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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21화 (21/135)

21화

땅 위에 두 다리로 일어선 슬라임 자이언트는, 손에 잡힌 김주언을 몇 번 휘저어보다가 싫증이라도 난 듯이 집어 던졌다.

“안 돼!!”

김주언이 떨어지기 바로 직전, 미카엘라가 낙하지점에 빠르게 세 겹의 보호막을 펼쳤다.

그녀의 능력인 에어리얼 쉴드였다.

두 겹의 보호막을 단숨에 깨트리고 마지막 남은 보호막에서야 튕겨 나온 김주언을 박세준이 블링크로 공중에서 붙잡고서 착지했다.

김주언은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상태로 기절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에 결코 좋은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만,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어디인가.

하지만 그가 살아있다고 해서 이 상황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슬라임 자이언트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갓난아기가 걸음마를 내딛는 것처럼 엉성한 모습이었지만, 엄청난 크기의 질량 덩어리가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내가 처리해야 되나…….’

일반적으로 ‘만약에’라는 수식어가 붙는 조건들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다.

만약의 사태의 ‘만약’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萬若)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버렸다.

어떤 놈이 슬라임을 무턱대고 증식시켜 버렸고,

어떤 놈은 그 한복판에다가 어줍잖은 기술을 사용해 슬라임들의 생존본능을 자극시켜버렸다.

이 무슨 머피의 법칙.

이 무슨 빅 엿.

사실 저기 자빠져있는 김주언이라는 놈은 유선이 일부러 보낸 녀석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 때, 뒤쪽에서 이쪽을 향해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엄청난 기세로 전장을 가로지른 뇌전의 창은 단숨에 슬라임 자이언트를 꿰뚫었다.

서툴게 걸음마를 내딛던 거인은 그 일격에 몸통의 절반이 날아가면서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까 확인했었던 그 헌터인가.’

과연 그토록 강렬했던 기운에 어울리는 화끈한 일격이었지만, 슬라임 자이언트를 죽이기엔 부족했다.

뇌전의 창은 녀석의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놨지만 핵에 닿지는 못했다.

슬라임의 특징은 엄청난 재생력. 슬라임 자이언트는 벌써 재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엔 충분한 일격이었다.

“자리에서 이탈한다!! 이소연, 루트 확보해!!”

“탈출 루트는 A-02라인, 방호시설 작동 허가 대기 중이에요. 데이터는 각자에게 송신할게요.”

처음으로 보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이소연이 외쳤다.

그녀는 사방에 띄워놓은 홀로그램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처리해내고 있었다.

‘할 때는 하는 녀석인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패닉에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실전을 겪어본 적이 없는 녀석들이다. 기껏해봤자 MT때 고블린 몇마리 죽여본 것이 전부이리라.

특히 가장 앞쪽에 있었던 전민호는 다리에 힘이라도 풀렸는지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재생하고 있는 슬라임 자이언트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슬라임 자이언트는 재생을 마치고서 다시 두 다리로 일어섰다.

“야!! 피해!!”

슬라임 자이언트는 화라도 난듯이 주변을 마구잡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주위를 내리치는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였지만, 그 주먹에 담긴 어마어마한 질량의 폭력은 내리 찍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어, 악, 으, 으아아아!!”

전민호는 그제야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듯 다급히 도망치려했지만, 다리라도 꼬인 것인지 그대로 바닥에 자빠져버렸다.

그리고 일어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 비명소리를 들은 걸까, 슬라임 자이언트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다음 일격을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번 공격은 전민호에게 직격으로 내리 꽂힌다.

그리고 전민호가 이걸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직접 움직여야하나…….’

유선의 기아스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방관하고 있는 건 계약에 위배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구할 것인가.

남몰래 저 괴물을 날려버린다던가 하는 만화 주인공 같은 일은 불가능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직접 나선다면 내가 힘을 감춰왔다는 사실이 들통날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슬라임 자이언트는 움직이고 있었다.

‘…미카엘라?’

우선 전민호를 빼내고 봐야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무렵,

미카엘라는 어느새 슬라임 자이언트의 앞을 가로막고서, 주변 공기가 일렁일 정도로 선명한 황금빛의 에테르를 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듯한, 그야말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건 압도적인 폭력을 앞에 둔 약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겁에 질린 풋내기 초보자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곧 그녀를 내려칠 거대한 힘 앞에서 그 당당함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 당당한 기세와 용기만큼은 영웅의 것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지만,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기세는 허세에 불과하다.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용기는 오만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눈앞에 닥치고 있는 저 일격만으로도 산산히 부서질 정도로 위태롭고 빈약한 것. 그녀에게는 그것을 지탱할만한 힘이 없었다.

‘짐짝이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군…….’

곧바로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두 다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헤이스트를 준비했다.

하지만 슬라임 자이언트의 일격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가 슬라임 자이언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 증거로 산산조각이 난 보호막 파편들이 황금빛을 뿌리며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보호막은 그 일격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슬라임 자이언트의 주먹은 맨 땅에 꽂혔고,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 서있었다.

‘저걸… 패링(Parrying)해냈어…??’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쳐내거나 빗겨나가게 함으로써 공격을 뿌리치고 상대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기술.

적은 힘으로도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 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권 또한 가져올 수 있기에, 단순히 막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메리트를 가져올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쳐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패링은 상대방의 공격과 동시에 이뤄지는 것.

조금만 타이밍이 늦어도 패링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상대에게 빈틈을 내줄 뿐이다. 패링의 실패는 치명상을 의미했다.

당연히 실전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쓰인다 하더라도 대인전, 혹은 인간형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쓰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녀는 해낸 것이다. 처음의 실전에서, 그것도 저 거대한 슬라임 자이언트를 상대로.

‘진짜 천재구만…….’

“이, 이게 무슨…….”

등 뒤에서 이소연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 슬라임 자이언트는 최소 옐로급이라구요? 물론 슬라임 계열이 목숨만 질기고 느려터진 놈들이라지만, 그래도 저 공격을 1학년이…….”

미카엘라는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검으로 바닥에 내리 꽂혀있는 슬라임 자이언트의 손목을 베었다.

“무어어어어―!!!”

하지만 슬라임 자이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 팔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도 직격이었다.

“미카엘라!! 우선 민호를 데리고 빠져나와!! 도망쳐야해!!”

“…안 돼.”

“뭐?”

“안 된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멍청아!!”

미카엘라가 화가 난 목소리로 받아쳤다.

“여기는 요새도시 외곽 중에서도 외곽이야!! 조금만 더 가면 바깥이라고!! 여기서 우리가 도망치면? 도망치면 어떻게 돼??”

“…….”

대부분의 몬스터는 도망치는 상대를 본능적으로 뒤쫓는다.

몬스터에 관한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즉, 우리가 도망친다면 저 괴물은 우리를 쫓아올 것이고, 결과적으로 요새도시 바깥으로 몬스터를 풀어놓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초창기 시절, 토벌에 실패하고 도망치는 헌터를 뒤따라온 몬스터가 도시를 습격하는 건 꽤 잦은 일이었다.

“우리가 저 커다란 녀석을 따돌리고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불가능해!!”

다시 한 번 내리 꽂히는 주먹을 황금빛의 보호막이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보호막을 산산조각이 나며 흩뿌려졌지만, 마찬가지로 주먹의 방향을 살짝 틀어놓는데 성공했다. 빗나간 주먹이 다시 한 번 아스팔트 위에 내리꽂혔다.

“나는… 도망칠 수 없어. 도망치지 않아. 그게 다른 사람들의 피해로 이어진다면, 더더욱.”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검을 들어올려, 에테르의 참격을 뿜어냈다.

뿜어져 나온 에테르의 참격은 거인의 어깻죽지를 떨궈내었고, 고통스러워하는 슬라임 자이언트의 고함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내가 시간을 끌겠어. 그동안에 너희는 도망… 아니, 그래. 증원을 불러와줘.”

잠깐 동안 생긴 틈을 이용해서 쓰러져있던 전민호를 일으켜 세우며 그녀가 말했다.

‘난감하구만…….’

한껏 진지한 미카엘라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었다.

‘그냥 다 같이 도망가준다면, 저 덩치 큰 슬라임은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데.’

저 녀석이 밖으로 풀려날 위험 같은 건 없었다.

보는 눈만 없다면야 얼마든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상대다. 슬라임 자이언트는 한 번에 핵을 파괴할 화력만 있다면 그냥 덩치 큰 슬라임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3km정도 밖에서 이쪽을 엄호하고 있는 정체모를 헌터와, 생각보다 이소연의 옵저버 능력이 뛰어나다는 부분이었는데, 그 정도 눈길은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라가 저러고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하는 수밖에 없나…….’

주변을 둘러보니 이세형은 활을 쥔 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서준은 짐짓 평소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카엘라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전민호는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당장 오줌을 지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모두 초보자였다. 1학년 중에 골라서 뽑아낸 정예들이라지만, 실전 상대는 고블린과 슬라임 몇 마리가 전부인, 살면서 목숨의 위협 따위는 느껴본 적이 없던 녀석들이다.

과연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할 수 있을까.

미카엘라의 보호막이 깨지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박서준, 들고 있는 김주언을 이소연 옆에 내려놓고 와. 이세형은 후방 쪽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는다. 높이는… 그래, 저기 5층짜리 건물이 적당하겠어.”

“뭐? 대체 무슨―”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박서준이 블링크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세형은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박서준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소연은 구조신호를 보내. 등급은 옐로. 그리고 이 주변 몬스터들 움직임도 체크해줘.”

“이미 하고 있다구요!! 그런데, 설마 지금 이 멤버로 슬라임 자이언트를 토벌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 쪽이 말한 대로 옐로급이라구요?”

이소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신고식은 원래 화려하게 치루는 거 아니겠어?”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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