니면 그대로 안고 가야할 지를 고민하다가,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마족들 앞에서 그녀를 노출시키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았다. 나를 증오하는 마족이야 얼마든지 있었고, 그들이 그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난 미카엘라를 적당한 위치에 살며시 내려두고서, 그 옆에 미스틸테인을 박아뒀다.
몇 번 두드려봄으로써 수호의 축복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나는 홀로 차원의 틈으로 들어갔다.
* * *
“하, 이건 또 신기한 일이로구나.”
악마대공 엘라보르는 태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잔뜩 분노해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아공간에 다른 녀석이 무단으로 침입하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왕급 마족이라도 찾아오는 것인 줄 알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타인의 아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었고, 악마대공인 자신에게 이런 짓을 서슴치 않고 행할만한 녀석은 마왕급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확인해본 결과 이 침입은 자신이 지금 가려고 하는 세계에서 들어오는 중이었다. 마왕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없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엘라보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안 그래도 자신의 수하에 있던 상급 마족 하나가 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서 죽어버린 탓에, 엘라보르는 잔뜩 짜증이 나있던 상태였다.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여줄까.
건방진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할지 엘라보르가 고민하던 중, 차원의 틈이 열리고 그 인간이 도착했다.
“잘도 해줬구나, 인간. 목숨이 두어 개는 되는, 모양…?”
“뭐야, 너 엘라보르 아니야?”
“…아크, 네가 대체 왜.”
그 인간은 구면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