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럼, 편히 쉬고 계십쇼.”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를 마친 이영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그래, 고생했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이만.”
유선의 말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닫고서 돌아갔다.
2층에서 31층에 있는 객실로 바꾼 유선은, 객실에서 베란다를 확인하더니 반대편 객실이 더 좋다고 다시 바꿔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영수는 이번에도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마스터키였기에 맞은편 객실로 옮기는 건 조금만 더 걸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유선의 요구대로 끝까지 안내를 마쳤다.
데모닉 게이트가 보이는 방향의 객실 2개.
이영수는 안내를 마치고서 우리에게 카드키 2개를 건넸다. 하나는 지금 들어와 있는 유선의 객실의 카드키였고, 나머지 하나는 나에게 배정된 숙소의 카드키였다.
‘예? 비전투원 숙소는 다른 곳에 따로 배정되어 있습니다만…….’
이영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난감함을 표했지만, 유선은 어차피 방도 남는 것 같은데 옆방으로 하나 내달라고 억지를 부려서 받아냈다.
“그건 그렇고 의외네요.”
“뭐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를 열어보는 유선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평소 관리도 되지 않을 호텔에 냉장고가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냉장고는 단지 치우지 않았을 뿐이었는지 내용물이 들어있기는커녕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아까 솔직히 일 하나 터지는 줄 알았는데.”
“아까?”
나의 말에 유선은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봤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말이에요.”
‘귀찮네요. 그것도 존나게.’
관리국 직원, 이영수는 31층 버튼을 누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성질 더러운 유선과 엘리베이터라는 제한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아― 이제 이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최소한의 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녀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예상 외로 유선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특유의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있을 뿐이었고, 이후에는 안내받은 숙소의 베란다를 확인하고서 방을 바꿔달라고 한 게 전부였다.
“엘리베이터? 거기서 뭔… 아하.”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유선은 잠시 표정을 찡그리며 생각을 더듬더니, 이윽고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킥킥, 왜. 내가 거기서 시비라도 걸었어야 했냐?”
“아니, 그런 말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기분이 나쁘더라도 적당히 넘기거나 참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유선은 기분이 나쁘면 그냥 그대로 터트려버리는 성격이었다.
“만약 그 녀석이 호텔에서 일하는 녀석이었다면 내가 화를 냈겠지. 호텔 일을 하는 녀석이라면 나 같은 진상 손님도 어떻게든 잘 대접해주는 게 녀석의 일이니까.”
호텔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유선이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자기가 진상인 건 알고 있군…….’
그리고 나는 그녀가 자기 성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약간 의외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관리국 직원이잖아? 녀석에게는 날 친절하게 대할 의무가 전혀 없다고. 나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려의 영역이고 본연의 역할은 게이트 감시나 잘하는 거지.”
베란다를 바라보며 말하던 유선이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잿빛머리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일도 아닌데 이것저것 부탁해오면 솔직히 귀찮지 않겠어? ‘괜히 나섰다가 귀찮아졌네.’ 같은 생각도 들기 마련이겠지.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고.”
“아… 예.”
“그리고 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맘에 드는 행동이었어. 니들은 마치 날 분노조절 장애라도 갖고 있는 년으로 알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전민호가 나에 대한 의문점을 물어봤을 때 그녀가 보였던 태도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당시 녀석의 질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솔직한 질문이었다.
그건 그냥 앞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어서 그랬던 건가?
“그런 것보다는, 일단 이쪽으로 와봐라.”
생각을 하던 중, 베란다 쪽에서 이쪽을 보고 서있던 그녀가 나를 부르며 손짓했다.
내가 천천히 걸어 유선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뭡니까. 춥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은 쌀쌀한 편이었는데, 31층에서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재끼자 차가운 바람이 강풍처럼 거세게 몰아쳐 들어왔다.
“닥치고 여기 와서 확인해봐.”
유선은 베란다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간 다음,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밖으로 나서자 정면에 불운한 기운의 보랏빛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마계와 다른 세계가 연결될 때 나타나는 특유의 현상이었다.
“뭘… 말입니까?”
“여기서 출발하면, 어디까지 도착할 수 있겠어?”
“…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그녀가 31층을 달라고 했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 정말로 경치 좋은 곳에서 묵고 싶어서 31층을 달라고 한 줄 알았네요.”
“…너 정말 날 쓰레기로 알고 있는 거냐?”
유선이 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억지를 부려가면서까지 31층을 받아냈던 이유는 단순히 경치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 아니,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전투에 참여시키기 위해서가 더 맞는 표현이겠지.
나는 이곳에서 어디까지나 그녀의 비서로 되어있었다. 비전투원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유선을 따라가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게이트 바로 앞의 최전선에서 싸울 생각이었다. 그 주변에는 유선과 블러드 레이스만 배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전선으로 들어가는 일행 중에 비전투원인 비서가 당당하게 섞여있다가는 당연히 엄청난 관심들과 의심들이 쏟아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알아서 사람들 시선을 피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방어라인으로 구성된 이 주변을 뚫고서 최전선까지 간다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높은 곳에서 출발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빠르게 합류할 수 있다. 물론 이 높이에서 착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건이 달려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한테는 큰 문제가 되는 조건은 아니었다.
“뭐, 그건 됐고. 여기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냐고.”
“…잠시만요.”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고민했다.
내가 어디까지 뛸 수 있는가.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쉬었다고 하지만 지금 내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거기에 배리어를 발판 삼아 뛰는 것도 감안한다면, 여기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지점까지 한 번에 도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다만, 내가 내 능력에 대해서 유선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의 문제였다.
나는 그녀에게 나에 대해 얼마만큼을 말해야 하는가.
나는 그녀를 얼마나 신용할 수 있는가.
“대략… 저 정도 지점까지는 가능하겠네요.”
나는 베란다 난간에 팔꿈치를 얹으면서 적당한 지점을 가리켰다. 꽤나 먼 거리였지만, 어느 정도 능력이 되는 헌터라면 납득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도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녀를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여기서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내가 알 수 있을 것 같냐?”
“저기, 지금 막 크레인 올라가는 부분이요.”
말하고 나서 지금 이 일대에 수도 없이 많은 크레인이 가동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서 다시 정정하려 했지만, 유선은 내가 생각했던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 듯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음, 저쯤까지 말이지.”
그리고 그녀는 베란다 난간에 살짝 몸을 기댄 채 입가를 감싸 쥐며 턱을 괴었다.
“방어라인 시작부분을 살짝 넘기고서 8구역 중간 정도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는지 몸을 곧게 세우면서 나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너는 여기서 출발해라.”
“뭐, 저야 좋죠.”
대충 생각해도 몰래 기척을 지워가면서 방어라인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편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오픈 예정시간은 명일 오전 7시 20분 정도. 헌터들은 대략 2시간 전부터 투입되기 시작할 거니까, 넌 타이밍 괜찮다 싶을 때 알아서 출발해라.”
“알아서 나가는 겁니까…….”
뭐 그게 편하기는 하다.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나가.”
“지금 나가라고요?”
“아니, 말고 지금 내 방에서 나가라고. 너 안 쉴 거야? 난 좀 자야겠으니까 어쨌거나 나가.”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아…….”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내 방으로 향했다.
방이라고 해봤자 바로 옆방이었지만 말이다.
연맹의 지원부대가 도착해 곧 작전회의를 시작할 테니 회의실로 내려오라는 말이 들려온 것은 내가 방에 들어가고 1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 * *
“뭐야, 아직 안 왔잖아?”
작전실에 들어선 유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던 사람까지 깨워놓고서는, 이게 뭐야?”
“허허, 유선은 이제 막 잠에서 깬 모양이로군.”
“호텔 침대여서 그런지 내 집 침대보다도 잠이 더 잘 오더라고.”
유선은 툴툴거리면서도 황태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기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나는 저번과 달리 출입문 옆에서 각을 잡고 서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마치 보안 에이전트처럼 보이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기존 호텔의 연회장을 개조한 회의실은 저번의 학교 것보다도 훨씬 더 넓었다.
벽 한 쪽에는 큼직한 스크린이 걸려있었고, 빔 프로젝터가 스크린에 작전구역의 지도를 띄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꽤나 세련된 디자인의 거대한 테이블 2개가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원래의 용도는 만찬용 테이블이었으리라.
작전실 안에는 저번에 봤었던, 얼굴이 꽤 익숙한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고, 그 외에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거 늘어나있었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학교 관계자는 없었고, 류환만 구석에 앉아있었다. 아마 그가 학생 팀들의 대표로 이곳에 참석한 것이리라.
“아니, 왜 안와? 도착하기는 한 거야?”
“도착했네. 방금 전에 잠시 이곳에도 들렀으니 말이야. 다만 먼저 짐부터 정리하기 위해서 숙소에 올라가있네. 곧 내려올 테지.”
황태진이 조금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과 달리 먼 길을 온 사람들이잖나. 조금은 양보해줘도 될 테지.”
“아, 알았으니까 잔소리하려는 거면 집어치워줘, 영감…….”
“이야아, 이거 저희 때문에 다들 기다리시는 건가요?”
“유선, 오랜만이야!! 현검 아저씨도 안녕!!”
그 때, 작전실의 문이 열리면서 능글맞은 남자의 목소리와 최근에 들은 기억이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둘 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