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하지만 제가 싫다면요?”
그래, 실제로 하기 싫었다.
합리적이고 나발이고 그건 그 쪽 이야기였고, 나는 하기 싫었다.
“싫으면 징병당하거나 네가 알아서 튀는 거지. 어차피 써먹지도 못할 거 뭣하러 지켜주냐. 그냥 자기 갈 길 가게 보내는 거지.”
“아… 젠장.”
도망정도야 간단하게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난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애초에 돈도 없었다. 이삿짐도 손으로 들고 다닐 만큼 밖에 없는 놈이 가진 게 뭐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평범한 삶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면서 살아가는 도망자 생활이 평범한 삶일 리가 없었다.
헌터가 될 바에야 차라리 타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겠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차악일 뿐이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꼼짝없이 4년간 묶여 지내게 생겼잖아.’
“…하지만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것도 노동효율이 떨어지겠지.”
이쪽의 반응을 살피던 유선이 말했다.
“일단 졸업할 때까지 시키는 것들만 해주면, 비밀 엄수와 정보통제는 물론이고 이후 네가 어떻게 살던 간에 신경 쓰지 않겠다.”
“4년 동안 일하고 자유와 조은대 졸업장입니까…….”
내가 애초에 계획을 세우고 힘을 숨겨왔던 이유는, 졸업 후 헌터 외의 다른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만약 계획대로 잘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 선례도 없을 뿐더러 에스퍼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급인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터학과에는 상당히 많은 지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더라도 헌터학과 졸업 후 헌터가 되는 흐름을 막을 수 있다.
조금 손해 보는 느낌이었지만, 생각만큼 나쁜 거래는 아닌 듯 했다.
“거기에 퇴직금도 줄 겸해서 네가 원하는 것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물론 상식적인 선에서. 어때?”
그 때 유선이 말했다.
“…그 쪽이 말하는 상식적인 선이 어디까지인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띄웠다.
“뭐, 대충 네가 ‘혹시 이런 것도 될까?’ 싶은 정도까지는 될 거라고 생각해. 지금 정할 필요는 없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나중에 말해줘도 된다.”
잠시 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유선은 딱히 보챌 생각은 없는 듯,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새로 가져와 마시기 시작했다.
“저기, 그럼…….”
침묵을 깨트린 것은 내 목소리였다.
“어, 뭔데.”
“그, 공정성에, 아니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법한 건데요, 될까요?”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유선은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했다.
“벌써 정한 거야? 더 나중에 결정해도 되는데?”
“아뇨, 제가 원하는 건 이미 있었으니까요.”
“허, 목표가 뚜렷한 놈이네. 그래, 뭔데?”
“그…….”
“뜸도 적당히 들여야 뜸이다.”
“공무원 시험 합격…도 될까요?”
잠시 망설인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던졌다.
“…뭐?”
“아, 역시 이건 좀 힘들까요. 하지만, 저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라서… 7급, 아니 9급이라도 괜찮은데요.”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데 정년까지 보장돼서 어지간해서는 해고도 당할 일이 없다.
게이트 오픈 이후 워낙 인력이 부족했기에 업무량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휴일 다 챙기고 야근 수당까지 꼬박꼬박 챙겨주는 건 공무원이 유일했다.
돈 떼일 걱정 없고, 안정적이고, 쉬는 날은 쉬는.
가장 무난하고, 가장 평범한.
그렇기에 나에게는 가장 완벽한 직장이라 할 수 있었다.
“…안 되겠죠?”
게이트 오픈 이전, 취업률이 바닥을 찍었을 때부터 공무원은 각광받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지금에 와서, 공무원 시험 경쟁은 더더욱 높아졌다. 공무원이 되면 큰돈을 모으거나 떵떵거리며 살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에테르가 있으면 헌터, 에테르가 없으면 공무원. 이런 말이 유행어처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상황이었다.
“풉.”
그리고 유선은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 아하하하하, 아, 이거 병신인 척 연기만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진짜 병신이었네. 하하하.”
“…아니,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러운 심정이었는데, 눈앞에서 대놓고 웃음을 터트려버리자 발끈하면서도 왠지 무안한 기분이었다.
“아니, 이거 골 때리네. 큭큭큭. 아, 미안하다. 근데 상식적으로, 킥킥. 최소 A급 헌터는 되고도 남을 놈이 뭐? 공무원 시험을 합격시켜 달라고??”
“…남의 꿈을 비웃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건 내가 널 비웃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웃긴 상황 아니겠냐. 큭큭, 아, 오랜만에 거하게 웃었네. 방금 걸로 수명 10분은 늘었겠다, 야.”
“그래서,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나는 조금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공무원 시험?”
“예, 9급이요.”
“안 돼.”
“역시…….”
썅, 그럼 쳐웃지나 말던가. 괜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다른 의미였었다.
“야, 내 체면이 있지 낙하산을 앉혀도 무슨 9급 짜리를 앉히냐? 모양 빠지게.”
유선이 질색하며 말했다. 상상만 해도 쪽팔린다는 표정이었다.
“시험을 합격시키는 건 나도 무리지만, 낙하산 태워주는 것 정도야 가능하니까. 그래, 5급 정도로 하자. 5급이면 행정고시 합격 수준이지. 어때?”
“무슨, 무슨 고시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행정고시.”
그리고 유선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행정…고시.”
“그래, 행정고시.”
행정고시.
대한민국 3개 고시에 반드시 꼽히는 시험으로, 어디 가서 공부로는 꿀려본 적이 없다는 녀석들이 바글바글 모이는 곳이자 그런 녀석들이 우수수 쓸려나가는, 그야말로 현대판의 과거시험이 아니던가.
준비하다보면 장원급제하는 옛이야기 속 선비님들이 새삼 위대하게 보인다는 바로 그 시험.
조은대 졸업이 인생의 하이패스라면 행정고시는 KTX였다. 그것도 우등석으로.
“정말로, 행정고시를 합격시켜주신다는 겁니까?”
“아니, 미친놈아 합격시켜주는 게 아니라… 아냐,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 그런 셈으로 치자, 그래.”
유선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진짜죠, 거짓말 아니죠.”
“그래, 그럼 내가 너랑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여기 앉아있겠냐?”
“그, 그럼 계약서, 계약서를.”
“…계약서를 쓰자고? 내가 간단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게 법적으로 떳떳한 짓거리 같아 보이냐? 이런 계약을 계약서로 남기자고? 정신 나갔냐?”
유선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 상황에서 계약서는 써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만약 계약이 불이행 됐을 때, 그걸 들고 경찰서를 찾아가겠는가, 법원을 찾아 가겠는가.
계약서를 들고 가봤자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불법행위에 대한 자수를 하러 가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걱정하지마라, 나도 날로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유선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기아스를 걸어두도록 하지.”
“기아스…….”
기아스.
서로의 에테르를 매개체로 한 에스퍼들간의 계약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도 담보가 될 수 있는 절대적인 계약이었다.
사전에 기아스의 내용을 서로 합의하고, 서로 에테르를 주고받아 상대방의 코어에 심어두는 것으로 기아스는 성립된다.
만약 기아스의 내용을 불이행 할 경우, 기아스가 깨지면서 이 에테르가 폭주하게 된다. 폭주한 에테르는 상대방의 에테르 회로를 뒤틀어놓는다. 회로가 뒤틀린 상대는 불구가 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
물론 어지간히 중요한 계약이 아닌 한 서로 주고받는 에테르의 양은 적절하게 조절되기에, 기아스가 깨진다고 해서 불구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온몸의 회로가 뒤엉켜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아무리 작은 계약일지라도 기아스는 상당한 억제력을 가졌다.
“기아스라면 괜찮겠네요. 방식은?”
“스크롤을 이용한다. 그딴 귀찮은 술식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유선은 돌돌 말린 종이를 품에서 꺼내 책상에 펴놓았다.
쌍방 계약용 기아스 스크롤이었다.
유선은 거기에 에테르로 기아스의 조건을 새겨 넣었다.
<피술자는 앞으로 4년간 술자의 지시에 따른다.>
<피술자가 기간 동안 계약을 이행했을 경우, 술자는 피술자에게 5급 공무원으로의 취직을 보장한다.>
“대체 이게 뭡니까?”
“기아스 스크롤 처음 보냐.”
“아니, 조건이 개떡 같잖아요.”
나는 스크롤을 가리키며 따지듯이 말했다.
“여기, <4년간 술자의 지시에 따른다.> 이런 애매모호한 서술이면 그냥 빼도 박도 못하고 4년간 노예생활이잖습니까. 말이 틀리잖아요.”
“아, 내가 설마 너한테 이상한 거 시키겠냐? 쫌팽이처럼 왜 난리냐.”
“쫌팽이? 이런 부분에서 대인배인 척 하는 놈들이 패가망신하는 겁니다. 제가 뭐 믿고 그쪽이랑 이딴 기아스를 맺습니까?”
“그쪽? 이제 상관 될 사람한테 말이 짧다?”
“아니, 따질 건 따져야죠. 뭐가 이렇게 엉성합니까.”
기아스라는 건 맺고 나면 반드시 이행해야만 하는 것.
그렇기에 기아스를 맺을 때는 언제나 쌍방 간의 합의가 길게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약간의 언쟁이 오가고, 결국 유선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네가 적당히 알아서 해라’라며 기아스 스크롤을 이쪽으로 밀었다.
사실 유선은 스크롤 작성 능력이 미숙하다 못해 허접한 수준이었다. 처음 기아스의 조건이 엉성했던 것도 그냥 스크롤 작성 능력이 떨어져서였다.
결국 기아스 스크롤은 내가 완성시켰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항. 피술자는 앞으로의 대학생활 동안 술자의 지시에 따른다. 피술자에게는 거부권이 따르며, 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이후 서술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2항. 술자는 기간 동안 피술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다만 이 권리는 헌터학과의 교수와 학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지시라고 판단될 경우로만 한하며, 이를 벗어날 경우에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판단의 기준은 술자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3항. 술자는 피술자가 상급 에스퍼라는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만약 술자의 지시가 해당 비밀을 노출시킬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고 피술자가 판단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판단의 기준은 피술자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4항. 술자와 피술자 모두 중도에 기아스를 파기할 수 있으나, 이는 상대방도 납득, 인정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되며, 이를 악용하려는 의도가 있을 경우 파기가 불가하다. 판단의 기준은 쌍방의 심층의식에 근거한다.>
<위 4항에 따라 계약이 이행되었을 경우, 술자는 피술자에게 5급 공무원으로의 취직을 보장한다.>
이 4항의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1항. 나는 유선의 지시에 따르지만 불합리한 지시에는 개길 수 있으며>
<2항. 유선은 상식적으로 학생한테 시킬만한 일만 시킬 수 있고>
<3항. 유선은 내 비밀을 지켜야하고, 비밀이 들통 날 것 같은 지시는 내가 거부할 수 있다.>
<만약 기아스가 X대로 돌아간다고 둘 다 납득하고 있다면 누구든지 때려칠 수 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었다.
심층의식이라는 것은 생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만약 누군가가 기아스를 악용하기 위해서 ‘A는 B다, A는 B다’라고 자기암시를 때려 박더라도, 심층의식에서는 ‘뭐, 사실 A는 A잖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조작이 불가능한 일종의 무의식이었다.
일반적인 계약서였다면 개소리나 망상을 끄적여놓은 낙서장이었겠지만, 기아스에 있어서 꽤나 믿음직한 계약서였다.
“저기, 심층의식이 뭔지는 아시죠?”
“그래, 안다 이 자식아.”
나는 확인차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내용을 확인한 후 스크롤의 서약부분에 손을 올리자, 유선도 반대편에 손을 올려놓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빨리 끝내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피술자 조원호는 해당 계약서의 내용을 인정하며, 기아스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술자 유선은 해당 계약서의 내용을 인정하며 기아스를 받아들인다.”
선언을 마치는 순간 약간의 에테르가 손끝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에테르를 흡수한 기아스 스크롤이 잠시 빛을 발한 후, 나의 에테르는 유선에게, 유선의 에테르는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타인의 에테르가 회로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감각은 빈 말로도 좋다고 하기 힘든, 마치 이물질이 섞여 들어오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코어에 자리를 잡고 안정기에 들어가자 이물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절차가 끝나자 기아스 스크롤은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이제 4년 동안 내가 계약을 이행해야 함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4년 뒤 나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