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에필로그>
“…….”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하현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간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1시. 어제 새벽에 2시에 잠들었던 것을 감안해도 늦은 아침이었다.
“으으음…….”
우드득-
침대에 일어나 기지개를 피자 뻐근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퀭한 눈을 비비며 하현은 화장실로 가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
‘불간섭이 없으니까 이건 참 불편하네.’
1시간을 자던 30분을 자던 싸그리 날아가던 피로 회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레벨이 레벨인지라 빠르게 회복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한계는 있는 수준이었다.
‘어제 적당히 마셨어야 했나.’
강철과 민철에게 붙잡혀 물 대신 술을 먹는 것마냥 마셨다 보니 속이 절로 공허했다.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아퀼로의 모습이 보였다.
“……어휴.”
어디 가리고 할 것도 없이 무방비하게 소파에 자고 있는 아퀼로.
이제는 익숙한 그 모습에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들어 있는 거라고는 빵밖에 없었던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반찬통 몇 개를 꺼내들었다.
그 통에는 각각 포스트잇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지영’ ‘지현’ ‘아민’ ‘메이룬’
붙어 있는 이름에 따라 반찬의 상태는 극과 극에 달했지만 하현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하나씩 꺼냈다. 밥솥에서 밥을 퍼고 2인분을 올려놓은 다음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여전히 널브러져 있는 아퀼로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일어나!!!!!!!’
“으앗?!”
쿵!
머릿속을 향해 퍼붓는 쩌렁쩌렁한 외침에 아퀼로가 소파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하현은 식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와서 밥 먹어.”
“이런 씨…… 내가 이런 방법으로 깨우지 말랬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아퀼로는 얼굴을 찌푸리며 하현을 노려보았다.
마음과 같아서는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붓고 싶었던 것을 간신히 억누른 듯했다.
“어차피 제대로 깨워도 안 일어나잖아. 와서 밥이나 먹어.”
“……에휴.”
하현을 보며 한숨을 내쉰 아퀼로는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지영과 지현이란 포스트잇이 붙은 반찬들을 바라보았다.
“야, 너 이제 불간섭도 없잖아. 식중독으로 죽으려고?”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입맛 참 까다로워요.”
반찬을 젓가락으로 쿡쿡 쑤시며 피식 웃는 아퀼로의 모습에 하현은 직접 반찬을 집어 먹었다.
물론 혓바닥에 오래 닿지 않도록 바로 넘겨 버렸지만, 밥과 먹으면 괜찮은 편이다.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조만간 나아지겠지.”
전쟁이 끝난 이후 놀러왔다가 빵만 가득 차있는 냉장고를 보고 경악하며 모두가 만들어준 반찬들이다.
맛은 조금 없더라도 먹어주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 말에 아퀼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보니 대책위원회 설립일이 오늘이었나?”
밥을 깨작깨작 먹던 아퀼로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어왔다. 그제야 하현은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떠올렸다.
“맞네. 어제 술 먹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어제했던 회식이 오늘 있을 위원회 설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린 것이었다.
물론 뒤로부터는 그냥 늘 그랬듯이 마시고 죽자는 의미로 변질되어버렸지만.
“근데 그렇게 속 시원하게 넘겨줘도 괜찮아? 네가 제일 노력해서 만든 집단이잖아.”
이것저것 따져 보면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하현의 공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현은 아무렇지 않게 민철에게 대표 자리를 넘기고 빠졌다.
남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선택. 그에 하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귀찮잖아.”
대표 자리에 앉으면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퀼로를 비서로 둔다고 해도 업무로 씨름을 하게 되리라.
“지금 위치가 딱 적당해. 어차피 도와준 것 때문에 수고비는 들어오니까.”
예전이라면 억소리 날 만한 금액들이 달마다 통장에 들어온다. 거기다 기존에 벌어둔 금액도 있으니 돈 번다고 일을 더 할 필요는 없어졌다.
“하긴. 이제 굳이 일할 필요가 없긴 하지.”
“그런 거야. 아, 설거지는 내가 할게.”
밥을 다 먹고 반찬을 치운 하현은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다가가 하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럼 이제는 뭐 남은 인생 실컷 놀면서 보내면 되겠네?”
아퀼로의 몸을 이룬 것은 순수한 마나지만 따지자면 모든 생명체가 마나로 이뤄져 있었기에 일반 몸이랑 다를 것도 없었다.
아퀼로 특유의 향기가 코를 간질이자 하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런 장난은 치지 말라니까 그러네…….”
하현을 만나면서 다소 옅어지기는 했지만 본디 아퀼로는 쾌락주의자였다. 그러니까 작정하고 태세를 갖추는 순간 여자와 별 접촉이 없었던 하현은 견디기 힘든 색기를 내뿜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장난이…….”
띵동-
먹이를 앞둔 맹수 같은 표정을 짓던 아퀼로는 들려오는 벨소리에 얼굴을 팍 찡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가만히 두질 않네…….”
투덜투덜 거리며 하현에게서 떨어진 아퀼로는 현관으로 향했다. 누가 들어오는 건가 했더니 지영과 지현, 지호와 강철이었다.
왜 갑자기 놀러온 것인가 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강철이 손에 들린 먹을거리를 들어보였다.
“어제 같이 보자고 해서 사들고 왔다.”
“아. 그랬었죠.”
어제 술을 먹으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협회 설립을 발표하는 방송을 같이 보자고 한 것이다. 까먹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하현의 모습에 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 먹고 홧김에 이야기하는 버릇 좀 고쳐라. 안 그러면 정신 차렸을 때 혼인 신고서가 4장은 만들어져 있을 거다.”
“……예?”
강철의 말에 하현이 어리둥절해하자 지현이 미소를 지으며 강철의 옆구리를 팍 쳤다.
“하.하.하. 말 좀 아껴서해, 영감탱이. 남의 앞길 막지 말고.”
“앞길 막는 건 너겠지, 이놈아.”
“나 정도면 앞길을 막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 급으로 뚫어주는 거라고. 이 망할 영감탱이야.”
“……?”
뭐라고 하는 건지 몰라 하현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지영이 다가왔다.
“얼른 상이나 펴자. 조금 있으면 시작할 테니까.”
“아, 예.”
지영의 말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흑월과 함께 거실에 상을 피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서인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럭저럭 평범한 말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흠. 반찬은 어땠어?”
상을 차리며 눈치를 보던 흑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었던 감자볶음이었기에 기대를 하고 있는 듯했다.
“괜찮았어요. 조금만 더 감 잡으시면 아마 엄청 맛있는 반찬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함이 느껴지는 말.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하현의 모습에 지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더 노력할 게.”
“예, 매번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상을 차리고 모두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하현의 왼쪽에는 지영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지현이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강철과 지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언제쯤 눈치를 깔까?”
“보아하니 알아차리면 곤란해질 걸 아니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습니다만.”
두 명이 서로 눈치싸움을 하고 두 명이 쑥덕거리는 사이 아퀼로는 한숨을 내쉬며 티비를 켰다.
채널을 몇 개 돌리자 화면에는 민철과 아민, 메이룬과 회장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세계에 처해 있었던 멸망의 위기는 최하현 씨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차원의 틈에서 복귀한 이후 민철과 회장은 여태까지의 일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들 또한 하현의 활약상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세계는 완전히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 싸움에 여파가 세계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해 멸망은 막았지만, 기둥들을 모두 없애지 못했기에 인류 최후의 시련은 완수하지 못했다.
덕분에 차원의 틈이 닫히기 전까지 생겨난 던전들은 아직까지도 이 세계에 존재했다.
“뚜껑을 좀 제대로 닫아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듯 이야기하는 아퀼로의 말에 지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되돌아온 다음 아퀼로와 지호, 아민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차원의 틈을 닫았다.
구심점인 마왕이 죽었기에 쉽게 닫을 수 있었지만 앞서 말한 듯 없애지 못한 기둥의 존재 때문에 다소 불안정하게 닫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던전들은 여전히 활동을 계속했고, 아주 가끔 전조를 보이면서 차원을 헤매던 페젤론이 조각들이 때때로 강림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그리고 남은 토벌자들을 생각해 보면 괜찮은 상황이야.”
이야기를 듣던 강철이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잔류한 던전들은 토벌자들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토벌자들의 사회 적응이 좀 더 쉽게 가능해지게 될 테니.
“대신 쉴 틈이 없잖아. 이제 우리 세대처럼 강한 녀석들은 안 나올 테니까. 이번에 싹 다 정리해야 된다고.”
시련을 비롯한 스테이터스 능력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이 세계에서 강력한 토벌자가 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다 끝없는 수명을 지녔던 페젤론 출신의 인물들도 이제는 모두 평범한 인간처럼 변했다.
즉 모든 던전들을 이번 세대 안에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상당히 빠듯한 일이 되겠지만, 하현은 그에 대해서 딱히 걱정은 없었다.
“충분할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한 하현은 티비를 바라보았다.
“힘든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위험에도 맞서 싸웠듯이, 최선을 다해 여러분들을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철의 연설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부회장직을 맡은 전 회장 니레이크, 간부직을 맡은 아민과 메이룬 또한 가볍게 연설을 시작했다.
“흐음…… 지루하네.”
“뭐 연설이라는 게 다 그렇죠.”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조금 웃긴 연설 대사가 있다면 놀릴 의도로 촬영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웅!!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려 퍼졌다.
“준비해라!”
지호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허리춤의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열린 주머니에서 각자의 장비들이 나왔고,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갈아입었다.
“이동!”
지호의 발밑에 깔린 마법진이 빛이 터져 나왔고, 모두의 몸이 한 초원의 위로 나타났다.
모두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가 익숙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고, 금이 간 하늘을 발견했다.
채앵!!
발견된 금은 곧장 깨졌고, 그 안에서 거대한 드래곤이 구멍을 벌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쿠아아아악!!!]
「혼돈용…… 진짜 간혹 나온다지만 신화급 괴물이 나오는 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나타난 드래곤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퀼로가 투덜거렸다.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어도 아마 SS급에서 상위 등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 괴물이리라.
“네 명이 없으니까 적당히 맞춰서 싸우자고.”
“부상 안 입도록 조심조심해.”
빠르게 의견을 맞춰가는 동료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현은 건틀렛을 살짝 움직이며 괴물을 바라보았다.
‘오싹오싹하네.’
자신을 지켜주던 불간섭은 이제 사라졌다. 아마 앞으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싸우다가는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 이상 과거처럼 여유로울 수 있을 만큼 절대무적인 방어력이 무한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가볼까.’
그렇더라도 괜찮다. 불간섭이 사라졌더라도 동료들이 있었고, 자신에게 아직 한 가지는 남았기 때문이다.
하현은 오랜만에 나타난 경험치 덩어리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시련 생성.”
마왕, 최하현이 자신에게 넘겨준 새로운 권능.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방어력은 사라졌지만, 그의 잠재력은 여전히 무한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