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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29화 (29/135)

29화

“아, 오랜만이다. 조원호.”

나는 그 말이 나를 향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 말에는 약간 친근한 어조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 학교 내에 나에게 그런 어조로 인사를 건넬 만한 사람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있던 미카엘라가 나를 툭툭 건드리며 눈치를 줬고, 나는 그제야 그 인사가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달았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그곳에 얼굴이 익숙한 남자가 살짝 무안해하는 표정을 짓고서 서있었다. 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그러네.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이세… 이세돌?”

“…이세형이다.”

녀석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뭐, 조금 무안하기는 하다만, 피차 서로에게 관심은 없던 입장이었으니 할 말은 없군. 하지만, 오늘은 할 말이 있다.”

이세형은 이쪽의 눈치를 살짝 살피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여태동안 너를 무시해왔던 것을 사과하지. 저번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네 덕분이었다.”

“아니, 내가 한 건 딱히 없는데…….”

“겸손하기까지 하군. 전혀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야.”

내가 손사래를 치자, 이세형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세형은 내가 겸손을 떤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나는 전투에 굉장히 설렁설렁 임했었기에, 저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어색했다.

‘하긴, 같은 팀원들끼리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일은 없겠지.’

나는 그의 사과와 칭찬을 적당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은 첫 번째 실습 이후로 처음으로 갖는, 실습 동아리 팀원들의 모임이었다.

원래 예정은 더 자주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던 것 같지만, 그 첫 번째 실습이 느닷없이 첫 번째 실전으로 번져버린 탓에 일정들이 뒤로 밀어져, 꽤 오랜만에 팀원들을 만나는 상황이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오며가며 스쳐 지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박서준은 이세형 다음으로 들어왔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가벼운 인사에 불과했지만, 그 역시 나에 대한 호의가 담겨있었다. 저번의 냉소적인 태도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 나도 그에게 목례를 보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 이봐.”

그리고 전민호는, 들어오자마자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툭 치고서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다가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왜?”

그렇게 험한 꼴을 눈앞에서 보여줘 놓고서 다시 시비를 걸려고 하는 걸까.

워낙 자존심이 센 녀석이었기에, 살짝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녀석은 본인과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내 앞에서 쭈뼛거리고 서있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미카엘라가 이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는, 그, 고마… 고… 고…….”

“고?”

“고… 고생했다!! 그래, 고생했어. 다들!! 하하하하!!!”

녀석은 얼굴을 붉힌 채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서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뭔가 개운치 않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름 인정받았다는 것 아니겠어?”

“뭐가?”

“쯧쯧,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어서야.”

옆에 앉아있는 미카엘라가 말했다.

“글쎄, 그럼 눈치가 많아서 그런 오해나 했었냐?”

“오해? 무슨 오해.”

“누가 그러더라. 내가 널 질투한다나 뭐라나.”

“억.”

그 한마디로 옆에서 핀잔을 주던 미카엘라를 단박에 침묵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꾸욱 쥔 채로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이 침대에 누워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불을 거하게 발로 찼을 상황이겠지.

사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변 분위기가 달라진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냉소적인 시선은 전부 사라져있었고, 미심쩍게 여기던 의심들도 사라져있었다. 약간 무거웠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벼운 인상으로 바뀌어있었다.

전민호 녀석은 워낙 재수 없는 녀석이었기에 설마 하긴 했었지만, 녀석도 공격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결국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원호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

굉장히 살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녀 이소연은 자연스러운, 그리고 잽싼 몸놀림으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녀석들의 목소리에는 호의가 담긴 친근함이 담겨있었다면, 이 목소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 거리낌 없는 느낌이랄까.

아니, 느낌만은 그 이상일지도.

“뭐, 뭐야. 왜이래. 뭐 잘못 먹었어?”

“에이, 왜 그래요 오빠~ 어제도 같이 수업 들었으면서.”

그녀는 의자를 이쪽으로 붙이면서 더더욱 달라붙었다. 솔직히 여자에 대한 내성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이소연은 갑자기 수업시간 때부터 친한 척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떨어지지?”

그 때, 왼쪽에 앉아있던 미카엘라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모르게 공격적인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왜요?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이소연 역시 공격적인 말투로 맞받아쳤다.

그 가운데에 앉아있던 나는, 상황이 느닷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 그야 원호의 친구로서 말하는 거지.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이 다가오는데 당연히 신경 쓰이는 게 친구의 도리 아니겠어?”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구요??”

“그래, 며칠 사이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달라붙는 여자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면 뭐야?”

“제가 언제 태도를 바꿨다고 그래욧!! 그리고 전 오빠한테 차갑게 군 적도 없거든요?”

“그래? 그렇다고 살갑게 굴었던 것도 아니었잖아.”

“아닌데요? 저희 원래부터 완전 친했는데요? 저번 실습에서도 단 둘이서 같이 앉아서 쉬고 막 그랬거든요? 언니 혹시 지금 저 견제하는 거에요?”

둘 사이에는 이제 약간의 에테르의 흐름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저기, 나 좀 일어나도 될까?”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앉은 채로 살벌한 기류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말없이 일어날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건지, 대답할 상황이 아닌 건지, 둘 다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 아닌데? 견제는 무슨 견제? 난 그냥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할 뿐이야.”

“그럼 제가 언니보다 오빠랑 친하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그렇죠, 오빠?”

“뭐? 대체 무슨 근거로 나보다 네가 더 친하다는 거지?”

미카엘라가 발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그쪽이 열심히 훈련하는 동안 저희는 그늘에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겼거든요!! 그리고 전투 중에 호흡도 딱딱 맞았거든요! 어제도 수업시간에 같이 앉았거든요!!”

‘데이트?’

그런 것도 데이트라면 이 세상에 데이트를 못해본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흥분한 모습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뭘 그런 것 가지고!! 나, 나는 원호 방에서 같이 밤을 보낸 적도 있거든!!”

“뭐??”

“???”

“…?”

순간 곳곳에서 의문사들이 터져 나오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의문사 중 하나에는 내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년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이세형과 박세준, 그리고 전민호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미카엘라를 몰아붙이던 이소연도 경악에 휩싸인 표정으로 아무말도 못한 채 나와 미카엘라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윽.”

저들이 지금 떠올리고 있을 생각과 오해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오해, 터무니없는 왜곡이라는 말인가!!!

‘뭐라고 말 좀 해, 제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말을 꺼낸 본인이, 그리고 여자 쪽이 오해를 푸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내가 사실을 말해봤자 그건 해명이 아니라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정작 이를 해명해야할 미카엘라는 뒤늦게 자신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원호, 저 녀석…….”

“그렇게 안 봤었는데, 대단하군. 미카엘라와…….”

“…흠.”

남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중간에 감탄과 경의가 적당히 섞여있기는 했지만, 그건 나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의 생각은 오해일 뿐이고, 게다가 원치 않는 오해였기 때문이다. 그냥 억울할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미카엘라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해명은커녕 여전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나라도 해명을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결심을 했을 때였다.

“잠깐, 이건 모두 오ㅎ…….”

드르륵!! 텅.

그 순간, 경쾌한 소리를 울리며 앞 문이 열렸다.

“흥, 이번에는 제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 만족 하냐, 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힘찬 기세로 문을 열고 나타난 유선은, 약속 시간에 맞춰 제 때 나타난다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내용으로 생색을 내면서 들어왔다.

“잠깐만, 얘들아.”

유선이 들어오자,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들은 정면을 향했다. 내가 급하게 말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해명할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잠깐만!! 얘들아!!”

“거기, 잡담은 쉬는 시간에 하라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안 가르쳐주던?”

나는 목청을 높여서라도 오해를 풀 기회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앞에 선 유선이 직접 나를 지목하며 침묵시켰다.

‘저 양반은… 정말로 도움이 안 되는구나!!!!“

평소에는 약속시간의 30분 후에 도착하는 걸 정상으로 여기던 저 양반이, 왜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이런단 말인가.

나는 결국 억울함을 누른 채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방황하는 이 억울함을 어디에 토해야 한단 말인가.

어디 적당한 동네 뒷산이라도 가서 사자후라도 시원하게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같은 날 납치를 하란 말이야…….’

며칠 전의 강제 소환이라도 다시 벌어졌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 * *

“오늘은 소개할 사람이 있다.”

유선이 손짓을 하자, 열려있던 문 너머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들어온 문을 조용히 닫은 그녀는, 느린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와 유선의 옆에 멈춰 섰다.

2학년의 김세율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의 1년 선배인 김세율이라고 합니다.”

“김세율?”

“설마, 그 기린아 김세율??”

“왜 우리 학교에…….”

이소연과 나를 제외한 4명이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뭐, 워낙 유명하긴 했으니까.’

기린아 김세율.

그녀는 한 때 엄청난 관심을 끌어 모았던 천재 헌터였으며, 천재라는 말에 걸맞는 실력을 갖고 있는 헌터였다. 아직 B급 헌터였으면서도 기린아라는 이명(異名)을 받은 것만 봐도 그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터 생활을 그만두고 모습을 감추고서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의 활약은 그 정도의 세월에 잊혀질 정도로 미적지근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김세율은 약간 난감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능력 면에서도, 그리고 심리적인 면에서도.

약간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1학년 실습동아리에 멘토로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세율은 잔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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