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24화 (24/135)

24화

과거, 그리고 악몽

그녀는 아직도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폭주하던 에테르는 진정되기 시작했고, 비명 또한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사람…? 사람, 사람이에요??”

“이제 좀 정신이 듭니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들어 올렸던 손을 조용히 내린 다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쪽을 바라봤다.

“…….”

“…?”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 상태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혹시 나한테 뺨 맞은 걸 기억하고 있는 건가?’

하긴, 내가 때린 뺨이 아직 빨갛게 물들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여기 아직도 탄내를 풍기고 있는 앞머리를 보라!!

내 행동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당방위였다.

“아…크?”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이었다.

아크, 그녀가 말한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어째서 그 이름을?

하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방금 전까지도 패닉에 빠져있던 사람이다. 즉, 아직도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아는 사람 중에 아크라는 사람이 있고, 나를 그 사람과 착각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어딘가에서 읽었던 만화 주인공과 착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아크라는 이름은 만화나 소설에서 꽤나 흔한 이름이었다. 아크가 제목인 판타지 소설도 있지 않은가.

방금 전까지 극단적인 패닉 상태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런 착란 증세를 보일 수 있었다.

‘이 아가씨, 아무래도 평소에 만화를 너무 많이 보는 모양이군.’

애써 그렇게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말은 결정적이었다.

“마왕 살해자, 구원자 아크…??”

그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이 나를 가리키는 이름.

그리고 앞으로 불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던 이름.

다른 세계에서 불렸던, 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 * *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

유선이 보채자, 이소연이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자신도 모른다는 제스처였다.

유선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졌다.

“아니, 그렇게 자기 혼자 뒤로 빠져나가더니 건물 위로 훌쩍 뛰어오르고 나서 갑자기 사라졌다니까요??”

이소연의 당당한 목소리에, 유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널 보냈던 거잖아, 이 정신 나간 월급 도둑년아.”

“이런 말하면 되게 재수 없게 보일 거 아는데, 제가 못 보는 건 누굴 데려왔어도 못 보는 거에요. 그리고 유선 언니는 처음에 에스퍼인지 아닌지도 헷갈렸다면서요? 왜 나한테만 그래요.”

“그거 누구한테 들었냐.”

“그건 류―”

“커흠.”

테이블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서있던 류환이 헛기침으로 이소연의 말을 막았다.

“음,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유선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환을 올려다보자, 환은 태연한 척 품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했다.

불안하게 떨리고 있을 게 뻔한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그의 굳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까지 감춰주지는 못했다.

“…뭐, 입단속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말이야.”

유선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류환은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보고부터 마저 듣도록 할까.”

“나머지는 보고서에 다 적혀있는데요??”

이소연이 귀찮다는 말투로 답했다.

“보고서 내는 거랑 보고는 별도인 거 모르냐? 그리고 난 보고서 안 읽어.”

“우와아… 당당하게 말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유선의 뻔뻔한 대답에 이소연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류환 오빠만 고생이네요.”

그 말에 류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선이 쏘아낸 충격파에 복부를 얻어맞고 중저음의 낮은 신음소리를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래서, 그 녀석 능력이 대체 뭐야?”

유선이 묻자, 이소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후, 잠시 고민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일단, 에테르량이 엄청나요. 측정 결과였던 5000Et는 초보자치고는 높은 수치지만, 납득할 수 있는 수치죠. 하지만 그건 그냥 평소상태. 아마 활성화조차 하지 않았을 때의 기본 수준일거에요.”

“그럼? 한 1만 정도 되냐?”

“적당히 어림잡아도… 2만은 넘겠네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2만이라는 수치는 어디까지나 그가 쏘아낸 빛의 창의 출력만으로 추정한 결과였다.

그녀도 처음 보는 마법이었던 그 빛의 창은 옐로급의, 그것도 무식하게 질긴 생명력으로 유명한 슬라임 자이언트를 단번에 즉사 직전까지 몰아 붙였다.

게다가 모든 일이 끝나고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에테르는 넉넉하게 남아있는 상태였고 회로도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런 마법을 사용하고도 여유분이 상당히 남는다는 뜻이었다.

이소연의 말에 유선은 미소를 지었다.

“하,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놈인데? 그래서, 능력은?”

“일단 확인된 건… 에테르 서포팅과 간단한 버프들,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자기강화와 원거리 포격능력이네요. 아무래도 원거리 딜링과 서포트에 특화된 에스퍼가 아닐까요??”

“딜링에 서포트 능력까지… 각성능력이 최소 2개는 열려있다는 뜻이구만. A랭크, 아니 S랭크도 비벼볼만한 녀석인가.”

유선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소연은 문득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전투 중에 몰래 조원호를 스캔해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주변 범위 내에서 에테르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정 대상에 집중해서 스캔을 하면, 대상의 에테르량과 각성 능력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조원호는 유선이 그토록 강조했었던 인물이었기에, 그를 스캔하면서 이소연은 나름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에테르 코어는 완전하게 가려져있어, 에테르량도 그 능력도 엿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던 것은 조원호가 자신의 스캔을 차단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대신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옵저버로써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S급 헌터의 위치까지 도달한 그녀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유선 언니, 조원호랑 기아스를 맺었다고 했었죠??”

“그랬지. 그런 거라도 안 해놓으면 일하는 시늉도 안 할 놈이라서 말이야.”

“그럼, 기아스는 몇 개나…?”

“뭐?”

이소연이 조심스레 꺼낸 말에, 유선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일 하나 시키겠다고 기아스를 몇 개씩이나 걸어놓는 미친년은 아니에요. 1개만 걸었지, 당연히.”

“하하하, 역시 그렇겠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아스의 숫자는 적을수록 좋다.

기아스가 늘어나다보면 기아스끼리 모순이 생겨나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하나가 깨져버렸을 때 연쇄작용으로 줄줄이 터져나갈 수도 있었다.

기아스가 깨졌을 때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복수의 기아스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이소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봤던 그 광경을 여기서 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하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이었다. 타인의 기아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기본적인 금기중의 하나였다.

이소연은 테이블에 턱을 괴면서, 그 끔찍했던 광경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의 코어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아스들이 거미줄처럼 얽매여 있었다.

* * *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결계가 펼쳐진 지도 벌써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선생님, 제발요…….”

눈앞에 펼쳐진 결계는 선생님만의 전장 봉인 결계였다.

일정 공간을 압축시켜, 범위 내의 적들과 자신을 같이 가둬 외부와 단절시키는 결계.

일단 결계를 펼치면, 안에 갇힌 적들을 전멸시키거나 시전자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절대계약의 결계이자 선생님만의 고유 마법이었다.

그 결계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력하게 그 옆에 앉은 채로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계를 깨트려보기 위해 발악해봤었지만, 쓸데없는 짓은 쓸데없는 짓으로 끝났다.

무리한 억지에 검은 부러져버렸고, 두 주먹은 살갗이 벗겨진 채로 피가 맺혀있었다.

문득 숲에 두고 온 상단이 떠올랐다. 수도로 이동하는 동안 잠시 동행하기로 했었던, 인근 도시에 있는 작은 상업길드의 상단이었다.

마족 무리와 맞닥뜨렸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이들 상단의 호위를 맡긴 후 눈앞의 결계를 펼쳐내어 마족들의 발을 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상단을 뒤로한 채로 이곳으로 돌아와 버렸다.

미다린 숲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아스틴 대로가 나온다.

내가 없더라도 상단은 무사히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건 변명이다.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상단을 두고 온 것은 단순한 방치에 불과했으며,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결국 며칠 전에 만난 타인들보다 선생님 한 명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힘없는 민간인들의 목숨보다는 선생님 한 명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이것이 진실이었다.

코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코어를 중심으로 에테르 회로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나에게 걸어뒀었던 기아스들은 지금 당장 상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약자들을 지킨다.」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킨다.」

「나는 이 세계의 영웅이 된다.」

자기 속박의 능력, 셀프 기아스(Self-Geass).

자기 스스로에게 기아스를 걸 수 있는 능력.

셀프 기아스로 걸린 기아스는,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기아스와 관련된 행동을 할 때 능력을 극대화시켜주는 일종의 자기강화 수단이었다.

제멋대로 걸어뒀었던 기아스들은 나약했던 내가 여태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의 코어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티다간 코어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낸 후,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계약의 룬을 맺었다.

“선생님의 곁을 지킨다.”

새로운 기아스가 코어에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같은 계약의 룬을 연속으로 2번.

서로 상반되는 기아스가 맞물리면서 코어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딴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건 오히려 내 목을 조이는, 일종의 시한폭탄을 떠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이곳에 남아있고 싶었다.

불길한 예감이 멈추지 않았다. 이토록 강렬한 예감은 그다지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이 불길한 예감일 때는 더더욱.

‘제발 이번만큼은 이 예감이 빗나가기를.’

원래 세계에서도 믿지 않았던 신의 이름을 되뇌이며 기도했다.

기도방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두 손을 감싸 쥔 채 되뇌일 뿐이었다. 이 목소리가 신에게 닿을 것이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번쩍.

그 때, 눈앞의 황금빛 막이 사라지며 그곳에서 몬스터들의 시체가 쏟아져 나왔다.

공간왜곡으로 결계 안에 압축되어 들어갔었던 몬스터들이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시체와 핏물에 파묻혀 기분 나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붉게 물든 평원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선생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선생님과 목이 떨어져나간 오우거. 그리고―

오우거의 키와도 비슷할 것 같은 거대한 창이 그녀를 꿰뚫은 채 땅바닥에 꽂혀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