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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0화 (50/135)

50화

새로운 절망과 새로운 희망

‘이제야 좀… 정리가 되어가나…….’

이소연은 비틀거리던 몸을 방벽에 잠시 기댄 채로 잠시 허리를 폈다.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이 마비되고, 사전에 조짐도 보이지 않았던 게이트가 갑작스럽게 오픈됐다.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말도 안 되는 사태였지만, 이소연은 어떻게든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이 거지같이 꼬여버린 전장을 홀로 분석하고, 후방은 물론 전방의 인원들까지 홀로 지휘하고 조율해내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 슬슬 에테르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다행히 전장의 상황은 슬슬 안정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숨 좀 돌릴 수 있겠다. 그치?”

“크리스 언니…….”

크리스는 느닷없이 이소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누구라도 깜짝 놀랄, 그야말로 마법 같은 상황이었지만 크리스의 텔레포트로 새삼 놀라기엔 이미 숱하게 겪은 일이었기에 이소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옷은 몬스터들의 피가 잔뜩 튀어있었고, 약간의 악취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원래 크리스는 특유의 전투스타일 덕분에 토벌이 끝나도 어지간해서는 몬스터의 피가 묻지 않았었다.

“언니가 고생해준 덕분이죠.”

이소연은 그녀에 대한 감사를 담아 말했다.

크리스가 최전방에서 후방으로 투입된 후,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데모닉 게이트와 달리 이 주변에 열린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의 등급은 굉장히 낮았다. 노컬러와 그린급 사이 수준의 오크와, 정체는 모르겠지만 허무할 정도로 허약한 해골 무리가 주력이었고, 간혹 가다가 오우거나 트롤 같은 옐로급이 튀어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런 전장에 S급 헌터가 한 명 추가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고, 그녀의 낫이 한 번 사라질 때마다 엉켜있던 전장의 상황이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급하게 열린 만큼 게이트의 출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이 주변에 열린 게이트들에서는 더 이상의 추가소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의 소환이 멈췄다는 걸 확인한 후, 이소연은 전방의 인원 중 A급 헌터 몇몇을 차출하여 대열을 갖춘 채로 후방 쪽으로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일종의 망치와 모루를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방의 인원들이 몬스터들에게 포위되어있던 꼴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안쪽의 몬스터들이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있는 꼴로 바뀌었다.

“이제 슬슬 쉬어. 너 혼자서 전부 감당하고 있는 거잖아. 그러다 쓰러지겠다.”

“…아뇨, 아직이에요.”

이소연은 크리스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후방의 상황이 정리되었기는 하지만, 그게 전투의 끝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직 데모닉 게이트 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량은 여전했기에 전방의 상황은 오히려 더욱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후방에서의 작은 성과에 이소연은 조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아직 휴식을 취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제 시스템만 다시 복구가 된다면…….’

현재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가 된 상태였지만, 요엘이 관리실에 합류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왔으니 조만간 해결이 될 터였다.

이소연도 요엘이라는 인간 자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게이트 관련 업무에 있어서 그의 일처리 하나는 믿을만했다. 어쨌거나 인류의 구원자라는 칭호는 누가 공짜로 달아줬던 게 아니었으니까.

“이야아― 꽤나 오래 버티네??”

“…?”

그러나 그 때 뒤쪽에서 요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지금 관리실에서 시스템을 복구시키고 있어야할 터였다.

혹시 수리가 끝난 것일까.

이소연은 혹시나 싶어 목 언저리의 스위치를 눌러 다시 시스템을 기동시켜봤다.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요엘, 네가 여기 왜 나와 있는 거지?”

“그냥, 바람이라도 좀 쐴까하고. 안에는 옛날 건물이라 그런지 먼지가 많더라.”

이소연은 뒤로 돌아 요엘을 바라봤다.

요엘은 평소처럼 백색의 연구실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만지면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장난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이 장난 칠―”

그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발끈한 이소연은 그에게 한 마디 쏴붙이려고 했다. 했었다.

그러다 이소연은 요엘의 옆에 이상한 남자가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음… 이게 그대가 말한 헌터라는 것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 남자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아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그 복장은 서양 중세시대 말기의 귀족들을 떠오르게 하는, 마치 할로윈 파티장에서 방금 막 나온 듯한 복장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이마에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뿔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위험하다.

저 남자는, 아니 저 생물은 위험하다.

이소연은 눈앞에 서있는 남자에게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소연아, 물러서있어.”

크리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 자신의 뒤로 오게 한 후, 대낫을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 역시 긴장감에 굳어있었다.

크리스의 행동은 명백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행동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하지 않는다는 듯 신경을 끄고 있었다. 그는 그저 천천히 주위의 광경을 살펴볼 뿐이었다.

‘지금 먼저 들어가야 하나.’

크리스는 생각했다.

원래 그녀에게 이런 종류의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먼저 선공을 해오든, 방어태세를 갖춘 채로 제자리에서 진득하니 기다리고 있든 선공권은 언제나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 그런 특권을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저 남자를 봤을 때, 그녀는 무심결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선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빈틈을 보이고 있는 지금 뿐이라는 것을.

이후의 기회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없을 지도.

그러나 그녀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의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 자칫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이쪽의 패를 드러낼 뿐인 치명적인 악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음… 본인의 군대를 무난하게 막아내기에 뭔가 엄청난 걸 기대했는데 말이야… 별 건 없군. 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아, 이곳은 후방이라 그렇습니다. 괜찮은 사람들은 다 앞에 나가있죠.”

“그러한가. 으음, 그렇군. 확실히 저쪽의 기운이 더 강하구나.”

크리스가 갈등을 겪으며 신중하게 각을 재고 있는 것과 달리, 남자의 모습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요엘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도 쓸 만한 녀석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닌 듯하군.”

먼 곳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은 가까운 정면의 두 여자한테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에게 적의를 보이며 긴장감에 싸여있는 그 둘을 보고서, 남자는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늦은 감도 있지만,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마왕 엘라보르님의 휘하에 있는 바리트 백작이라고 하네. 이번에 지구는 탐사 겸 관광을 목적으로 찾아왔지.”

남자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크리스는 앞으로 빠르게 두 걸음 내딛으며 대낫을 휘둘렀다.

정면을 쇄도해오는 거대한 참격.

무의식적으로라도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될, 그런 묵직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묵직한 참격은 남자의 코앞에서 갑자기 그 모습을 감췄다.

사라진 참격은 남자의 뒤에서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만이 가능한 변칙 공격이자 필살의 일격.

―들어갔다.

크리스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돼…….”

“오오, 이 느낌은… 워프 포탈인가? 깜짝 놀랐군.”

그녀의 참격은 남자의 손목에 가로막혀있었다.

대낫은 그의 손목을 손톱 하나 정도의 깊이만큼 베고서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크리스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참격은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다.

어디서든 원하는 위치에서 상대를 벨 수 있었고, 베면 반드시 잘린다.

그녀의 전투방식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 간단함에 담긴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참격은 지금 저 남자의 손목에 가로막혀있었다.

“저항력을 끌어올리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외팔이 신세가 될 뻔했어. 하하. 리리스님께서 사용하시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이걸 인간이 사용할 줄이야. 엄청나구나.”

바리트는 자신의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지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조금 아프군.”

그는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반대편의 손으로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헉…….”

단순한 주먹질에 불과했지만, 복부를 얻어맞은 크리스의 몸통은 잠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녀는 비명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로 피를 토해낼 뿐이었다.

“본인은 아픈 걸 조금 싫어해서 말일세. 뭐,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바리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검은빛의 벼락이 내리꽂혀 크리스를 꿰뚫었다.

“꺄아아아악!!”

크리스는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불과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언니!!”

“끄으윽, 으윽…….”

이소연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힌 크리스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의식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부상이 심각했다.

곳곳에 화상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토해내는 각혈량을 보아하니 내장 쪽에 부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요엘, 이 자식…!!”

이소연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와 함께 나타나 한가로이 말까지 섞고 있었던 요엘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요엘은 문득 이소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파랗게 타오르는 안광으로 그를 죽일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요엘은 그녀의 시선에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저기, 이블아이랑 워프 마스터님 아니야?”

“저 뿔 달린 녀석은 뭐야? 저 녀석이 크리스님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요엘님이랑 같이 계시니까, 관계자 분이지 않을까…….”

소란이 꽤 컸기에, 어느새 주변의 다른 헌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갈팡질팡할 뿐이었지만, 크리스가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저마다의 경계태세를 취하며 남자를 포위했다.

“으음… 나는 귀찮은 것도 싫어하고, 학살도 썩 좋아하지는 않네.”

바리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니 요엘, 그대의 존재 가치를 나에게 증명하도록.”

“알겠습니다. 뭐, 간단한 일이죠.”

요엘은 오른손을 들어올려, 가벼운 핑거스냅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마비되어있던 네트워크 시스템이 다시 가동을 시작했고―

네트워크 디바이서를 착용하고 있던 모든 헌터들은, 신경을 타고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마비 독에 몸이 굳어버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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