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예측하고 있었던 것보다 게이트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있었다.
게이트 코앞에서 몬스터의 군세를 홀로 막아내고 있던 원호는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의 반수는 홀로 쳐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3할 정도를 쳐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사실 원호는 몬스터 숫자를 어느 정도 줄여 놔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정말로 다 막아낸다면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몇몇 수비인원들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유선이나 이태현이 도착했을 때부터는 그들이 해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할 것이라고 원호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단신의 몸으로 막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양이었다. 아무리 원호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덕분에 실컷 날뛰어도 상관 없으리라, 원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등급 또한 함께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전투에 임했을 때는 오우거나 트롤들이 가끔가다 나타났을 뿐, 어디까지나 오크와 하위 언데드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우거나 트롤들은 심심찮게 나타났으며, 때때로 레드급 몬스터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호는 검을 하단으로 들어 올린 채 자세를 낮추고서 눈앞의 언데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언데드는 군데군데 녹이 슨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칼날만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투구 밑으로 드러난 해골은 형형한 푸른빛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급 언데드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였다.
[크하… 거슬린다… 인간…]
언데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려왔다. 전음처럼 상대를 배려하듯 깔끔하게 울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상대방의 의식에 억지로 우겨넣어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상대방의 정신 상태를 불안하게 망가트리는 사술이었다.
‘…데스나이트까지 나타나는 건가.’
[죽어라… 인가아아안!!!!]
하지만 그런 싸구려 사술 따위는 원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원호는 자세를 낮춘 상태로 이쪽으로 달려드는 데스나이트에게 파고들어 거리를 좁혔다.
이제 한 보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상태에서, 원호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오른쪽 허리부터 왼쪽 어깨까지 대각으로 올려 베었다.
데스나이트는 생전에 일정 경지에 다다랐던 기사들의 시체로밖에 만들 수가 없었고, 또한 사령술사의 역량에 따라 생전보다도 더욱 강력해지는 언데드였다.
그렇기에 데스나이트는 그의 움직임을 뒤늦게나마 쫓을 수 있었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솟구쳐 오르는 참격을 검으로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하지만 데스나이트의 몸통은 검과 함께 갈라져버렸다.
사령술로 강화되어 시퍼렇게 날이 서있던 검은 단숨에 두 조각이 나버렸고, 어둠의 기운이 짙게 배여 있던 풀 플레이트 아머에는 깊고 깔끔하게 베인 참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크아아!!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아아!!]
칼에 잘려나간 데스나이트의 갑옷 틈 사이로 검보라빛의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감히, 감히 나를―!!]
슈칵.
데스나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호는 검을 들어 올려 대각으로 깊게 내려벴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검보라빛 연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데스나이트의 몸체는 그 힘을 잃은 채 바닥에 조각조각 나동그라졌다.
“시끄러워, 미친놈아. 다음 생에서는 묻지 말고 꼭 화장시켜달라고 해라.”
왜 데스나이트 들은 싸울 때나 죽을 때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걸까.
원호는 그 와중에 과거에 싸웠던 다른 데스나이트들을 떠올렸다.
처음 몇 놈을 상대했을 때는 개인의 개성이겠거니~ 했었지만, 여태동안 만난 모든 데스나이트들이 이 모양인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기사도 배운 놈들 중에는 시끄러운 놈들이 많던데. 그래서 그런 건가.’
언데드들을 상대할 때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시끄럽게 떠들어대거나 비명을 질러대는 일이 없다는 거였는데, 데스나이트나 리치 같은 상급개체들은 그런 게 없었다. 가끔 보면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시끄러웠다.
[각오… 해라… 인가아아안!!!]
등 뒤에서부터 찌르고 들어오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원호는 몸을 돌려 피해내면서 그대로 비어있는 데스나이트의 목을 쳐냈다. 몸통에 비해 방비가 부실한 목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떨어져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기습을 할 거면 입을 다물든가, 입을 다물기 싫으면 기습을 하지 말든가.’
신입기사들이나 할법한 병신 같은 짓을 태연하게 저지른 데스나이트의 잔해를 바라보면서 원호는 혀를 찼다. 언데드가 되면 다 돌대가리가 된다는 말인가.
단숨에 데스나이트 두 기를 손쉽게 해치워버리자, 몬스터들은 슬금슬금 그와 거리를 벌렸다. 방어라인을 향해 물밀듯 밀려오던 몬스터들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갈래로 나뉘어 원호를 피해서 움직였다.
원호는 몬스터 무리 한 가운데에서 홀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서있는 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활용해 잠시 감지망을 넓혀 주위를 살폈다.
워낙 짙은 에테르 농도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주위 상황의 간략한 정보들은 파악해낼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숫자는 확실히 늘어났고… 레드급 몬스터들도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어.’
전체적으로 몬스터들의 숫자와 수준이 올라갔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게이트에서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나타나는 레드급 몬스터들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언데드들은 아직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등급 같은 게 전혀 매겨지지 않았지만, 방금 원호가 처리한 데스나이트들도 레드급 중하위권은 되는 힘을 가졌다.
‘강한 녀석들만 처리해두는 걸로 할까…….’
원호가 슬슬 신중히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 때, 그는 하늘 위에서 갑자기 공간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감지했다.
게이트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차원이동은 아니었다. 게이트로 인한 균열이라면 탁한 기운이 느껴져야 할 터였지만, 그 기운은 오히려 맑은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기운은 상당히 익숙한 기운이었다.
잠시 후, 공간 균열에서 세 명의 헌터들이 나타나 지상으로 곧바로 뛰어내렸다.
스태프인지 둔기인지 헷갈리는 스태프를 들고 있는 잿빛머리의 헌터와,
날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의 대낫을 들고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은발머리의 헌터.
그리고 등 뒤에 매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들며 내려오는 헌터.
S급 헌터들인 유선과 크리스, 그리고 이태현이었다.
떨어지던 도중, 유선은 들고 있던 스태프에 에테르를 집중시켜 형상화시키고, 그것들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푸른빛을 뿜어내는 에테르들이 스태프를 주심으로 회전하며 주위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긴 급격한 온도차에 그녀를 중심으로 대기의 흐름이 뒤바뀌고 있었다.
“낙월(落月)―”
그리고 지상에 거의 도착한 그녀는, 폭풍의 중심이 되어버린 스태프를 마치 해머로 내리치듯이 지상에 내리찍었다.
콰자자자자작!!
그녀가 내리친 곳을 중심으로 수없이 많은 얼음 기둥이 주변에 솟아올라와 마치 빙하지대와도 같은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범위 안에 있던 몬스터들은 얼음 기둥과 함께 얼어붙거나, 솟아오른 얼음 기둥에 꿰뚫린 채로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에테르로 만들어진 빙하지대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깨져나갔다.
빙하지대가 사라진 곳에는 얼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린 몬스터들의 파편과, 치명상을 입은 채 바닥에 널부러진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구워어어어어!!”
어깻죽지가 꿰뚫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아직 쓰러지지는 않았던 트롤 하나가 달려들어 거대한 몽둥이로 그녀를 내리찍었다. 아니, 내리찍으려고 했다.
몽둥이가 그녀를 향해 내리꽂히는 궤적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대낫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나타난 대낫은 그 날붙이 부분만 빼꼼히 나와 있었다.
“우워어억?”
그리고 거대한 몽둥이는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낫에 닿는 순간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그 낫이 아무리 날카롭고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압도적인 크기 차이가 나는 저 나무 몽둥이와 부딪히면 날이 박히거나 튕겨나가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트롤의 나무 몽둥이는 낫의 날부분에 닿는 순간 마치 두부라도 잘려나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저 무식하게 생긴 나무 몽둥이에 부드럽게라는 표현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트롤은 자신이 힘껏 내지른 일격이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고, 아직 자신의 손에 남아있던 손잡이 부분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딜 한 눈 팔아, 이 멍청한 놈아.”
그리고 유선은 어느새 트롤의 앞에 다가가 있었다.
그녀는 스태프를 두 손으로 꽉 쥐고서, 밑에서 위쪽으로 트롤의 복부를 강타로 쳐올렸다.
스마이트(Smite).
마법을 사용하는 에스퍼, 혹은 마법사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시전자의 힘을 증가시켜 일시적으로 강력한 물리적 타격을 가할 수 있게 하는 주문이었다.
기껏 해봤자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호신용으로 어쩌다 가끔 익히는 기술이었고, 애초에 물리적 수단을 활용하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가 이 기술을 활용해봤자 별 쓸모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태프로 휘두른 스마이트는 마치 숙련된 전사의 일격과도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 그 증거로 복부를 얻어맞은 트롤이 공중에서 1m 정도는 떠있는 상태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트롤의 몸통이 다시 땅에 내려오기도 전에, 유선의 스태프를 따라 발사된 얼음의 창이 그 두꺼운 몸통을 꿰뚫고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트롤의 몸뚱이는 관성의 법칙 따위는 무시하듯 얼음의 창에 꿰뚫린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좋은 아침이야. 빨리 나왔네?”
그리고 텔레포트로 원호의 바로 앞에 갑자기 나타난 크리스가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텔레포트는 원호조차도 직전에나 알아차렸을 정도로 신속하고 또한 간결했다.
“…다른 거는 몰라도 서프라이즈 파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겠구나.”
“그래? 너도 하나 기획해서 준비해줄까?”
“…기쁜 마음으로 사양할게.”
인사를 겸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녀는 들고 있던 대낫을 허공에 휘둘렀다.
휘둘러진 대낫은 일정 부분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졌고, 사라진 부분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오우거의 목 주변에 나타나 목을 베고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일참에 오우거의 목이 떨어져나가지는 않았지만, 동맥이라도 끊긴 것인지 깊게 베인 목의 상처에서 한참동안 핏물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결국 오우거는 이 근처에는 오지도 못한 채로 쓰러지고 말았다.
‘워프 포탈을 저 얇은 날붙이에 시전 한다고…?’
다시 돌아온 대낫의 날부분에는 푸른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공간의 균열이 느껴지고 있었다. 워프포탈의 흔적이었다.
그제야 나는 오우거의 몽둥이를 그토록 쉽게 절단 냈던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워프포탈을 극도로 얇게 형성하면, 닿은 면적만이 공간이동을 하게 되어 마치 극도로 날카로운 날붙이와도 같은 효과를 같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영역이었지…….’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워프포탈의 무기화는 실전적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며 그 유지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스트레아에 있던 시절, 지식의 탑에 사는 마법사들은 칼이 없는데 사러가기는 귀찮으면 식사용 나이프에 적당히 워프 포탈을 열어서 사용한다는 말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녀석들이 안전한 방구석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시전을 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전투 현장에서 실용적으로 써먹을만한 기술은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공간이동에 저항해내면 끝이기에 자신보다 강한, 아니 자신과 비슷한 상대에게도 써먹을 수 없는 기술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강하네, 너.”
정작 그녀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가 하면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