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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8화 (48/135)

48화

“너, 크리스가 네 정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왜 말 안했어.”

주변 상황을 대충 정리하고서 다가온 유선이 나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체요?”

순간 정체라는 말에 ‘유선이 내가 용사였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나’하고 깜짝 놀랐지만, 그녀가 말하는 정체는 용사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을 숨기고 있던 에스퍼를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뭐,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알았으면 더 빨리 왔을 텐데. 씁.”

“킥킥,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유선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알아?”

“반대??”

“응. 내가 게이트 주변 좌표 싹 다 보고 왔으니까 곧바로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절대 안 된다고 막 그러는 거야. 왜 안되냐고 물어보니까 또 그냥 막 안 된다고―”

“크리스, 좀 닥쳐줘.”

“흐음… 알았어~”

몬스터의 피를 군데군데 묻힌 채로 이쪽을 노려보는 유선의 눈빛은 꽤나 살벌했다.

크리스는 그녀의 눈빛에는 별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못이기는 척 콧소리를 내면서 하던 말을 멈췄다.

뭐, 듣지 않아도 내용은 뻔히 보일 것 같았다.

크리스가 유선을 데리고 게이트로 함께 오면, 당연히 내가 싸우고 있는 모습을 크리스가 보게 된다. 유선은 크리스가 내 비밀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기아스의 맹약에 따라 그 상황을 피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리라. 그 방법이 굉장히 미숙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눈치가 상당히 빠른 녀석이었고, 아마 내가 주변에 없다는 걸 보고서 유선이 텔레포트를 꺼리는 이유를 알아냈을 것이다.

“그것보다, 이것들은 대체 뭐야?”

“어떤 거 말이에요?”

“이 해골바가지들 말이야. 무슨 삼류 공포영화야?”

그녀는 바닥에 널부러져있던 스켈레톤의 파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그래도 나름 헌터생활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이런 거는 처음 본다고.”

“아, 스노우 화이트. 이건 언데드라는 건데―”

[야, 이 병신아.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이쪽을 노리고 주문을 외우고 있던 리치를 처치하고 온 이태현이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언데드에 대해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급하게 전음을 보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욕을 하고 그래, 원호.]

[생각해봐라. 이 세계에 언데드가 나타난 적이 없는데 너랑 내가 알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겠냐?]

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자, 녀석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뒤늦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리스와 유선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 가있었다.

“그… 게임 같은 곳에 보면 많이 나와. 좀비나, 해골이나, 뭐 이런 것들. 같은 언데드니까 대충 비슷한 거 아니겠어? 하하하.”

“그런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이 녀석들이 왜 갑자기, 그것도 떼거지로 나타나기 시작했냐고.”

이태현은 적당히 얼버무렸고, 다행히 그 둘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언데드라는 것은 게임이나 소설, 영화 같은 곳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상식 수준의 설정이었다.

“크리스, 근데 너 원래는 추격대 역할 아니었냐?”

그래도 언데드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와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언데드에 대한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릴 겸 크리스에게 의문을 가졌던 내용을 물어봤다.

“너, 작전회의 끝났을 때는 흩어지는 녀석들 쫓는 역할이었잖아. 근데 왜 여기 온 거야?”

그녀의 역할은 방어라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몬스터들을 추격해 처리하는 거였다. 남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기동성을 가진 그녀에게 적합한 역할이었다.

“아, 그게. 지금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전부 이쪽으로만 움직이고 있걸랑…….”

“…뭐라고?”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방어라인 쪽으로 몰려오고 있어. 신기하게도 말이야. 그래서 아직까지는 추격대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어.”

다시 한 번 허공에 대낫을 휘두르면서 그녀가 말했다.

‘몬스터들이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몬스터들은 지능적 한계로, 마족들이 직접적으로 지휘하지 않는 한 전술적인 체계적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어느 방향으로 진격한다는 단순한 내용조차도 말이다.

그렇기에 몬스터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을 지휘하는 마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이정도 규모의 무리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높은 녀석이.

[태현, 크리스의 말이 정말이야?]

[그래, 이대로라면 적어도 자작 급은 등장하지 않을까.]

나는 확인 차 다시 한 번 이태현에게 전음을 보내 대화를 나눴다.

그의 전음에 담긴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보아서는 사실인 것 같았다.

[하… 그것보다, 언데드들은 마석도 안 나와서 잡아봤자 적자행인데…]

[…지금 돈이 문제냐?]

이번 사태는 자칫하면 이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를 정도의 사태였다.

그렇기에 나 역시 되도록이면 힘을 보태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쳇, 나는 아스트레아에서도 싸움터에서 돈 받아먹고 살았다고.]

이태현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전음을 마치고서 그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온몸에서 핏빛의 붉은 연기들이 맺히며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광전사의 축복과 혈귀(血鬼).

싸우면 싸울수록 신체능력과 반사 신경을 초월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지만, 시전자의 에테르 소모량도 급격히 늘려버리는 광전사의 축복과, 상대방의 피를 흡수하여 자신의 에테르를 보충하는 혈귀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극단적으로 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동시에, 죽일 수 있는 녀석이 남아있는 한 반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지구력까지 갖춰진 것이다.

이 두 가지 능력에 이태현의 신체능력이 합쳐져, 그는 주위에 베어낼 적이 있는 한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용사들 중에서도 다수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저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는 녀석이 없었다.

‘다른 용병대들이 한 개 전투를 맡는다면, 블러드 울프의 용병대는 한 개 전쟁을 맡는다.’

나는 아스트레아에 있던 시절 들었던 울프 용병대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전장에 임했을 때의 이태현은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그리고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해지는 녀석이었다.

핏빛 기운을 뿜어내며 돌진해나간 녀석은, 몬스터의 군세를 무작정 일직선으로 돌파하며 무차별적인 학살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만 우리도 일할까?”

그 때까지도 내 옆에 서있던 크리스가 물었다. 유선은 몬스터 무리로 뛰쳐나가 전투를 시작한 상태였다.

끄덕.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 * *

그 시각.

방어라인의 후방에 자리를 잡고 있는 미카엘라는 급조되어 설치된 방벽 뒤에서 전방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전방에서의 전황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게이트가 예정보다 빨리 새벽에 오픈되는 바람에 다급하게 구성된 방어라인이었지만, 그들은 훌륭하게 웨이브를 막아내고 있었다.

비록 난전상황이 펼쳐져 팀별로 중구난방적인 전투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몬스터들은 쉽게 전방을 뚫고 나오지를 못했다.

전방을 뚫고 후방까지 다가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극히 적었고, 그 녀석들도 대부분은 잔챙이에 불과했다.

―후방라인에는 비교적 전투력이 부족한 녀석들이 배치되어있다.

전방에 배치된 헌터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만약 레드급 이상의 몬스터가 실수로라도 새어나간다면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잔챙이들은 무시하고 흘려보내더라도, 강력하 몬스터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새벽에 씻지도 못하고 나온 것 치고는 일이 꽤 잘 풀리는군.”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으며 이세형이 말했다.

시위를 떠난 에테르의 화살은 멀리에서 다가오던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정확히 박살냈다.

“그, 그러게 말이야. 심심할 지경인데?”

“여유를 부릴거라면 말이라도 더듬지 말던가…….”

“…….”

긴장한 표정으로 허세를 부리던 전민호에게 박서준이 한 소리하자 그는 곧바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미카엘라는 자신의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이세형은 전방에서 놓친 녀석들을 후방에 다가오기 전에 계속해서 저격하고 있었고, 전민호와 박서준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에테르를 활성화 시킨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쪽에서 11시 방향. 오우거 출현.]

배틀필드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의 팀을 담당하고 있는 옵저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

김세율이 그 무전에 응답하더니, 손을 들어 올리고 금방 라이트닝 스피어를 만들어냈다.

“하앗!!”

번개의 창이 완성되자마자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내던졌다.

그녀가 던지는 동작은 가벼웠지만, 그녀의 손을 떠난 번개의 창은 강렬한 파공음을 울리며 대기를 가르고서 오우거의 가슴 한 가운데를 꿰뚫었다. 오우거의 코어가 위치한 곳이었다.

“쿠워어어어억…….”

단숨에 코어를 꿰뚫린 오우거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옐로급 몬스터인 오우거를 단 일격에…….”

“아까부터 라이트닝 스피어를 쏴대던 게 저 사람인 거지?”

“저 사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그녀의 실력은 후방에 배치된 인원들 사이에서 월등히 높았다.

주위의 다른 헌터 팀들은 그녀의 활약을 보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후욱… 후우…….”

하지만 정작 그 본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뱉고 있었지만, 미카엘라는 그걸 포착해냈다.

‘세율 언니도 오늘따라 불안해하고 있어.’

그녀의 마법의 위력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강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호흡은 불안정했으며, 에테르의 흐름과 마법 역시 조금 불안하고 조급해하는 감이 있었다.

평소 그녀의 마법이 냉정한 계산으로 행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것은 구석에 몰린 자의 발악 같은 느낌이었다.

불안해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김세율 만큼은 아니었지만, 팀원들 전체가 평소와 달리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세형이 그나마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평소 흔들림이 없던 그가 오늘은 활 시위를 당기면서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미카엘라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이런 거대한 작전에 참여했다는 점과, 새벽부터 게이트가 오픈되는 바람에 계획이 뒤틀렸다는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그런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불안한 이유는, 이소연과 조원호의 빈자리를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7명의 팀원 중 2명이 빠졌다. 그것만으로도 팀에 미칠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 둘이 빠지면서 팀원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그런 단순한 계산을 넘어섰다.

직접적으로 먼저 느껴졌던 것은 이소연의 빈자리였다.

당연하다는 듯 광범위하게 제공되었던 정보들이 보이지 않았다.

후방에 따로 배치된 다른 옵저버가 정보를 제공해주기는 했지만, 이소연의 옵저빙에 익숙해져있던 그들에게 다른 옵저버의 옵저빙은 복잡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한 쪽 눈에 안대를 차고서 전투에 임하는 듯한 극단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조원호가 없다는 사실이 그보다도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원래 팀원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떻게든 해결 된다―’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팀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고, 미카엘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카엘라는 그 자신감의 근원이 김세율이라고 생각했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는 이미 A급과 S급 사이의 수준에 도달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지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조원호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미카엘라는 그 자신감의 근원이 조원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도 근거도 알 수 없었지만, 문득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미카엘라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잠깐, 저기 뭔가 이상한데?”

그 때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별 대단한 전투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갑자기 보랏빛 기운들이 모이더니, 빠른 속도로 공간에 틈이 갈라지고 있었다.

또 다른 게이트의 오픈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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