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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9화 (49/135)

49화

하늘에 보랏빛 기운들이 가득 맴돌고 있었다.

“씨발… 저게 뭐야…….”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던 인원들은 물론, 한참 정신없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던 전방의 인원들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모이기 시작한 보랏빛 기운들이 하늘 곳곳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보랏빛 기운이 점차 동그란 모양으로 휘감기며 공간의 균열이 뚫리고 있었다. 곧 게이트가 열린다는 뜻이었다.

“저건… 게이트잖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취이이이익!!”

“쿠워어어!!”

그리고 그 중얼거림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게이트 밑에서 차원의 틈이 갈라지면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게이트가 열린다고…?”

“말도 안 돼!!”

게이트는 순식간에 오픈되어 몬스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데모닉 게이트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군대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뭐야, 게이트가 왜 이렇게 빨리 열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제길, 모두 나갈 준비해!!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전방의 인원들이 전부 고립되어버린다고!!”

“아냐, 이럴 때일수록 후방 라인이 단단히 버텨줘야 해! 여기도 뚫리면 방어선이고 나발이고 그냥 개싸움밖에 안 돼!”

“이봐!! 본부, 본부!! 젠장, 이 기계는 왜 또 먹통이야? 야, 네 거라도 좀 줘봐!!”

“내 것도 안 돼.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벌어진 돌발상황을 앞에 두고서 각자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다.

게이트의 영향 때문인지 네트워크 시스템까지 멈춰버려, 전장에서의 지휘 전달 체계까지 전부 마비가 된 상황이었다.

“조용!! 진정하십쇼, 여러분 진정하세요!! 젠장, 좀 닥치란 말이다―!!!”

후방라인에서 지휘관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A급 헌터들 중 한 명이 인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그 효과는 전혀 없었다.

“우리 팀이라도 나간다. 얘들아, 가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반대야. 우리가 저길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아?”

“개인 행동 하지 말라고!! 자리를 지켜!!”

“으아아, 틀렸어. 다 틀렸다고! 애초에 안 될 싸움이었어!!”

저마다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패닉 상태에 빠지기 일보직전인 사람들도 보였다.

그 때였다.

[모두 조용.]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제자리에 멈추고 대열을 갖춰라.]

그 목소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하게, 그리고 무겁게 울려 퍼졌고, 혼란스러웠던 분위기는 누군가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 채 입을 다문 침묵 속에서, 작은 소녀 하나가 작전부 방향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블아이…….”

소녀의 눈에서 타오르듯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안광을 보고, 누군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지휘체계가 마비되었기에, 현 시간부로 방어라인의 통제와 지휘는 S-09, 이 이블아이가 직접 행하도록 하겠다.]

그녀의 목소리는 외견에 어울리는 고운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분위기는 감정 같은 걸 엿볼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벙 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대답은?]

“아… 어, 아?”

“네, 알겠…습니다?”

전음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결단력이 담긴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눈치만 보거나, 우물쭈물하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것이다.

‘이래서 단체로 모아놓으면 짜증난다니까…….’

“후으으읍―”

이소연은 그들의 모습에 짜증을 느끼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답은 어디 갔냐,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

그녀가 내지른 고함은 서로 어색하게 눈치나 살피던 전방의 인원들에게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예, 예!!”

“알겠습니다!!”

작은 소녀가 내지른 고함에 주변의 헌터들 모두가 각 잡힌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심지어 몇몇은 차렷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알았으면 일단 움직여!! 뒤지기 싫으면 원래 지시받았던 위치로 돌아가란 말이다!! 지시는 전음으로 개별적으로 직접 전달하겠다. 알아들어먹었으면 빨랑 움직여!!”

이소연은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킨 채로 다시 한 번 고함을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한 때 마비되다시피 뒤엉켜있었던 움직임들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각자가 다시 원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으며,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에 가득 차있던 혼란과 절망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그 빈자리에는 체계적인 움직임과 전의가 채워져 있었다.

“윽…….”

그리고 이소연은, 쓰러질 듯한 현기증에 잠시 이마를 짚고서 눈을 감았다.

미칠 것 같은 어지러움에 그녀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찌그러들었다.

그녀는 현재 다른 옵저버들의 역할까지 대신해, 스캔 영역을 전장 전체로 확대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의 보조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이소연이라고 할지라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 수많은 인원들에게 전음을 보냈고, 이제는 개별적으로 지시사항까지 따로따로 전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소연은 뇌가 찌그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다시 한 번 현기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소연은 쓰러질 수 없었다. 자기가 쓰러지면 정말로 끝이 난다.

‘네트워크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 되어버렸으니까…….’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이 일대의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되어있었다.

네트워크 시스템이 기동하지 않는 지금 다른 옵저버들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몇을 제외한다면 옵저빙은 물론이고 단순한 전음을 보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리라.

이소연은 다시 허리를 펴고서 스캔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제는 전방의 인원들에게 연락을 보내야할 차례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무리일 것 같았지만, 큰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는 잘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 * *

“방금 그 사람 소연이였지?”

달려오던 오크를 배리어로 쳐내며, 미카엘라가 물었다.

“아아, 그래.”

“사실 난 그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어!!”

그녀의 물음에 이세형과 전민호가 답했다.

그리고 박서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라는 방금 전에 전장에 나타난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푸른빛의 안광이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S급 헌터 이블아이의 상징으로 알려진 특유의 안광이었다.

그리고 그 이블아이는 괴짜가 많은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특히 질이 안 좋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보이던 분위기나 말투들은 이블아이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그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는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카엘라와 팀원들은 그녀가 이소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리를 비웠던 팀원이 돌아오니까 든든하구만.”

이쪽으로 다가오던 트롤의 얼굴에 파이어볼을 먹이면서, 전민호가 말했다.

상황은 아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라앉아있었던 팀의 분위기는 다시 활기가 돌고 있었다.

* * *

‘저건…….’

뒤쪽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모습은, 데모닉 게이트의 바로 앞에서 싸우고 있는 최전방 인원들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다크 포탈이잖아… 이런 시발.’

원호는 방금 리치가 만들어냈던 플레쉬 골렘을 원래 상태로, 즉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놓고서 후방을 바라봤다.

다크 포탈은 다른 세계를 서로 잇는 게이트를 강제로 열어버리는 것으로, 순식간에 차원 균열이 발생하고 그 즉시 소환이 시작되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건 마족들, 그 중에서도 백작급 이상의 상급 마족들뿐이었다.

[어딜 한 눈 파는 것이냐!!!]

그 순간 그의 주위에 뼈로 이루어진 벽들이 솟아올라와 그를 가뒀다.

“…성가시다고.”

원호는 발에 에테르를 모아, 땅을 밟음과 동시에 전 방위로 폭발시켰다.

쿠웅. 리치가 세워두었던 뼈의 감옥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고, 가벼운 진동이 땅을 타고 퍼져나 나갔다.

[크으윽, 네 놈!!!]

자신의 마법이 무위로 돌아가자 리치는 또다시 뭔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원호는 딱히 그걸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검을 휘둘러 에테르의 참격을 리치에게 쏘아 보냈다.

잠시 후, 깔끔하게 둘로 갈라진 리치의 몸통이 바닥으로 힘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귀찮게 굴던 리치를 처리한 후, 원호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고민했다.

일단 이곳에 있는 인원을 후방에 보내는 선택은 신중해야했다.

여기 있는 인원들이 후방으로 빠지는 건 전선에 진입하는 상위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잘못하면 후방을 지키려다 전방의 인원들이 궤멸당할 수도 있었다.

[크리스.]

원호는 고민 끝에 크리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녀에게 전음을 보내자, 그녀가 이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잠시 후, 그녀는 눈앞에 있던 데스 솔져 무리를 처리하고서 내 앞으로 이동해왔다.

“무슨 일로 불렀을지는 알 것 같지만… ”

“후방 쪽으로 지원을 가줘, 크리스.”

나는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녀는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간을 다루는 마법은 원래 에테르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계열의 마법이다. 거기다가 그녀는 워프 포탈을 활용해 무기를 강화시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건… 나를 배려하기 위한 제안?”

그녀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그것과 이거는 별개다.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내가 후방 지원으로 그녀를 선택했던 건 그런 싸구려 친절 따위가 아니라, 단순히 그녀의 기동성이 여기 있는 네 명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것도 있지…….’

그녀는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일대다수와의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것도 이런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말이다.

“…뭐, 좋아. 누군가는 가야했으니까.”

다행히 전투력에 관한 언급까지 하지 않아도 그녀는 움직였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던 걸지도.

그녀는 푸른빛의 잔영만을 남기고서 후방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때마침 등장한 거대한 몬스터의 종아리가 내 눈 앞을 가렸다.

‘사이클롭스… 진짜냐.’

오우거의 2배는 되어 보이는 몸뚱이를 타고 시선을 올리던 나는, 외눈박이 괴물의 한 쪽짜리 눈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괴물에게 살풋 눈웃음을 지어줬지만, 녀석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구어어어어어어!!!”

“하하하!! 이런 미친!! 진짜냐?”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에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히는 그레이트 액스를 피하며, 나는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던 녀석의 팔목을 베었다.

팔목을 떨궈낼 심산으로 휘두른 일격이었지만, 베인 상처만 났을 뿐 팔목이 떨어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깊이가 얕았다―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녀석의 가죽이 무식하게 질긴 거였다.

전설 속의 타락한 신들의 후예라고 불리는 사이클롭스.

굳이 지구의 몬스터 등급을 매기자면, 독일에 딱 한 번 나타난 적이 있다는 크림슨 레드 정도가 될 것이다.

“하여간 질리지는 않게 해주는구나, 빌어먹을!”

나는 다시 한 번 몸 전체에 에테르를 활성화 시킨 후,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고 있는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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