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빠악!!!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확실한 타격감. 하지만 거기에 기뻐하기도 전에 마왕의 주먹이 쇄도해 왔다.
우드득!!
아랫배를 후려치는 강력한 일격. 거기에 배를 감싸던 갑옷은 흉측할 정도로 우그러졌다.
“큭…….”
복부를 압박해 오는 갑옷의 감촉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시련에 의한 동화로 마왕과 하현의 스탯은 완전히 균등하게 나눠져 있는 상태였다.
그 스탯은 장비, 칭호, 스킬의 효과로 상승된 폭까지 모조리 계산된 수치였다. 그 말인즉.
콰드득!!
이미 스탯 좀 올리겠다고 착용한 장비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텅!!
“꽤 좋아 보이는 장비였는데, 아깝지도 않은가 보군.”
장비를 뜯어내듯이 벗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하현의 모습에 마왕의 피식 웃었다. 그 말에 하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몸 전체에 둘러진 장비들을 하나둘씩 해제했다.
투구, 갑주, 악세사리, 신발, 그리고 아오른과 이레아까지. 모든 장비들을 해제한 하현은 슈트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제일 편해.”
처음부터 끝까지 입고 온 장비. 어차피 내구력도 무한이니까 굳이 벗고 알몸으로 싸울 이유는 없으리라.
가볍게 몸을 푸는 하현의 모습에 마왕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마왕도 본래 성격이 그랬기에 어깨나 일부분에만 겨우 장비가 채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마왕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모든 장비들을 풀어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어진 하현과 마왕.
“최후의 전투치고는 참 폼 안 나네.”
“오드리히와의 전투가 더 최후의 전투 같았지.”
서로의 기억을 엿보며 피식 웃은 두 사람은 천천히 자세를 잡아갔다.
세계의 존망을 건 사투는 하현의 기지에 이미 모두 끝났다.
이제 처리할 것은 그저 개인적인 사투에 불과했다.
빠악!!!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를 후려쳤다. 하현의 주먹은 마왕의 복부를, 마왕의 주먹은 하현의 옆구리에 찔러 들어갔다. 내장이 진탕되는 것 같은 묵직한 한 방.
“커헉!!”
“크학!”
공기를 토해내듯이 내뱉으면서도 둘의 눈은 서로를 향해 있었고, 통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다시금 매서운 기세로 움직였다.
마치 뒷골목의 양아치들이 싸우는 것처럼 난장판인 싸움. 몸에 멍이 들고, 뼈가 시큰거리며 입가에는 피가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고 주먹을 맞부딪치면서 동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서로의 내면까지 엿보게 되었다.
‘꽤 편하게 살았군.’
하현의 기억을 본 마왕이 주먹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나와 같이 불우한 인생을 살았지만, 불간섭을 얻은 뒤로 떵떵거리며 살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마왕의 주먹은 여전히 하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그저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엿보고 생각하는 것이 하현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마계로 가장 먼저 갔을 때, 나는 마족들에게 노예로서 충성을 보이기 위해 직접 오른팔을 잘라냈었지.’
아무리 시련의 힘을 지녔다고 해도 평범한 인간이었던 최하현이 마계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족들의 노예로서 시작했었다.
노예로서 괴롭힘 당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며 수많은 시련을 완수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온갖 고생을 하며 강해진 것이다.
‘60살을 넘겼을 때 신체를 모조리 갈아치웠고, 150살을 넘겼을 때는 드디어 마계에서 손꼽히는 강자가 되었어. 그리고 정처 없이 떠돌며 수백 년을 마계의 통일을 위해 움직였었지.’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모두가 모인다면 반드시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최하현, 아니, 마왕은 마족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힘겹게 마족들을 통일하고 그 끝에 알게 된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모두 부질없었지. 마계는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였고, 모든 마족들이 모여도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마왕이 알게 되자 마계는 자신 안에 있는 세균을 없애기 위해서인 마냥 모든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더욱 가혹해졌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해왔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거기에 마왕과 마족들은 이를 악물고 저항을 선택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시련을 발동시켰고, 자신들을 집어삼키려는 마계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마계의 영향력은 나를 쫓아왔고, 졸지에 우리들은 다른 차원을 파괴하려는 치졸한 놈들이 되었지. 그때부터 나는 마족의 대리자로서 움직였다.’
자신들을 대적하는 중간계와 지하계, 천상계와 대적하며 싸웠다. 그렇게 끝없이 싸우고, 싸워서 결국 지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너는 뭐지? 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산거냐. 나를 그런 지옥 속으로 밀어 넣고서!!’
빠악!!!
마왕의 주먹이 하현의 가슴을 후려쳤다. 여태까지 맞았던 그 어느 일격보다도 무거운 공격.
그에 하현은 비틀거리며 다시금 자세를 다잡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안심하며 자본 적이 없다! 수백 년을 쉴 새 없이 단련해야 했고 싸워야만 했다! 그런데 너는?! 너는 어땠냔 말이다!!’
빈틈을 타고 들어온 마왕의 주먹이 집요할 정도로 휘둘러져 왔다. 하현은 그 안에 실린 힘보다도 머릿속에 쩌렁쩌렁하게 울려오는 마왕의 주먹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한 채 싸웠던 게, 고작 몇 번 공방전환을 해서 싸웠던 게 나에 비할 수 있나?! 대체 왜 나만 그런 꼴을 당해야만 한 거냐!!’
하현을 노려본 마왕의 주먹이 꽉 움켜쥐었다.
‘나는, 네게 마계와 같은 그런 존재냔 말이다!!’
세 개의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멸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마왕은 자신의 꼴이 마치 그 마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빠악!!
“커헉!!”
얼굴을 제대로 후려친 마왕의 주먹에 하현의 몸이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눈앞이 흔들렸고, 전신은 격통으로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심한 건 마왕의 감정이 머릿속을 헤집는 것이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 내쉰 마왕이 하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은 자신도 다소 무리를 해가며 휘둘렀던 공격이기에 곧장 연계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쉽사리 자세를 다잡지 못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니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다소 격한 감정이 새어 들어갔나 보군.”
하현을 향해 다가가며 마왕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방금 전의 외침은 어디까지나 마왕의 무의식.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버린 마왕의 감정은 하현에게 적의를 품고 있진 않았다.
다만 그 속내에 남아 있는 최하현의 편린이 하현에 대한 강한 분노를 무의식중에서 외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비겁하다고 생각은 하지 않겠다. 그 감정에 흔들렸다는 것은, 너 또한 그에 대해서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만약 일언반구도 할 필요 없는 개소리를 들었다면, 하현이 이렇게 흔들릴 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들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되었으리라.
“…….”
그 말에 하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아퀼로와의 이야기로 어느 정도 해답을 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정면에서 감정을 마주하게 되자 달랐다.
마치 자신이 직접 느낀 것처럼 새어 들어오는 마왕의 감정에 하현은 쉽사리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심한 짓을 했지.’
비록 자의는 아니었다지만 자신이 분명 마왕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은 맞았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그 사실에 대해서 하현은 완전히 죄책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와 동화된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녀석에게 죽어주는 게 옳은 걸까?’
마왕에게 패배한다고 해도 하현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고, 마왕이 본 인격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아마 본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마왕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취하게 되리라.
‘그걸로…… 그에 대한 속죄가 될까.’
수백 년간 괴로웠던 그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까. 하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왕을 바라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건…… 단순한 도피야.’
몇 번이고 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현상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없다고, 그저 본래 그렇게 예정되었던 것처럼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일이라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마왕에게 일부러 죽어주는 것은 책임에 대한 회피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을 증오하는 마왕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기에 그런 것뿐이다.
“……들이지…….”
“음?”
고개를 숙인 하현이 중얼거리자 마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뜬 하현이 마왕을 바라보았다. 얼마만큼 자신에 대한 증오를 가졌는지 알 수는 없다. 방금 전 맛본 편린만으로도 두려워진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 또한 자신이니까.
“…….”
하현의 두 눈을 정면으로 본 마왕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다짐을 하고 있었는지 그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어본 마왕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누가 이겨도 후회가 없을 싸움이 되겠군.”
콰앙!!
두 사람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서로를 향해 격돌했고, 두 주먹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주먹이 서로를 후려치며 주변의 공기가 멈췄다.
‘공간을 점한다.’
하나의 뜻을 품으며 주먹을 휘두른다. 이미 서로가 필살의 일격을 준비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승리는 더욱 정교하게 기술은 준비한 자가 가져가게 되리라.
‘정면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없겠지.’
비록 서로 동화되며 공유한다 하더라도 직접 기술을 만들어낸 마왕에게 이길 수는 없다. 아마 이대로 주먹을 맞부딪친다면 자신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그 허를 찌르는 일격.
‘가능할까?’
단순히 짧게 생각만 했던 일이다. 수백 년간 단련되어 온 기술을 그렇게 쉽게 파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어렴풋이 그 속내를 읽은 마왕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면에서 기술을 파훼해 온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원하는 바다. 자신이 익힌 이 기술이 그리 단순하게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생각이 스치고, 주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간을 점한다.’
‘공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왕이 깔아둔 흐름을 타고 앞으로 전진해간다. 뚝뚝 끊어지듯 몇 번이고 묶일 뻔했지만, 하현의 두 주먹은 옭아매려는 공간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을 가른다!’
흐름 속을 타고 내질러진 마왕의 주먹이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하현에게 내질러졌다. 그 모습에 하현은 앞으로 내질러졌던 주먹을 뒤로 빼냈다.
‘시간을 멈춘다.’
하현의 움직임으로 일대의 흐름들이 뒤바뀌었다. 시간을 가르며 내질러지던 마왕의 주먹이 붙잡혔고, 그 사이에 하현의 주먹이 앞을 향해 내질러졌다.
푸욱!!
심장을 꿰뚫은 하현의 일권. 완벽한 파훼와, 완벽한 일격이었다.
“쿨럭!”
피를 토한 마왕의 몸이 조금씩 옅어지며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결된 하현의 몸 안을 향해 천천히 스며들어 갔다.
“……감당할 수 있겠나?”
몸이 조금씩 분해되며 마왕을 깨달았다. 자신의 안쪽에 얼마나 깊은 원한과 분노가 쌓여 있었는지. 그런데 과연 이걸 당사자가 받아들이고, 이입하면서도 참아낼 수 있을까.
“힘들겠지.”
내뻗은 주먹을 거둬들인 하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아마 괜찮을 거야.”
시간이 흐르면 분명 서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이 흔들리더라도, 주변에 다른 이들이 분명 도와줄 것이다.
그 뜻을 전해 받은 마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는 이제 좀 천천히 쉬면서 살아라…… 그게 내 소원이었거든.”
하루를 침대에 누워 무의미하게 보내고, 맛있는 거나 찾아 먹으면서 지내는 유유자적한 삶. 마왕이 되었던 최하현이 오래전에 가졌었던 유일한 소망이었다.
후웅-
마왕의 몸이 모두 빛으로 변하고, 하현의 안쪽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건네받은 하현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나도…… 그게 소원이었어.”
마왕이 사라지면서 마계의 풍경이 조금씩 녹아내리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왕의 곁을 집요하게 따라붙었던 마계가 드디어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쉰 하현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뒤로하고 온 동료들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모두 각오한 일이야.’
스스로를 타이른 하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펼쳐진 것은, 어두운 차원의 틈 속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시체였다.
“…….”
그 광경에 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토막 나고 온몸이 박살 난 채로 널브러져 있는 마왕군과 그 중심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지현. 그녀를 향해 다가갈수록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현 씨…….”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몸 곳곳에 있는 검상과 흘러내린 피가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해줬다.
지현에게 다가선 하현은 그녀를 편하게 눕혀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에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앞으로 향했다.
“흑월 씨…… 아민 씨…….”
검으로 땅을 지탱한 채 몸에 검을 관통당한 채로도 굳건히 서있는 흑월, 몸의 반이 화상으로 일그러졌음에도 끝까지 지팡이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는 아민.
그 모습에 미칠 것 같을 정도로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불간섭에 의해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슬픔조차도…… 억제되는 건가.’
평소에는 그렇게 고마웠던 불간섭이지만, 지금만큼은 조금 그 존재가 너무나도 허탈했다.
“…….”
마음이 강제로 추슬러진 하현은 두 사람의 시체를 가지런히 눕혀주고 걸음을 다시 옮겼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졌던 전쟁터가 나타났고, 수많은 시체가 하현의 눈에 보였다.
팔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지호, 전신의 곳곳이 그림자로 잠식된 채 쓰러진 민철, 그리고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장과 강철, 메이룬, 브라스마티.
그 광경에 하현은 덤덤하게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제는 고철덩어리로 변해 버린 아퀼로의 앞에 멈춰 섰다.
‘아퀼로.’
마음속으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동력원마저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린 아퀼로는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
생존자라고 보이지 않는 처참한 광경. 그 속에서 하현은 깨달았다. 함께 돌아가자고 했던 그 누구도, 이곳에서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힘드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그 광경을 직접 보게 되자 하현은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아마 불간섭이 없었다면, 이곳에서 곧장 오열했으리라.
‘가자.’
하현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걷고, 또 걸으면서 방금 전에 봐온 광경들을 되풀이한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벌였던 마지막 전쟁. 그 결과 세계는 구했지만, 그들 모두가 죽었다. 과연 이 일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모두가 살아남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더 훌륭한 승리가 되었을 것이고, 정말로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것일까.
“이런 결말은…….”
이런 형태의 끝맺음은 원치 않았다.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면 평화로운 세계가 자신을 맞이할 테지만, 하현은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살리고 싶나?’
내면에 흡수된 마왕의 기억이 속삭였다. 그에 하현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바라보았다.
‘쉬운 방법이 있지. 하지만 너는 그만큼 너 자신을 포기해야 할 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하현이 의아해하는 사이, 아직 속에 남아있던 마왕의 인격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 부어 시련을 생성해냈다.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페젤론에서 수천 번이고 시련을 사용해온 마왕은 그 메커니즘에 가장 근접해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시련에 얼마나 대가가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진정한 승리]
동료들과 함께 최후의 전쟁을 맞이한 당신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각오했던 일이지만 완전한 승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바치고 진정한 승리를 손에 얻으십시오.
난이도 : 없음
보상 : 부활
-시련을 수락하는 즉시 스킬 ‘불간섭’이 소멸됩니다.
“…….”
눈앞에 떠오른 시련창에 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물건. 세계의 법칙마저 거스르며 적용된 막강한 힘.
그 불간섭을 받쳐 동료들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시련도 함께 사라질 거다. 그 전에 선택해. 네가 가지고 있는 불간섭을 바치고 동료들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불간섭을 가지고 세계로 되돌아갈 것인지.’
불간섭만 있다면 하현은 그 어떤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계에 군림하듯 살아갈 수 있다. 가히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한 힘.
“수락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하현은 망설임 없이 시련을 수락했다. 전지전능한 힘보다도 하현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하는 진정한 승리였기에.
-시련을 수락하셨습니다.
-시련이 완수되셨습니다.
몸 전체를 언제나 든든하게 둘러싸주던 불간섭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하현에게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불간섭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현의 뒤편으로 위화감이 생겨났다. 이제는 억제되지 않는 감정에 하현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기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해명할 거리가 늘었네.”
자신이 죽었음을 알고 있는 지현이 쓰게 웃어보였다.
“엄청 뜨거웠어요.”
“힘들었다.”
아민과 흑월이 하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도움은 된 것 같군요.”
“나는 문 연 것 빼고는 눈에 띄는 활약도 없었군.”
“살 날 얼마나 남았다고 또 이렇게 살아나는구만.”
민철과 지호, 강철은 죽기 전의 기억과 되살아난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하현을 바라보았다.
“어, 어…… 저희는 살아나도 되는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되살아날 줄은 몰랐다는 듯 회장과 메이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페젤론의 인물들이 되살아나 그 뒤에 서있었다.
「아…… 이거 몸체는 어느 세월에 다시 만드나. 꽤 즐거웠었는데~」
귓가로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퀼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뒤편으로 북적거리는 이들의 모습에 하현은 수많은 감정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것에 대한 미안함, 스스로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시 만난 것에 대한 슬픔과 기쁨. 그 뒤죽박죽으로 엉킨 감정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말해.”
옆에 나타난 아퀼로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두드렸다. 그 말에 하현은 자신을 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세계로 와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회식 가죠. 비싼 곳으로.”
그 복잡한 속마음을 표현했다기에는 정말로 실없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