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원호, 부탁이야. 너 하나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지나치게 무책임한 짓일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지, 끝까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후방에 나서면… 모두의 앞에서 싸우는 꼴이 된다.’
허접한 잔챙이 마족이 아니라 작위가 있는 상급 마족이었다.
그것도 백작급의 마족.
백작급의 마족이라면 한 개 마왕군 내에서 간부급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긴 상태로 처리한다든가, 눈 깜박할 사이에 죽여버린다든가 하는 수작이 통할 리가 없었다.
바리트라는 마족과의 전투는 꽤나 격렬한 전투가 되리라.
그리고 그 전투는, 쓰러져있던 수많은 헌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진행되겠지.
그건 곤란했다.
내가 이 싸움에 임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내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였을 뿐이니까.
앞으로 살아갈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망해버리는 건 조금 곤란한 일이었으니까 참가했을 뿐이었다.
어줍잖은 영웅흉내를 다시 내보려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위선에 불과한 어설픈 영웅흉내는 그만두겠다고, 그 때 다짐했었으니까.
하지만…
“원호, 시간이 없어…….”
“…….”
크리스가 다시 한 번 말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조원호.”
그 때, 유선이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조금 차가운 인상을 주는 그녀 특유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상반신만 겨우 일으킨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이다. 우리들을, 서울을…….”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표정이 점차 구겨졌다.
밀려드는 고통에 힘겹게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지켜다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갑작스레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코어에 심어져있던 유선의 에테르가 점차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대방이 기아스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렸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2항. 술자는 기간 동안 피술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다만 이 권리는 헌터학과의 교수와 학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지시라고 판단될 경우로만 한하며, 이를 벗어날 경우에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판단의 기준은 술자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3항. 술자는 피술자가 상급 에스퍼라는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만약 술자의 지시가 해당 비밀을 노출시킬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고 피술자가 판단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판단의 기준은 피술자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내용의 명령을 내릴 권리가 없었다.
나의 무의식은 그녀의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그녀는 지금 그 부작용으로 에테르― 회로가 조금씩 뒤틀리는, 굉장히 낯설면서도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지시가 기아스에 어긋나는 것임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계약에 어긋난 명령을 내릴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안 그렇듯 보이지만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명령이다, 조원, 크윽…….”
그녀는 코어를 감싸 쥐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고통은, 나도 잘 알고 있는 고통이었다.
“지금, 당장… 후방으로―”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또다시 계약을 위반할 경우, 기아스는 완전히 깨져버린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온전히 그녀에게 넘어간다.
자칫하면 다시는 에테르를 사용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인가.
―아니,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단 말인가.
“하,”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헛웃음을 내뱉어 유선의 말을 도중에 잘라냈다.
“기아스는 여기까지입니다, 유선 교수님.”
나는 허공에 계약의 룬을 맺었다.
기아스를 해제하는, 계약 파기의 룬이었다.
<4항. 술자와 피술자 모두 중도에 기아스를 파기할 수 있으나, 이는 상대방도 납득, 인정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되며, 이를 악용하려는 의도가 있을 경우 파기가 불가하다. 판단의 기준은 쌍방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기아스는 명시되어있던 파기 조건을 이미 만족한 상태였기에,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사라졌다.
내 코어에 머무르고 있던 유선의 에테르가 증발하듯이 사라졌고,
유선의 표정에서는 고통의 흔적이 조금 가라앉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당혹감이 떠올라있었다.
“계약 조건도 제대로 못 지키는 이딴 기아스, 더 이상 달고 다닐 가치를 못 느끼겠네요.”
“…….”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얼굴에 힘을 주고 있는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표정이었다. 스노우화이트라는 그녀의 이명이 의외로 어울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단한 기아스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한심한 양반은, 여기서 쉬고 계시길.”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나는 후방 쪽을 바라보며 에테르를 활성화시켰다.
이제 슬슬 닫히기 시작하는 후방의 다크 포탈들이 작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아크, 면목이 없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시 한 번 안티 디택팅 마법을 꼼꼼하게 두르고 있을 때, 이태현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전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옥상 밖의 하늘로 도약했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하늘로 도약한 나는, 공중에 배리어를 형성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내가 출발한 빌딩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내 눈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악마를 보고 멈춰 섰다.
* * *
“오랜만이에요, 아크.”
원호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여악마를 보고서 당황스러움을 느꼈지만, 그의 감정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리리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요염한 복장의 여악마를 마주하며, 그는 즉시 아공간을 열고서 곧바로 미스틸테인을 꺼내들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마족들을 지배하는 마왕들 중에서도 상위 존재에 속하는 일곱 대죄의 마왕들 중에 한 명, 리리스였다.
원호는 그제야 이 주변 공간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변의 풍경은 같았지만, 이곳은 원래 있던 세계와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그 증거 중의 하나로, 자신의 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허공에 떠있었다.
아공간 결계.
최근 뜸했던 아공간 결계로의 소환이 하필 지금 벌어졌음을 원호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눈앞에 서있는 것이 바로 그 오랜 장난질의 장본인이었다.
“언제나처럼 네 장난에 놀아줄 생각도, 시간도 없어. 빨리 꺼져.”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네요. 오늘은 분실물을 가져다주러 온 것뿐이니까.”
원호는 리리스에게 검을 겨누며 분노를 감추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스는 그의 말에, 조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릴 생각하지마.”
“하긴, 의심할 줄 알았어요. 이럴 땐 실물을 보여주는 게 최고죠.”
리리스는 허공에 아공간을 열어 손을 집어넣더니 그곳에서 투박한 모양의 보석 하나를 꺼내 그에게 가볍게 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보석을 공중에 멈춰 세운 다음, 원호는 보석을 회전시키며 그게 무엇인지 천천히 살펴봤다.
적이 던져주는 뭔가를 넙죽 받아들일 만큼 원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원호는 그 투박한 보석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건… 차원석이잖아.”
“맞아요.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에 있던 걸 제가 주워뒀었죠. 흘리고 다닐 만큼 흔한 물건을 아닐 텐데요?”
원호는 다시 한 번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지는 않는지 차원석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떤 수상한 부분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고맙다는 말을 해두지.”
원호가 차원석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또다시 약해졌군요. 아크.”
잠시 동안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리리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꺼낸 리리스의 표정이 약간 서글프게 보였다.
그리고 원호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깨져나간 기아스의 부작용은 계속해서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고, 어거지로 이어붙인 회로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힘은 약해졌다.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마왕 살해자 아크가 아니었다.
“그래도 네년 얼굴에 흉터 정도는 새겨줄 수 있겠지.”
하지만 원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반응에 리리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직도 멍청하게 살고 있고 말이죠.”
“…….”
그 말에 원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건가요? 당신의 수명이 대체 얼마나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3년? 4년?”
리리스는 감정이 격해진 듯, 점차 어조를 높여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주제에, 그딴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건가요? 그거로도 모자라서 지금은 남을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건가요?”
“…닥쳐, 리리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아크, 저와 함께 마계로 가요.”
리리스는 닥치라는 그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미 과거에 한 번 거절당했었던, 그 제안을.
“닥치라고 했을 텐데, 리리스.”
그러나 원호는, 한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 손을 내쳤다.
“나는 너희 마왕을 절대로 믿지 않아. 하물며, 허구언 날 사람 납치해가는 게 취미인 너 같은 년은 더더욱 말이야.”
원호는 차원석을 발동시켜, 밖으로 통하는 틈새를 열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서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리리스는 홀로 아공간에 남아, 그가 찢고 나간 틈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가슴이 아팠다. 리리스는 그 사실이 새삼 놀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녀는 그에게 내쳐졌던 손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왜 이토록 저 자에게 집착하게 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마족답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뒤늦게 죗값을 치루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 인간의 운명을 자기 멋대로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에 대한 죗값을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