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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2화 (42/135)

42화

“그럼 이상이니까, 다들 오늘밤만큼은 내일을 대비해서 푹 주무시기를 바랍니다. 이 근방 30km내에는 24시간 편의점 알바생도 다 피난 갔으니까 술도 야식도 없어요~ 괜히 찾는다고 고생하지 마시고 주무십쇼. 하하하.”

요엘은 회의를 마친 후,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꾸벅인 다음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회의가 끝났음에도 자리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일어나면 복잡해질 것을 염려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각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거나 다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패전을 예상하는 공포서린 긴장감이 아니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의 긴장감이었다. 싸움을 앞에 둔 자들의 특유의 긴장감 말이다.

“자아―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도록 하지. 요즘 아침잠이 줄어서 말일세. 노인네는 일찍 잠들어야해.”

“에― 아저씨, 저랑 같이 한 잔 하고 자시죠?”

“흠… 고마운 제안이네만, 오늘 마실 술은 내일까지 아껴뒀다가 승전을 기념하며 마시도록 하지. 하하하!!”

황태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곧바로 자기숙소에 올라가지 않고 팀원들을 보기 위해, 혹은 단원들을 보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섰으며, 몇몇은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는지 밤 산책을 나서고 있었다.

[그럼, 20분 정도 뒤에 말했던 곳에서.]

사람들이 반쯤 빠져나갔을 때, 로크는 나에게 전음을 남기고서 빠져나갔다. 그의 말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지금 시간은 대략 10시쯤이었다.

[원호, 자기 전에 맥주 한 잔 어때?]

그 때 크리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그녀가 보낸 전음이었다.

[아니, 야밤에 30km 행군을 감행할만한 용기는 없는데.]

[누가 걸어간데? 1초면 홍대 앞 와인바 입구 앞으로도 갈 수 있거든?]

[…대단하시구만.]

나는 새삼 그녀가 S급 헌터, 그것도 워프 마스터라 불리는 에스퍼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하냐. 가자.”

그 때 유선이 내 앞에 잠시 멈춰서서 말을 걸더니, 곧바로 회의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 보시다시피 고용주가 있는 몸이라서.]

[에잉… 됐다. 우리 이블아이랑 놀면 되지.]

그러더니 그녀는 옆에 있던 이소연의 어깨를 붙잡더니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들이 있던 자리에는 푸른빛의 잔영밖에 남지 않았다.

과연 워프마스터라는 이명에 어울린다, 라는 감상을 남기고서, 나는 유선의 뒤를 쫓았다.

* * *

“요엘 자식, 빨리 좀 끝낼 것이지 질질 끌고 자빠졌네.”

뚜둑, 둑.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유선이 굳은 목 근육을 풀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리 요엘 씨를 싫어하는 겁니까?”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오히려 요엘이 진행했기에 빨리 끝날 수 있던 거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납득은 시킬 수 있는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작전은 반드시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누구도 목숨을 보장하기가 힘든 아주 위험한 작전에 속했다.

그렇기에 작전회의는 보다 오래 늘어지고 불평도 쌓일줄 알았건만, 회의는 1시간 안팎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요엘 씨 덕분에 빨리 끝난 것 아닌가요?”

“저 자식이 진행하면, 회의가 설명회가 되어버리잖아.”

내가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 그녀의 눈살이 조금이지만 확실히 찌푸려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녀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 녀석이 뭔가 계획을 생각해내고서 회의를 진행시키면, 처음 녀석이 생각했던 계획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고 그에 맞춰나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건 결국 저 녀석이 처음 생각해낸 계획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그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거나 빙 돌아가는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결국 결정된 작전과 배치는 처음 내용과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걸 전부 설득시키고 납득시키고, 결국 나쁘지 않은 계획인 걸 인정하게 된다만…….”

“그만큼 그의 전술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아닐까요?”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말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녀석 덕분에 겨우 해낼 수 있었던 토벌도 상당히 많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저 녀석의 계획에 참가하면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든다고. 요즘 들어 더더욱 말이야.”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정신 나간 년의 쓸데없는 꼬장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딱히 이해받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니야. 녀석이 훌륭한 전술가인 건 사실이다. 좋은 지휘관은 못되더라도 말이야.”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유선은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다음에 보는 건 게이트 앞이 되겠구만.”

“그렇겠네요. 남의 발목 잡지 않도록 푹 쉬십쇼.”

“하, 누굴 걱정하는 거냐. 너야말로 생각보다 약골이면 죽기 전에 나한테 맞아죽을 줄 알아라.”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서 방문을 닫았다.

‘그럼…….’

나는 내 방문 앞에 섰다. 유선의 바로 옆방이었다.

끼이익― 콰앙.

그리고 일부러 문을 힘차게 열고서 세게 닫았다.

이런 쓸데없는 촌극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내가 방에 들어갔다는 어필을 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감출 필요까지 있나―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밤중에 어디 나간다는 걸 알려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았기에.

문을 닫은 후, 행여 발자국 소리가 새어나갈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 * *

“음… 그러니까.”

나는 지금 호텔에서 나와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쪽방향에는 폐건물들이 꽤 많았기에 로크가 말한 장소가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감지망을 펼쳐내야 했다.

“…저기구만.”

그 건물은 부분 부분이 깨져나간 편의점 간판이 1층에 매달려있었는데, 그 건물의 2층에서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마 로크가 무슨 조치를 취해둔 것일 것이다.

꽤나 정교하게 해둔 것인지 두리뭉술한 이질감만 느껴질 뿐,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로크가 이 주변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으리라.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들어서자마자 영역의 경계선을 넘었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티 디택팅에 안티 파인딩인가…….’

별 마법은 아니었지만 그 방식과 전개가 상당히 섬세하고 정교했다. 마치 솜씨 좋은 결계사가 공간분리 결계라도 쳐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과연 밀회 전문가 블러드 울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마저 올랐다.

“오오― 아크, 오랜만이야.”

계단을 올라 2층의 철문을 열자, 로크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크 아니다. 조원호라고 불러라.”

“하하, 그게 본명이야? 아스트레아에서는 죽어도 말 안 해주더니만.”

“그땐 서로 말 안하기로 했었으면서 뭘 새삼.”

아스트레아에서 용사로 있던 시절, 용사들끼리 원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 중 하나였다. 괜히 추억이랍시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우울한 분위기로 바뀌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으니까. 너무나도 머나먼 희망과 추억은 막막함을 안겨다줄 뿐이었다.

“그래서 로크, 무슨 일로 부른 거냐?”

“이야, 너 여기서도 여전히 꽉 막혔구나? 그냥 오랜만에 동료 얼굴이나 보자는 거지 뭐 별다른 의미가 있겠냐.”

로크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도 로크 아니야. 이태현이라고 불러라.”

“S급 1위의 블러드 레이스님?”

유선 같은 반응을 기대하면서 그의 이명을 불러봤으나, 그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 이름도 맘에 들기는 하지만… 네가 부르면 뭔가 애매한 기분이네. 낯짝 팔린다고 해야 할까.”

“그럼 블러드 울프라고 불러줄까? 네가 직접 지은 이름이잖아.”

“예전부터 누누히 말해왔던 것 같지만 그것도 좀… 너 자꾸 그러면 마왕 슬레이어라고 불러버린다.”

“그러다 죽으면 보험처리 되냐?”

“왜, 마왕 죽인 건 사실이잖냐.”

결국 우리 둘은 서로의 본명, 이태현과 조원호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서로 피해만 입을 뿐인 상처 가득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너 예전이랑 얼굴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솔직히 못 알아볼 뻔했어.”

“뭐, 시간이 흘렀으니까… 근데 그런 것 치고는 그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동안도 이런 동안이 없네. 덕분에 알아본 거기도 했지만 말이야. 좀 오래 걸렸지만.”

이태현이 내 얼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 네가 너무 삭은 거지.”

“뭐?”

로크, 아니 이태현은 평소 민감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는지 갑자기 표정을 구겼다.

“너까지 그런 소리 하냐? 그리고 삭은 거 아니거든? 이정도면 생생한 거지. 오히려 네가 너무 동안인거야. 네 얼굴이 어딜 봐서 27이냐?”

“뭐? 27?”

나는 녀석과 동갑으로, 지금 나이는 21살이었다. 녀석은 내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걸 까먹은 걸까. 하긴 이 녀석은 잔머리는 잘 돌아가도 지능적으로 똑똑한 놈은 결코 아니었다.

“뭔 소리야. 27이라니. 이제 21살인데. 정신 나갔냐?”

“…너 나랑 동갑 아니었냐?”

“동갑 맞는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채로 잠시 굳어버렸다.

“…아크, 대한민국. 나랑 동갑으로 18살에 고등학교 2학년.”

“…로크, 대한민국. 나랑 동갑으로 18살에 고등학교 2학년.”

이태현이 먼저 묻고, 내가 그 다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각자 상대방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나열해보았고, 거의 동시에 그에 대한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장난치거나 사기 쳤었던 거 아니지?”

“미쳤냐? 다른 놈도 아니고 아크한테 약을 팔게.”

아스트레아에서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라는 가능성을 의심하며 물어봤지만 이태현의 대답은 진짜 같았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요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둘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정보가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은 채, 잠시 생각을 더듬어봤다.

‘…설마.’

나름대로의 답은 나왔지만 믿기는 힘든 생각이었다.

이 답이 맞는가,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2021년, 아스트레아에 소환, 그리고 귀환. 지금 21살.”

나의 말에 이태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2015년, 아스트레아에 소환, 그리고 귀환. 지금 27살.”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 그대로 나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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