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전민호는 대답을 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파이어 애로우를 날리면서 슬라임들을 증식시키고 있었다.
‘음, 그래도 저건 좀 많은데…….’
아무리 슬라임이 만만한 상대라고는 하지만, 저건 너무 많았다.
그곳에 모여 있는 슬라임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세 자리 수는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그만한 숫자의 슬라임들이 모여서 단체로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트라우마로 남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뭐야, 지금 저게 뭐하자는 짓거리야?”
갑작스런 소란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미카엘라가 질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세형도 이쪽으로 와있었는데, 의외로 비위가 약한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몰라, 시험해보고 싶은 마법이 있대.”
“으… 적당히 좀 하지. 뭔가 불길한데.”
미카엘라의 목소리에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민호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많은 것 같다?”
“괜찮아요. 제가 시험해볼 마법이면 전부 커버 가능하니까요.”
김주언의 걱정 어린 물음에, 전민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후, 자세를 취하고서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과연 발화 능력자답게 그의 마법 시전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이윽고 불처럼 이글거리는 붉은빛의 에테르가 그의 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블레이즈 필드(Blaze Field)―”
“…뭐?”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하필 그걸 쓴다고??
“멈춰!!”
다급하게 소리쳐봤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그의 마법시전이 끝나고 시동어까지 마친 순간, 슬라임들이 있는 곳에 붉게 타오르는 화염의 대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불에 달궈진 슬라임들은 증식을 시작했다.
블레이즈 필드는 오랜 시간 유지되는 불의 대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필드형 마법이다.
범위형 마법은 아군의 피해가 발생하기 쉬워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한다.
하지만 블레이즈 필드 같은 필드형 마법들은 순간적 위력 자체는 아주 약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화염 내성 마법만으로도 아군의 피해를 차단시킬 수 있으며, 또한 깔아둔 채로 자유롭게 움직여도 상관없다는 점 때문에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어 상당히 선호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법이었다.
슬라임은 자신의 내성 이하의 공격을 받으면 오히려 에테르를 흡수하고 증식해버린다.
물론, 만약 A급에 준하는 수준의 화염계열 능력 에스퍼가 시전한 블레이즈 필드였다면 단숨에 슬라임들의 핵까지 태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민호는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해봤자 이제 막 각성한 초보 에스퍼에 불과했다.
지금 저기서 타오르고 있는 블레이즈 필드는 저 많은 슬라임들의 에테르 공급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취소해!!”
“이, 이게 아닌데…….”
김주언이 큰소리로 다그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굳어있던 전민호는 그제야 마법을 취소시켰다.
하지만 마법이 취소되고 난 후에도 한동안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슬라임의 숫자는 이미 2배가 넘게 불어나있는 상태였다.
“…이건 어림잡아도 400마리는 넘을 것 같은데.”
“우와아… 행여 꿈에라도 나올까봐 두려운 광경이네요오.”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여성 두 명이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저 정도로 숫자가 불어난 이상 한 번에 전멸시키는 것은 힘들어졌다.
오히려 저 정도 숫자의 슬라임 무리에게 섣불리 강력한 공격을 시도했다가는, 정말로 심각한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가 불어나봤자 슬라임은 슬라임.
진형을 갖추고서 차근차근 격파해나간다면 금방 처리할 수 있었다.
첫 실습치고는 꽤나 복잡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어라??
“선배님, 지금 어디가시는 겁니까?”
앞에 서있던 김주언이 창을 뽑아들고서 슬라임 무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긴, 뒤치다꺼리는 인솔자의 역할 아니겠냐?”
김주언은 나름 비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활성화 된 푸른빛의 에테르가 그의 창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꽤나 멋지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몰아쳤다.
경험상 저런 녀석 치고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걸 본적이 없었다.
괜히 일만 더 크게 벌여놓고 죽어버리는 엑스트라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나 할까.
“선배님, 일단 지금은 진형을 갖춘 다음에 천천히―”
“한가하게 그럴 시간이 있겠냐!!”
탓.
김주언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대를 꼬나 쥔 채로 땅을 박차올라 슬라임 무리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말이다!! 옛날부터 이런 건!!”
단번에 4층 정도 높이로 뛰어오른 그가 창끝을 발 아래로 향하며 외쳤다.
그의 창을 중심으로 맴돌던 푸른빛의 에테르들이 창날에 휘감기며 얼어붙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거대한 얼음의 창이 되었다.
“회심의 일격으로 한번에 날려버리는 게 정석이라고!!”
‘아.’
그 짓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가장 우려했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앉아있는 날 일으키는 건 미카엘라의 황금주먹 정도나 될 줄 알았는데, 그걸 저 양반이 해낼 줄이야.
옆에 앉아있었던 전소연도 어느새 휴대폰을 집어넣고서 탐색망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하아아아앗!!”
김주언은 당당하게 기합을 외치면서 그와 동시에 얼음의 창과 함께 내리 꽂혔다.
이대로 공격이 들어간다면, 전멸까지는 못시키더라도 슬라임의 절반정도는 날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심의 일격이 작렬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
그의 얼음의 창은, 갑자기 나타난 붉은 거인의 손에 붙들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김주언은 처음부터 이번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학년 교육에 쓸 몬스터를 포획해오는 임무라니, 이게 잔심부름이지 무슨 임무란 말인가.
자신의 동기들 중에는 이미 실전에 투입되는 녀석들도 있었다.
개중 몇몇은 이미 프로 헌터팀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중에는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딴 허접한 임무는 다른 녀석에게 넘겨버리고 싶었지만, 3주 만에 들어온 간만의 임무였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이런 같잖은 임무라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작년 말, 옐로급 몬스터 토벌임무를 거하게 말아먹고 난 이후로 그의 평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젠장, 차라리 자퇴하고 프로팀에 들어가 버릴까.’
김주언의 실력은 동기들 중에서는 물론, 프로 헌터 중에서도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다. 클래스로 치자면 B급도 넘볼 수 있는 실력이었다.
프로 헌터 사이에서도 B급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다. 지금 실력으로도 어중간한 프로팀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 헌터학과에 속해있는 한, 학교의 허락 없이는 헌터에 관한 어떤 외부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허락이 떨어지는 활동은 이런 자잘한 임무들이 전부였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본부에서는 자기 말고도 다른 녀석을 호위역으로 따로 붙여두었다.
이미 A급 헌터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소문이 자자한 2학년의 세율이었다.
이런 거물급을 따로 붙여놓을 정도라면, 나의 신용은 얼마나 형편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증명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호들갑들은 떨 필요가 없다고. 이런 자잘한 임무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사실 전민호의 실수로 슬라임의 숫자가 단숨에 불어났을 때, 그의 가슴은 내심 벅차오르고 있었다.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라고.
이런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서도 나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
나는 이런 자잘한 임무나 맡을 에스퍼가 아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걱정은 없었다.
이까짓 슬라임들 따위 얼마나 모여 있든 간에 제대로 된 기술 한 번이면 일망타진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주의해야 할 것은 후방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세율이었다.
그녀의 대응보다 빠르게 움직여야만 한다. 기껏 찾아온 기회를 두 눈 뜨고 뺏길 수는 없었다.
“하아아아앗!!”
신속히, 그리고 확실히 처리해야하는 만큼, 가장 자신 있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기술을 꺼내들었다.
예전에 오우거의 두개골도 단숨에 깨부쉈던 적이 있는 기술이었다. 하물며 슬라임 따위야.
그러나 슬라임들의 반응이 수상했다.
적당히 흩어져있던 슬라임들이 한 곳으로 뭉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이라도 하는 것인가.
멍청한 것들.
차라리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이 기술은 슬라임들이 단순히 뭉치는 것 정도로 막을 수 있을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김주언이 깨닫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단순히 모여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슬라임들이 무차별적으로 달라붙어 만들어진 그 덩어리는, 순식간에 웬만한 거대 몬스터의 크기를 뛰어넘어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다급해진 김주언은 어느새 자기가 있는 높이까지 치솟아 오른 거대한 슬라임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더 커지기 전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 일격은 닿지 못했다.
거대할 슬라임 덩어리 안에서 튀어나온 손이 얼음의 창을 붙들었다.
김주언은 어쩔 수 없이 그 상태에서 능력을 발동시켜, 얼음의 창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얼음의 파편들은 슬라임으로 밀폐된 공간을 뚫고 나오지도 못한 채 막혀버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거대했던 얼음의 창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온 창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슬라임의 손에 붙들려있었다.
김주언은 창대를 뽑아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발을 짚고 말았다.
“억? 으, 으아아!!”
자기도 모르게 짚었던 발은 슬라임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반격해보려 했으나, 그의 무기는 이미 묶여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발버둥 칠수록 안으로 더 빠르게, 그리고 더 깊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슬라임들은 어느새 합체가 끝나있었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슬라임들은 사라지고 거대한 붉은빛의 젤리 덩어리만 남아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어떤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이윽과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린 거인의 모습이 되었다.
“으…무어어어어―!!!”
그 높이만으로도 15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괴물의 울음소리가 시가지에 울려 퍼졌다.
붉은빛의 반투명한 거인, 슬라임 자이언트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