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5화 (15/135)

15화

“으후, 기아스는 할 때마다 기분이 참 거지같단 말이야.”

유선은 아직까지도 불쾌한 기분이 남았는지 표정을 찡그린 채로 손발을 털어내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이물감이 오래 남는 건가?

“너 방금 되게 기분 나쁜 생각 하지 않았냐.”

“아뇨, 아무것도.”

“아닌데, 한 거 같은데.”

유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의자 뒤로 젖혔다.

“뭐, 됐고. 일단 맥주나 좀 사와라. 테이블 위에 있는 거랑 같은 거로.”

유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대체 왜… 억?”

그런 잔심부름까지 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그래서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려던 순간, 코어 부근에서 약간의 통증을 동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방금 잠들었던 유선의 에테르가 기아스에 대한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잠깐, 지금 대체 왜…?”

“뭐가. 아, 거부반응이라도 났냐?”

“아니, 대체 왜, 지금 기아스가 반응을?”

“그야 당연히 네가 기아스를 깨려고 했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 약속은 지켜야지, 그러면 쓰나.”

유선이 담배를 입에 물면서 말했다.

아니, 이런 잔심부름을 거절했다고 기아스가 반응할 리가 없었다. 조건들을 달아놓은 것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시의 범위는 조건 2항에 분명 「교수와 학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지시라고 판단될 때」로 한정되어있을 텐…….’

그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자 가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가서 맥주나 사와라’라고 시킨 거 맞죠?”

“그래, 교수가 시켰으면 빠딱빠딱 뛰어갈 것이지, 멍을 때리고 자빠졌냐.”

유선은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일반적인 양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지금 저 작자는 교수가 학생에게 술심부름 시키는 것을 가슴 깊은 곳, 심층의식에서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컥.”

“어우, 그러다 하루 만에 기아스 깨지겠다야.”

‘뭐지, 이 복잡한 기분은.’

당황스러운 동시에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인간성까지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재수가 없어도…….’

“…돈은요?”

“아, 그래. 앞으로 이거 그냥 네가 갖고 다녀라.”

체념한 내가 손을 내밀자, 유선은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앞으로 내가 뭐 시키면 그걸로 결제해. 한 달에 50만 정도는 네 맘대로 용돈으로 써라.”

그녀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 기분이 딱히 상쾌해지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내 기분과는 달리 몸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있었다.

* * *

“으, 피곤해 죽겠네, 진짜.”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심부름으로 맥주를 사와야 했고, 그곳에서 실습 동아리 신청서를 작성한 다음, 앞으로의 주의점(주로 심부름에 관한 내용들이었다.)까지 다 듣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해는 저물어 달이 떠올라 있었고, 그제야 아직까지 내가 저녁도 먹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도시락을 샀다. 오늘 저녁은 대충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울 생각이었다.

왠지 오늘은 단 게 땡겨서 편의점에서 팔던 조각케이크도 2개 샀다.

평소에는 결코 사지 않을 품목이었지만, 어차피 유선이 준 카드로 계산할 거라 상관없었다. 딱히 안 쓴다고 내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명색이 교수인 양반이 심성이 그리 꼬여있을 줄은…….’

나는 유선이 심부름을 시키는 순간 기아스가 발동하던 것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기아스가 발동했다는 것은, 유선은 학생한테 잔심부름이나 시키는 그 양아치스러운 지시를 심층의식에서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끽해봤자 잔심부름 정도겠지만…….’

잔심부름 좀 하고 5급 공무원에 합격.

혹은 5급 공무원이고 나발이고 탈주.

저울질을 해보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휴, 그냥 밥이나 먹자.”

겨우 집에 도착한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전자렌지에 돌렸다.

이런 일은 걱정해봤자 스트레스만 쌓이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 배고픔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따뜻하게 덥혀진 도시락을 열었다.

띵동―

그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이 시간에 여기 올 사람이 딱히 있나?

“누구세요?”

“미카엘라.”

“…….”

있다.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네가 훈련에 참가하지 않는 날에는, 무조건 내가 네 방에 쳐들어온다고요.]

‘훈련에 참가하지 않으면, 미카엘라가 방에 찾아온다.’

대체 왜 이딴 인과관계가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억하심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중요한 건 난 오늘도 훈련에서 빠졌고, 미카엘라는 자신의 선언대로 내 방문 앞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녀를 방 안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냥 문을 안 열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내 방문 앞에 서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만약 이를 누군가가 목격하게 된다면,

‘어젯밤에 미카엘라가 남자기숙사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엑? 누구를?’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412호 앞이었다는데?’

‘헉, 나 거기 누구 방인지 알아! 조원호 방이야!!’

‘젠장, 부럽다!!’

이딴 헛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문을 열어주기는 싫지만, 그녀를 문 앞에 세워둘 수는 없는 상황.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있나 고민하던 나는 결국 문을 열어주기로 결정했다.

“미스터 호!! 있는 거 아니까 문 열어!”

쾅쾅.

그녀가 문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아니, 뭐하는 년이야. 진짜.”

아무리 이 기숙사가 방음처리가 잘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안쪽까지 들릴만한 소리였다. 혹시라도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익숙한,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있었다.

“안녕, 호? 좋은 밤이야.”

“…그렇게 좋은 밤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얼핏 잔잔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이후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온 미카엘라는, 오늘도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나에 대한 분노를 담아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가 밥 먹는 걸 기다려주기는 했다. 덕분에 체할 뻔했지만.)

“저기, 미카엘라.”

“뭐!!”

설교 도중 내가 끼어들자, 미카엘라가 여전히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하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꺼낸 것은 편의점에서 사왔던 조각 케이크였다.

먹을 것 앞에서 약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

더군다나 난 아직까지 케이크를 싫어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럴까. 슬슬 지쳐가던 참이었고.”

케이크를 받아든 미카엘라는 나의 계획대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홍차는?”

홍차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여기가 영국이냐? 물이나 마셔.”

“녹차도 없어?”

“없어.”

미카엘라는 잠시 불만에 찬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얌전하게 케이크를 먹었다.

편의점에서 산 케이크였지만 맘에 들었는지 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설교를 멈춰 세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갑자기 케이크가 사고 싶어지더라니!!’

모든 것은 지금 이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는가!

케이크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오래 설교를 듣고 있었어야 했을 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너도 실습 동아리 가입했다면서??”

미카엘라는 케이크를 먹던 도중 포크를 잠시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실습 동아리?? 아, 뭐…….”

유선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유명하긴 해도 나름 비밀스럽게 돌아가는 동아리처럼 보였는데, 이렇게 정보가 빨리 퍼지나?

‘잠깐… 너도?’

그 단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했다.

‘너도’라는 말에는, 나도 그런데 너 또한 그러니? 라는 쌍방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긴, MT때 봤던 대로면 너도 자격이 충분하지. 노력을 안 해서 문제지만.”

미카엘라가 다시 포크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잠깐, 미카엘라. 혹시 너도?”

“뭘?”

“…너도 실습 동아리에 가입하느냐, 이 말이야.”

“가입하고 자시고, 1학년 중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가입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실습 동아리는 6명의 팀원으로 진행되는데, 이미 5명의 학생들은 뽑혀있던 상태였고, 마지막 한 명만 더 모으면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내가 뽑혔고, 그 사실이 기존의 5명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나는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또 얘랑 같이 다녀야 돼?’

사실 실습동아리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미카엘라가 빠질 수가 없다.

실습동아리에서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학생의 모습이 바로 미카엘라 그 자체가 아닌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요즘 따라 이 말이 자주 나오는 건 기분 탓일까.

“이젠 진짜로 매일 훈련에 나와야해! 실습이라고 하지만 실전이나 다름없으니까, 정말 위험하다고!!”

케이크를 다 먹은 미카엘라는 그 말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정신적 피로가 극심했던 나는, 떠나는 미카엘라에게 적당히 손을 들어주고 난 후, 방을 정리하고서 침대에 들어 누웠다.

“흐어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아니, 기존에 뽑힌 멤버가 있으면 누구누구가 있다고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니야!!”

홧김에 뱉은 말이 허무하게 방 안에 맴돌았다.

딱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유선한테 이런 말을 해봤자, ‘네가 안 물어봤잖아?’라고 말할 게 뻔했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고.

그 때, 핸드폰에 문자가 한 통 왔다.

학교에서 보낸 실습동아리 멤버 명단이었다.

바로 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미카엘라 레지스터’가 적혀있었다.

“빨리도 보낸다 진짜…….”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집어 던진 후,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러다가 공무원은커녕 4년 안에 암 걸려서 죽을지도.’

그리고 실습동아리 첫 모임에 참여하고 나서, 나는 이 생각에 좀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