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2화 (52/135)

52화

“하아, 하아…….”

심판의 결계 안에서, 미카엘라는 검에 몸을 의지하고서 일어섰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이지만 몸이 편해졌다.

심판의 결계는, 결계 내에 있는 시전자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레지스터 가문의 비전, 심판의 결계.

압축시킨 공간에 시전자와 함께 주변 일대의 적들을 함께 가둬, 시전자가 죽거나 시전자만 살아남을 때까지 내부와 외부를 단절시키는 절대 계약의 결계.

밖에서 보이는 결계의 크기는 작지만, 내부의 공간은 적들을 가두는 범위보다도 넓으며, 필연적으로 수적 열세에 놓일 시전자에 대한 강화의 효과가 부여되는 마법이었다.

심판의 결계는 언제나 약자들의 앞에서 적들에 맞서고, 전투에 임했을 때 가장 먼저 적들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레지스터 가문에 가장 어울리는 마법이자 레지스터 가문의 상징이었다.

이 기술을 펼칠 수 없다면 그게 혈족이라 할지라도 정식으로 레지스터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이 기술을 펼칠 수 있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부인이라도 레지스터 가문의 일원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실 미카엘라가 이걸 해낸 것은 처음이었다.

이걸로 비로소, 그녀는 당당하게 레지스터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후계가 없던 레지스터 가문에 입양아로 들어왔을 뿐인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하.”

그녀의 정면에 서있던 바리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결계 안에서 바리트는 설마 싶은 마음으로, 밖으로 나가는 차원의 틈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차원의 틈은 열리지 않았다.

마법을 시전하던 과정에서 방해를 받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저 인간 여자는 별다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뭔가를 했더라도 저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 자가 자신을 방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자신이 갇혀있는 이 결계는 절대계약의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이 안에 갇힌 순간 알아차린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바리트는 믿기지가 않았다.

“하하하하… 이것 참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는군. 원래 지구는 이런 동네인가?”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잠깐, 이건 S-04, 마슈의 심판의 결계인가? 설마, 그럼 레지스터 가문의?”

“흥미롭구나. 처음에는 40억이나 되는 인구가 존재한다고 하기에 와봤을 뿐이었지만…….”

바리트와 요엘은 여유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바짝 긴장한 상태로 검을 겨누고 있는 미카엘라와는 심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절대로 해칠 수 없다는 확신이라도 가진 것처럼, 마치 품평회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저런 애송이가 절대 계약의 결계를 펼쳐 내다니… 아무래도 에스퍼라는 존재들은 조금 특이한 모양이야. 이 세계의 인간들이 특이한 것인지, 에테르라고 불리는 이 세계의 마나들이 특이한 것인지. 하하하, 정말 흥미로워.”

“…….”

그들은 그녀의 눈앞에서 대놓고 빈틈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라는 빈틈을 앞에 두고서 긴장을 풀지 못한 상태로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카엘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판의 결계의 범위는 후방라인을 넘어 전방라인의 일부까지 닿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 수많은 몬스터들은 지금 자신과 일정 간격을 벌린 상태로, 동그랗게 둘러싸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건 이쪽을 경계하기 위해 간격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저 남자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 않을 뿐임을 미카엘라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언제든지 자신을 짓밟을 수 있었다.

아무리 미카엘라라고 하더라도, 군대라고도 부를 수 있을 저 정도 물량이 전 방위에서 덮쳐오는 걸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판의 결계의 강화 보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긴장할 필요는 없지.’

그녀는 굳어있던 몸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딱딱하던 그녀의 자세가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약간의 여유가 생겨났다.

이곳은 내부와 외부가 단절된 절대계약의 공간.

그녀가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죽던가. 전부 죽이던가.

자신이 시전한 이 결계 안에서 살아남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결계 안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전부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저기에 서있는 뿔 달린 수상한 남자, 바리트도 포함되어있었다

자신은 저 바리트라는 남자에게 이길 수 없었다.

그건 볼썽사나운 투정도, 용기 없는 자의 못 봐줄 것 같은 포기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사실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진다.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미카엘라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심판의 결계를 펼쳐낸 순간,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미카엘라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자신의 죽음은 이미 확정되었고, 그 죽음은 충분히 명예로운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은 이곳에서 살아남으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될 뿐이었다.

“흐음, 꽤나 진귀한 걸 구경했으니, 단번에 죽여 버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겠지.”

“취이이익, 취이익!!”

바리트가 신호를 보내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 중에서 오크 몇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온 오크들은 대열을 갖추고 그녀의 앞에 섰다. 괴물이라기보다는 마치 훈련받은 군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도망간 년을 뒤쫓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른 여흥거리를 찾도록 하지.”

다시금 검을 고쳐쥐고 자세를 취하는 미카엘라를 바라보며, 바리트는 미소를 지었다.

“자아, 발버둥 쳐보거라, 고고한 여기사여. 내 그대를 배려하여 천천히 죽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다. 뭐, 명예롭게 자살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말리지는 않겠네만.”

하하하하. 바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 * *

“정신 차려요, 갑자기 뭐에요? 넌 또 왜이래? 야, 이태현!!”

나는 빌딩 위 옥상에 둘을 눕힌 채, 다시 한 번 불가시의 마법과 안티 디텍팅을 펼쳐냈다.

자신 없는 분야의 마법들이었지만, 다행히 몬스터들에게는 잘 통했는지 우리가 있는 빌딩을 그냥 지나쳐가고 있었다.

둘은 싸우고 있던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힘겹게 사이클롭스를 쓰러트리고 난 후, 차원 에너지를 거의 쥐어 짜내듯 사용하던 게이트는 서서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점차 상황이 정리되어가고 있던 와중, 한참 신나게 싸우고 있던 이태현과 유선의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몬스터무리 한가운데에서 잠시 멈췄던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이태현은 몸을 피했는지 바깥쪽 복부에 관통상을 당했을 뿐이었지만, 유선은 데스나이트의 검에 등을 베여 서서히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에테르를 방출하여 급하게나마 주변의 상황을 정리한 다음, 쓰러진 둘을 들쳐 매고서 구석진 곳의 빌딩 옥상에 올라왔다.

“…리제네레이션(Regeneration), 큐어(Cure)”

나는 둘에게 재생마법과 정화마법을 걸었다.

데스나이트의 저주는 잘 지워지지 않는 중급 이상의 저주였지만, 다행히 유선의 저항력이 꽤 높은지 순조롭게 정화되었다.

“으윽… 원호.”

“…이태현. 꼴사납게 이게 무슨 꼴이냐…….”

전쟁마저 좌지우지한다는 울프 용병단의 블러드 울프가 처참하게 쓰러진 꼴은 그다지 봐줄만한 꼴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재생마법을 걸어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크리스?”

그 때, 갑자기 허공에서 느껴진 크리스의 기운에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크리스는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허공에 공간의 균열을 뚫고 그곳에서 나타났다.

벌써 후방을 정리하고 돌아온 것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시발…….”

그녀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머리를 밑으로 향한 채로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꽤나 먼 거리였지만,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페더 폴(Feather Fall).”

감량화 마법을 걸어 그녀의 속도를 완화시키고서,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속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무서운 기세로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다들?’

뭔가 심상치 않게 일이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나는 발밑의 배리어를 밟고서 그녀를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약 30m 정도의 높이에서 그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꽤 무겁군.’

본인이 듣는다면 조금 화를 낼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녀를 껴안은 상태로 배리어로 만든 발판을 디디며 옥상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이 움직임으로 이쪽의 낌새를 눈치챈 녀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다시 한 번 안티 디택팅을 강화시키며, 나는 유선의 옆에 크리스를 내려놓았다.

인간을 초월한 에스퍼라는 평가를 받는 S급 헌터 세 명, 그것도 1위 2위를 포함한 세 명이 나란히 쓰러져있는 모습은 꽤나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원호.”

그녀는 흐릿한 의식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상태는 굉장히 불안정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화상을 입은 부분도 있었다. 호흡 또한 불규칙적이었다.

“이건, 회복 마법… 너, 치료계열 에스퍼였니…?”

“뭐, 그렇다고 해두자고…….”

치료 마법이 가능한 에스퍼는 굉장히 보기 드물었다.

때문에 최대한 감추려고 했던 능력이었지만, 지금은 일단 주저 없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한 번 나와의 약속을 지켰던 사람이니까, 이 정도 믿음은 줄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원호, 급한… 쿨럭, 급한 일이 있어.”

“잠깐, 조금 숨이라도 돌리고서 말해. 지금은 쉬어.”

“아냐, 안 돼.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단 말이야…….”

크리스는 나의 어깨를 붙잡고서, 아픈 몸을 굳이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애달프게 들려왔다.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녀의 몸 상태를 본 순간 알아차렸다.

그녀는 기동성에서 있어서만큼은 나보다도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런 그녀가 이정도로 만신창이가 될 상황이라면, 어지간히 심각한 상황이리라 짐작했다.

그럼에도 잠시 여유를 두려했던 것은, 그 상황이 어쨌건 간에 그녀의 상태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블아이가, 아니, 모두가 위험해.”

“…무슨 소리야? 후방이 밀리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었다. 후방에 열린 건 게이트가 아니라 다크포탈이었다.

나는 크리스만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될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녀를 보냈던 거였다.

“요엘, 요엘이… 우리들을 배신했어.”

“…….”

크리스는 억지로 몸을 일으킨 상태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요엘, 인류의 구원자 요엘.

그녀가 말하는 요엘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잠시 의심을 해본 것이다.

“…자세히,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나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크리스에게 물었다.

“후우… 요엘이야. 네트워크 시스템이 망가진 것도, 갑자기 헌터들이 쓰러진 것도, 전부―”

크리스는 간략적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요엘의 배신도, 다른 헌터들이 모두 쓰러졌다는 사실도. 그리고 뿔 달린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도.

‘마족… 그것도 백작급의 상위 마족.’

그 정도 상위 마족이 게이트를 통해서도 아니고 갑자기 후방에서 나타났을 줄이야.

내부에 배신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