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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35화 (35/135)

35화

“쯧.”

유선은 혀를 차면서 턱을 괴었다. 그녀는 뭔가 개운치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호연에게 뭐라고 한 마디 쏴붙여주려고 했었는데, 이소연이 나선 덕분에 타이밍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석에 앉아있던 류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해해주도록 하게, 스노우 화이트.”

맨 처음 그녀에게 말을 걸었었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검(賢劍)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 노년의 헌터, 황태진이었다.

“웬만하면 이명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었을 텐데, 할아범.”

“하하, 그랬었나? 이거야 원, 늙으면 기억력이 영 시원찮아서 말이야.”

그녀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쏴붙이듯 말했지만, 황태진은 웃음을 터트리며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유선도 진심으로 질책하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보게, 유선. 나 같은 시원찮은 늙다리들이야 고국을 지키겠답시고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던지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네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잖은가.”

“…….”

유선은 못 미더워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딱히 그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듯이.

“그리고 자기 몸뚱이 하나의 신변만 결심하면 각오가 끝나는 우리와 달리,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뒤따르는 자들이 있네. 리더로서 그들의 목숨까지도 고려를 해봐야 하는 게야. 무턱대고 각오를 다지기에는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너무 큰 것이지.”

그는 말을 하던 도중 잠시 말을 멈췄다.

고의적으로 말을 멈춘 그는, 장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야. 자네 역시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지 않나? 자네는 얼핏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막무가내처럼 보이지만, 내가 아는 자네는 그래도 승산 없는 싸움에는 임하지 않는 데 말이야.”

황태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들도 유선에게 집중되었다.

가만히 황태진을 바라보고 있던 유선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가 이래서 저 양반을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아닌 척하면서 속은 능글맞아요.”

유선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별 의욕 없는 녀석들은 걸러낸 다음에 말하려고 했었는데, 하여간…….”

“하하, 심술궂은 생각은 관두게나. 청랑과 질풍검의 말대로 정말로 의욕이 없는 녀석들은 애초에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일세. 그렇지 않나, 자네들?”

“그, 그렇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해외로 달아났겠지요. 하하하.”

‘교묘한 화술이로군.’

얼핏 보면 황태진의 말은 이 상황을 단순히 낙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일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녀석들 중에는 그냥 간만 좀 잡아보려는, 혹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될지 저울질해보기 위해서 나타난 녀석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순한 사실을 황태진이 눈치 채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태진은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고 간단하게나마 동의를 받아냄으로써, 다른 녀석들이 발을 빼기에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의 말에 대답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음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단 진호연이 했었던 말에 대해서 먼저 답을 하지. 이번 작전은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 ‘안전하다, 목숨은 보장할 수 있다.’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개죽음이 될 정도도 아니야.”

“…그렇게 믿을 만한 부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고은소님도, 레이크님도 참가하지 못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잠시 동안 뜸을 들였던 유선이 입을 열자 몇몇이 걱정과 의심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고은소? 레이크?’

누군지는 몰랐지만, 말을 꺼내는 사람의 목소리가 상당히 진중한 것으로 보아 꽤나 중요한 인물들인 듯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다음으로 이어진 유선의 말로 바로 해결되었다.

“너희가 망설이고 있는 것도 이해한다. 이 사태에 대응하기에는 아군의 전력이 불안하지 않겠느냐, 이거겠지. 고은소는 아직 독일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고, 레이크도 호주에서 실종된 이후 연락이 없다.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지금 상황에서 S급 2명이 빠진다는 건, 확실히 치명적인 전력 손실이지.”

딴 나라로 냅다 튀어버린 놈들도 몇 있고 말이야. 비교적 작은 목소리로 유선이 중얼거렸다.

'S급 헌터들이었나… S급 4명 중에 2명이 빠져버려서 그렇게 불안해했엇나 보군…‘

대한민국은 전체적으로 헌터들 수준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14명밖에 없는 S급 헌터 중에 무려 4명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으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S급 1위의 블러드 레이스 역시 대한민국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대한민국에 헌터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만큼 대우가 괜찮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강력한 헌터들이 많이 모여있다 보니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A급 헌터가 에이스로 뽑히는 국가의 몬스터 토벌 능력과 S급 헌터가 4명이나 있는 국가의 토벌 능력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며, 이는 헌터들의 생존률과도 직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S급 헌터 중에서 2명이 빠진 상태다. 게다가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게이트가 열린 이후 최대최악의 규모인 것이다.

불안한 전력으로 재앙에 맞서야만하니,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노파심에 미리 말해두겠지만, 다른 나라의 지원은 없다. 아직 정보가 퍼지진 않았겠지만 지금 전 세계에 규모들은 작지만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들이 열리고 있다. 걔네들은 자기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상황이야. 다만.”

그녀의 말에 다들 불안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직은 그것을 표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현재 상황은 결코 좋지 못했다. 과하게 표현하자면 절망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음으로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방금 전에 헌터 협회 측과 이야기를 끝마치고 왔다.”

“호오, 이야기를 끝냈다 함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황태진이 물었다.

“블러드 레이스와 워프 마스터를 비롯한 정예 헌터 10개 팀을 지원받기로 했다.”

“오오…….”

“이태현님과 크리스님이…….”

헌터 협회는 독일에 소재하고 있는 헌터들의 조직으로,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헌터 조직이었다.

그곳에는 수는 적지만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정예 헌터들이 모여 있으며, 몬스터를 토벌할 능력이 없는, 혹은 포기한 국가에 헌터 팀들을 대신 파견해준다. 유지비는 마석 거래소의 수수료와 각 국가가 헌터들에게서 걷는 세금에서 다시 일정량을 떼어가는 걸로 충당하므로,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나라들에게 마지막 희망인 셈이었다.

‘이태현… 블러드 레이스의 본명인가. 대한민국 출신이라는 게 사실인가보군.’

그리고 무엇보다 연맹 측에는 5명의 S급 헌터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S급 1위의 블러드 레이스였다. S급들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불리지만, 그는 그 S급 중에서도 차원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으로는 크로아티아에서 레드급 몬스터 9기를 혼자서 처리했다는 말이 있었으며, 노르웨이에 나타난 드래곤을 처리한 것도 그였다는 말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세계에 드래곤이 나타날 리는 없었기에 그 소문만큼은 거짓이겠지만, 내 경험상 아니 땐 굴뚝에서 이토록 뿌옇게 연기가 나오는 법은 없었다. 아마 그의 실력만큼은 진짜이리라. 나로서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터 협회의 지원팀이 온다는 말에 회의장 내에 조금 전까지 맴돌았던 불안한 기색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뭔가 희망찬 분위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소근거리는 중간중간 ‘저는 찬성입니다.’ ‘할 수 있겠는데?’와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국내에서 모을 수 있는 헌터 팀도 모두 모을 예정이다. 심지어 이 학교에 있는 학생 팀들까지도 말이야. 이거 때문에 영감탱이한테 따로 허락도 받아왔다.”

“허허… 학생들 까지도 말인가. 이거, 영 부끄러운데.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늙다리가 발을 빼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상황이로구만.”

황태진의 말에 아직까지도 말을 아끼고 있던 몇몇이 흠칫거렸다.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넣은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최전선에 선다. 이태현 그 녀석도 함께 나서겠지. S급 헌터 1위와 2위가 나란히 서서 전투에 임하는 거다. 그럼에도 결심이 서지 않는 녀석이라면, 딱히 붙잡을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문을 열고 나가. 잡지 않겠다.”

“…….”

“다만, 한 가지만 말해두도록 하지.”

유선은 말하던 도중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은 이 세계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곳이다.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는 건, 어차피 어디에 숨더라도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상당히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거였지만,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지극히 담백하고 또한 담담했다.

그녀의 말은 자만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 그 자체를 전달할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희 팔란의 감시자들은 서울에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래, 그래. 근데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고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냐? 그 말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네 묘자리 알아볼 때 아들딸한테나 말해둬라.”

청랑 김어수가 기합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선언하자, 이번에도 유선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적당히 답했다.

회의 초반부에 있었던 장면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지만, 그 다음 전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났다.

“…저 진호연. 두란 용병대의 대표로써 이 자리에서 참가를 선언합니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진호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선언을 기점으로, 그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우후죽순 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여 자기 차례가 늦을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뇌전의 창술사 김섬수. 시키시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 혈맹은 서울과 흥망을 함께할 것입니다.”

“팀 아라곤. 팀원 모두가 끝까지 싸울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면서 각자 한 마디씩을 선언하는, 마치 학창시절의 자기소개 시간 같은 모습이 잠시 동안 펼쳐졌다.

죄다 일어나서 한 마디씩을 마쳤을 때,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는 건 유선과 이소연, 그리고 현검 황태진 뿐이었다.

“하하하하, 아주 보기 좋구만. 이토록 호기로운 젊은이들이 많이 남아있다니. 아직 이 나라의 앞날은 창창하다는 뜻이겠지!!”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황태진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현검 황태진. 이젠 이명조차도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늙은 노인에 불과하네만, 후배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일 수야 없겠지. 오랜만에 검을 들어보도록 할까.”

말을 마친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른 이들과 어깨를 함께했다.

“이블아이, 빠질 거면 지금 말해라. 빼줄 테니.”

“언니도 참. 진짜로 보내줄 생각도 없으면서.”

이소연은 자리에 앉은 채로 어깨를 으쓱이면서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의 참가가 확정되었다. 유선은 내심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하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유선이 말했다.

“이제 회의를 시작해야 하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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