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젠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회로를 진정시키고 잠시 휴식을 취하자 고통은 가라앉았지만, 왠지 모를 답답함이 남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누군가 돌이라도 얹어놓은 듯한 갑갑한 기분.
“후우…….”
‘오늘 잠은 다 잤구나.’
목이라도 축일 겸 물이나 마시려고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마실 건 들어있지 않았다. 문득 어젯밤에도 물 좀 마시고 자려다가 물이 없어 그냥 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머피의 법칙을 탓해야 하는가, 나의 붕어대가리를 탓해야 하는가.
이번에 한해서는 후자 쪽을 탓하는 것이 맞다는 걸 인정하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여기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보다는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는 게 더 낫겠지.
그게 이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낮은 이제 완전히 봄 날씨가 됐지만, 밤은 아직도 쌀쌀했다.
문을 열고 밖에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쌀쌀한 공기에 땀이 식는 것이 꽤나 기분 좋았지만, 반 정도 오니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좀 걸치고 나올 걸 그랬나.’
하지만 외투 하나 걸치자고 다시 온 길을 돌아가는 건 또 귀찮은 일이었음으로, 급한 대로 대충 에테르를 둘러서 몸을 덥혔다.
천천히 회로를 맴도는 에테르는 폭주의 후유증에도 좋은 재활운동이 되어주었다.
겨우 진정시킨 회로를 다시 자극시키는 꼴이 되어 곳곳이 욱신거렸지만, 곳곳에 막혀있던 회로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서는 골목으로 꺾으려 할 때였다.
“엑.”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기 직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마주쳤다.
“사람을 보고서 ‘엑’은 좀 그렇지 않냐??”
금발의 소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미카엘라였다.
미카엘라는 평소의 복장과 달리 간편한 옷에 패딩조끼를 걸친 상태였다.
적당하게 뒤로 묶어 내린 금발 포니테일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기는 웬일이냐?”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는데.”
“그야 당연히 편의점 가려고 그러지. 바보냐?”
“그럼 나도 편의점 가려고 여기 왔겠지. 바보지?”
“…그렇구만.”
딱히 더 할 말은 없었기에, 나는 말없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카엘라 역시 별로 할 말은 없었는지, 내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편의점에 들어가고 나서도 별 일은 없었다.
나는 음료 칸에서 마실 걸 골랐고, 그녀는 그녀대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평소 그녀 성격대로라면 뭐라 참견이라도 걸어올 줄 알았지만,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뭐 기분이라도 안 좋나?’
어쨌거나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7400원입니다.”
카운터에 내려놓은 물건들을 찍어본 알바가 말했다.
“그리고 봉지도 하나 주세… 어라??”
계산을 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당연히 있어야할 것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어, 어라??”
다급하게 다른 주머니들에도 손을 집어넣고서 뒤져봤다.
하지만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주머니들을 체크.
그제야 전투복 주머니에 지갑을 넣어둔 채로 벗어뒀던 것이 떠올랐다.
“손님??”
이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갑은 전장에서의 탄창과도 같은 것.
지갑을 두고 온 지금의 나에겐, 지금 당장의 갈증을 해소할 자격(7400원)조차 없었다.
나는 결국 방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 정도 왔을 때 외투를 걸치러 다시 돌아갈 걸 그랬다.
‘아니, 그랬다면 지갑은 둔 채로 외투만 걸치고 나왔겠지.’
오다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냥 집에 두고 왔을 뿐인 게 그나마 다행일까.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계산대에 올려놓았던 페트병들을 다시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이것들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갑자기 끼어든 미카엘라가 자기 물건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야, 네가 갑자기 왜?”
“싫으면 말고. 그냥 따로 계산 해주세요.”
“아니, 잠깐만.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럼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
미카엘라가 이쪽을 째려보며 쏴붙이듯이 말했다.
“…고맙다는 거죠, 예.”
그녀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살짝 미소를 짓고서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같이 담아드릴까요?”
계산을 마치고서 사이즈가 큰 봉지를 집어든 점원이 물었다.
“그야 당연히 따로―”
“같이 담아 주세요.”
나의 말을 도중에 자르고서 미카엘라가 말했다.
“…대체 왜??”
“내가 산 거잖아.”
점원은 나와 미카엘라를 한 번씩 살펴보더니, 그녀의 말에 따라 한 봉지에 같이 담기 시작했다. 둘 중 누가 실세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리다니, 눈치가 빠른 점원이로고.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미카엘라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자.”
“내꺼 꺼내가라고?”
“뭐래, 들라고.”
미카엘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다 준다고?”
“그럴 리가 있겠냐. 들고 따라오라고, 이 멍청아.”
“설마, 네 방 앞까지??”
“너한테 그런 신사적인 에스코트는 바라지도 않아. 돈 값이나 하라고.”
“하나 알려주지. 사람이 협상을 할 때는 말이야. 그런 고압적인 태도보다는―”
“싫으면 집에 가서 지갑 챙기고 다시 나오든가. 아~ 물도 떨어져가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
“…갑시다, 빨리.”
내가 손을 내밀자, 손목에 봉지를 걸어놓고서 미카엘라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두 걸음 정도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하아아…….’
딱히 누구와 어울리고 싶은 기분은 아닌데.
한숨이 절로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악몽에서 깼을 때의 찝찝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어, 컨디션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냥 어디 벤치 같은 데라도 앉아서 조용히 달이라도 쳐다보고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미카엘라도 딱히 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 년은 진짜 날 그냥 짐꾼으로 부리려고?’
이 괘씸죄에 대한 형벌을 무엇으로 내려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나 싫어하지??”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서,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정면을 뚫고 날카롭게 꽂혀 들어오는 강속구!!
기습적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직구에 잠시 생각이 멎었다.
그건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간의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싫어…하나??’
“하지만, 이해할 수 있어.”
아직 내 대답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그녀는 자기 혼자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이해할 수 있다고?
대체 뭘.
자기가 여태 한 짓들이 어느 정도 민폐인지를 알고 있기에 이해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당하고도 참을만한 성인군자가 아님을 이해한다는 뜻인가?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내가 오지만 않았다면 네가 최고였을 테니까. 뒤늦게 나타난 누군가에게 정상을 빼앗기는 기분, 그 상실감은 나도 잘 알아.”
약간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뭐,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했지. 성실하게 나오던 훈련도 빠지고, 수업에서는 졸고. 무슨 사춘기 온 중학생 같은 반항이나 하고 말이야.”
“성실…?”
내가 훈련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그런 역사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나? 혹시 평행세계?
아, 설마 학기 초에 반강제적으로 훈련장에 끌려갔었던 걸 말하는 건가.
“그런데 어떤 때는 갑자기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고, 혼자 맨손으로 고블린들을 처리하기도 하고. 애매한 녀석이었지.”
“아, 그야 뭐…….”
그런 적도 있었지.
그게 실수로 보여진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확실히 알았어.”
그녀는 다시 뒤로 돌아 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강해. 에테르와 전투 능력은 나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그 상황 속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팀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너밖에 없었어.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 어쩌면, 팀 전체가 전멸했을 지도.”
“…?”
“그러니까, 어, 내 말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조금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넌 팀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풀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알겠어??”
“에?”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풉.”
그리고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푸하하하하!!”
터져나온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뭐, 뭐야. 왜 웃어???”
“큭큭, 야, 그럼 내가 널 질투라도 한다는 거야?”
“…그럼 아니야?”
그녀는 당황스러워보였다. 진정되어가던 웃음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킥킥킥, 아, 죽겠네. 그리고 내가 풀죽어있다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야, 전투 끝나고 다 좋아 날뛰는데 너 혼자서만 축 처져있었잖아? 그리고 아까 편의점으로 걸어올 때도…….”
“아, 그게 그렇게. 큭큭.”
전투가 끝난 뒤에 있었던 생각지 못한 만남으로, 그 때는 확실히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아마 그걸 말하는 것이리라.
편의점으로 걸어오던 중에는 내가 생각해봐도 축 처져있던 상태였다.
단지 그녀가 생각한 그 이유가 너무 엉뚱했을 뿐.
“뭐, 뭐야, 남이 기껏 신경써줬더니.”
자신이 헛다리를 짚은 것을 깨달았는지 미카엘라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팔짱을 끼고서 분하다는 듯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미안. 근데―”
“됐어. 갈 거야. 넌 돌아가든가 말든가.”
미카엘라는 내 쪽으로 다가와 봉지에서 캔커피 하나를 빼들더니, 거의 뛰는 듯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야, 네 꺼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아 됐어. 잘못 산 것들이니까 네가 다 쳐먹던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외쳤다.
봉지를 들춰보니 피로회복제와 비타민 음료가 3병 정도씩 들어있었다.
피식.
괜히 가슴이 흐뭇해지고, 얼굴에 실웃음이 떠올랐다.
“야!! 잘 마실게!!”
하지만 미카엘라는 대답이 없었다.
안 들린 걸까. 안 들릴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닌데.
미카엘라가 멀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봉지 안의 베타 500을 하나 꺼내들고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생각만큼 멀리 오지는 않았다.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느긋하게 걷기로 했다.
가슴 속의 답답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 *
“이 새벽에 어딜 나갔다 오는 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의자 위에 여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뭔가 굉장히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건 또 뭐야.’
내가 혹시 여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가져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단침입을 당한 여자의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했기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밖으로 나가 방문을 확인해보았다.
여자 기숙사의 방문은 보라색, 남자 기숙사의 방문은 남청색 페인팅이었다.
내가 확인한 문은 다행히도 남청색이었으며, 그리고 412호였다. 내 방인 것이 확실했다.
“여기는 그쪽이 있을 만한 시간도, 장소도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대체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김세율 씨.”
그녀와는 초면이 아니라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어제 슬라임 자이언트와의 전투에서 만났었던, 패닉상태에 빠진 채 마구잡이로 전격을 뿜어내던 헌터가 바로 그녀, 김세율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나를 마왕 살해자, 구원자 아크라고 불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