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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23화 (23/135)

23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아까처럼 잔챙이 몬스터 몇 마리만 감지되고 있을 뿐.

‘은신계열 몬스터인가?’

아니, 아무리 내가 지금 감지망을 제대로 펼치지 않은 상태라고해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힘을 감추려면 최소 상급 마족은 돼야했다.

그리고 이 헌터의 기운이 상당히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상급 마족한테 20분이나 버틸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 마족이 건너온 적이 있던가?

아니, 기억 상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이 상급 마족이 튀어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그 오만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들이 말이다.

‘그것 참 사람 짜증나게 하네.’

에테르를 다리에 좀 더 집중시키고 속도를 올렸다.

만약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간발의 차로 늦어버렸다.’ 같은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일단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도착은 하고 봐야겠지.’

* * *

미카엘라의 에테르 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선명했던 황금빛은 그 기색을 잃었다.

남아있는 에테르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이소연의 에테르 공급은 안정적이었고, 또한 뛰어났다. 조원호가 서포터를 맡았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에테르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지쳐가고 있었다.

20분 넘게 이어진 전투는 그녀의 체력을 앗아갔다.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당당했지만, 처음의 기세는 한 층 꺾인 상태였다. 역동적이던 그녀의 움직임도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괴물과의 전투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 상당한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게다가 이 괴물은 피해를 입혀봤자 순식간에 재생해버린다. 머리통을 날려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핵은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 파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이쪽은 지칠 대로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괴물은 처음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부조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훨씬 능숙해진 몸놀림으로 이쪽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허무함과 절망감이 부풀어 올랐다.

지쳐있는 몸은 절망에 맞서기엔 너무나 약해져있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혹시나, 혹시나 말이야. 조원호 그 자식…….”

“거기까지다. 더는 말하지 마.”

전민호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을 이세형이 지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 말은 이 엿 같은 상황을 더 엿 같게 만들 뿐이다.”

말을 마친 이세형은 다시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살갗이 벗겨져 핏물이 맺혀있었다. 맺혀있던 핏방울이 시위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번에도 이 행동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은 반복된 행동이다.

하지만 조원호가 말한 지원사격이 언제쯤 올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공격은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위를 당기고, 화살에 에테르를 담아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저 괴물의 핵을 꿰뚫기에 충분한 만큼의 에테르를.

이 계획의 마무리는 자신의 저격이었다. 이른바 피니셔의 역할인 것이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더라도, 자신의 잠깐 동안의 나약함 때문에 여태동안 기울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런 걸 자신에게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세형은 다시 한 번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 때였다.

[옵니다!! 엄청 빨라요!!]

[뭐가―]

다시 되묻는 그 무전이 끝나기도 전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백색의 창은 슬라임 자이언트의 몸통에 작렬했다. 주변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크무어어―”

슬라임 자이언트는 고토으이 비명을 내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그 몸통은 빛의 창이 꿰뚫은 부분을 중심으로 갈가리 찢어발겨져 있었다.

찢어발겨진 내부에 흐릿하게 핵이 보이고 있었다. 붉은빛의 점액 덩어리가 여전히 핵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얼마 남지 않아 그 안쪽이 희미하게 비쳐보였다.

슬라임 자이언트는 핵을 지키려는 듯이 서둘러 재생을 시작했다. 핵을 둘러싼 점액 덩어리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걸 냅둘 것 같냐!!”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화염구가 줄지어 쏟아졌다.

전민호는 여태동안 모아뒀던 에테르를 남김없이 쏟아 붓고 있었다.

잠시 동안만 이어질 순간적인 화력에 불과했지만, 재생력을 웃도는 화력에 핵을 둘러싼 점액 덩어리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그어어어어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슬라임 자이언트가 쏟아지는 화염구를 향해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있었던 왼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은 핵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방패모양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황금빛을 뿜어내는 에테르의 참격이 그 팔뚝을 갈랐다. 괴물이 다급하게 만들어낸 방패는 허무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미카엘라는 검을 땅에 박아놓은 채 거기에 몸을 기대고 섰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였지만,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승리를 직감한 미소였다.

머지않아 타오르는 점액 사이로 조금씩 보랏빛의 핵이 드러나고 있었다. 핵을 중심으로 점액이 빠르게 재생되고는 있었지만, 쏟아지는 화력으로부터 핵을 지켜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라.”

누군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그건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환청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곧 모두의 목소리가 되었다.

“가라―!!!”

이세형은 그 때까지 재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에테르를 가득 머금은 채 시위를 떠난 화살은, 곧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보랏빛의 핵을 단숨에 꿰뚫었다.

* * *

“음…….”

나는 궁니르를 쏘아낸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잘 됐나보군.”

일은 잘 풀린 것 같았다.

더 이상 슬라임 자이언트의 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오랜만에 큰 마법을 쓴 여파인지 두 손이 저려왔다.

신성계 최상위 공격 마법 중 하나인 궁니르(Gungnir).

소모되는 에테르의 효율은 바닥을 기었지만, 대신 그 위력만큼은 손에 꼽히는 마법이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위력도 눈에 띄게 감소하는 마법이라 조금 걱정은 됐었지만, 슬라임 자이언트 상대로는 이 거리에서도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효율적인 마법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쓸 줄 아는 공격마법은 얼마 없고, 그 중에서도 이런 장거리 저격에 쓸만한 건 그나마 궁니르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자 선택이었다. 그 증거로 나를 책망하고 있던 유선의 기아스가 만족하고서 다시 잠들어있었다. 성실히 일했다는 뜻이겠지.

“자, 그럼…….”

고개를 돌리자, 그 의문의 헌터는 아직도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실수로 요새도시에 들어온 민간인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아이처럼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건 헌터학과에서 지급하는 전투복이었으며, 주변에는 상당한 양의 에테르가 마구잡이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내가 찾아온 헌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 건물 주변에서 고블린 대여섯 마리가 서성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건 상당히 이상한 모습이었다.

고블린은 자기보다 강한 자의 기운을 느끼는 것만은 귀신같아서, 자기보다 강한 녀석이 나타나면 곧바로 도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무리가 전멸당할 위험이 있다면 곧바로 꽁무니를 빼버리는 것이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이렇게 에테르 기운이 풀풀 새어나오는 곳 주변에 머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건물 안에서 뇌격이 뿜어져 나왔다.

뇌격은 고블린 따위는 한 개 부대도 한 번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위력이었지만, 뇌격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무의미하게 가르고 사라졌다.

“케륵, 케륵케륵.”

뇌격이 사라지자, 고블린들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마치 뭔가를 갉아대는 듯한 그들 특유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신체 강화를 다리에 집중시키고, 높이 도약하여 단숨에 목적지에 착지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당연히 고블린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맨손으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훈련용으로 지급받은 싸구려 검이라도 고블린들을 처리하기에는 충분했다. 에테르도 두르지 않은 검에 고블린들은 슥슥 잘려나갔다.

상황을 정리한 후,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방금 전의 뇌격이 다시 한 번 뿜어져 나왔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피하긴 했으나, 스친 어깨가 그을려있었다. 직격으로 맞았다면 순간적으로 기절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려주세요―, 살려줘요, 제발, 누군가…….”

그리고 건물 안쪽 구석에서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렇게 된 거였구만…….’

고블린들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알아채는 것 이상으로, 상처입거나 공포에 빠진 상대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먹잇감은 집요하게 뒤를 쫓았다.

몬스터에 대한 트라우마.

만약 그녀가 저리 떨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 이런 실력자가 신입생 실습 호위 같은 사소한 임무에 투입된 것도, 이렇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저격이나 하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됐다.

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불러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다가가면 날카롭게 전격을 뿜어냈다.

그 덕분에 이런 장거리 저격은 해본 적도, 할 줄도 모르는 내가 급한 대로 궁니르를 쏘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았지.’

저격 거리는 3km를 조금 넘는 거리였다. 저격에 숙달된 에스퍼라면 모를까, 평소 근접전을 선호하는 내가 명중을 확신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내가 궁니르를 쏜 것은 행운에 성공을 맡긴 일종의 도박이었다.

뭐, 잘됐으면 장땡이다.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며 고개를 돌려 아직 남아있는 문제를 바라봤다.

일이 끝나고 나서도 구석에 박혀있는 그녀는 여전히 똑같은 상태였다.

‘지가 무슨 피카츄라도 되냐고, 진짜.’

나는 전기 저항에 배리어까지 두르고 나서야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요.”

“흐, 으흑, 오지마, 오지마아!!”

웅크린 그녀를 중심으로 전격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

휘몰아치는 전격의 폭풍은 나에게 직격으로, 그것도 바로 앞에서 터져나왔다.

‘…이건 피카츄보다 쌘 것 같은데??’

나름의 대비를 해둔 덕분에 별 피해는 없었지만, 살짝 그슬린 앞머리에서 탄내가 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방금 걸로 두 번 정도는 넉넉하게 죽고도 남았으리라.

“이봐요, 그러니까 정신 좀―”

“끼야아아악!!”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전격을 뿜어내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었다.

“차리라고, 차리라고.”

그리고 난 그 전에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 대 내리쳤다.

패닉상태에 빠진 연약한 사람에게 폭력이라니!! 그것도 여자한테!!

그런 죄책감과 망설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야생의 피카츄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대로 그녀를 두고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때로는 이런 물리치료가 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 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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