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왜 그러지?”
움직임을 멈춘 하현의 모습에 마왕이 자세를 풀고 덤덤하게 물었다. 여기저기 빈틈이 보일만큼 무방비한 모습이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 빈틈은 언제라도 메워질 수 있는, 사실상 빈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싸워 봐야…… 내 한계를 느낄 뿐이지.’
하현과 마왕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상태였다. 마왕의 실력을 보면 하현은 절대로 피해를 줄 수 없었고, 마왕은 불간섭으로 인해 하현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나마 다른 방법이라면 방어전환을 힘으로 하는 것이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바로 죽는다.’
이전의 마왕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때리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한 하현은 마왕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을 봤나?”
“봤지.”
하현의 물음에 마왕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말인즉 자신이 마왕의 힘을 알듯이 마왕 또한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징벌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이전처럼 운 좋게 징벌을 통해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란 보장도 사라졌다. 그 말에 하현은 순수하게 마왕과 맞서 싸울 것을 포기하고 자세를 풀었다.
“뭐 하는 거지?”
완전히 적의가 사라진 하현의 모습에 마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본 하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을 알고 싶다…… 최하현.”
“…….”
하현의 말에 마왕의 눈이 흔들렸다. 이름을 잃고 마왕이라 불린 지 수백 년.
기억을 떠올린 뒤 처음으로 타인에게 듣는 자신의 이름에 마왕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알고 싶다는 거지.”
“나는 네 기억을 봤지만, 완전히 알고 있지는 않아.”
하현이 마왕의 기억을 본 것은 대부분 편린적인 것이었다.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가, 마계에서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런 상황을 파악할 정도.
마왕이 이곳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건너왔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건너올 생각을 품었는지 그게 알고 싶다.”
하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빛을 잃은 것처럼 탁했던 마왕의 눈.
하지만 지금은 아주 희미하게 빛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온화하게 대화로 해결될 수도, 그게 아니라도 자신의 제안이 통할지도 모른다.
하현의 물음에 마왕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말에 하현의 두 눈이 커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은 것인데 기껏 나온 말이 아무 생각이 없다니.
“네 기억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은 내가 이 세계를 정복하고 마족들을 번성시킬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더군.”
그것이 널리 알려진 이유였지만, 지금의 하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마왕이 알지 못했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 그냥 마족들이 원하는 대로, 페젤론과 함께 멸망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지. 그런 거창한 목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왕의 덤덤한 말에 하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거짓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이곳으로 온 거지? 네가 이곳으로 건너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 알고 있잖아.”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하현의 질문에 마왕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 보였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분노가 아닌, 그런 질문을 받아야 만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씁쓸한 미소.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싶다는 게 잘못된 것인가?”
“…….”
마왕의 말에 하현의 입이 막혔다. 어렴풋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
하지만 그것을 직접 듣게 되자 가슴 안쪽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네 기억과, 내가 그곳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대강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해서든 내세계로 침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의 틈에 들어선 마왕. 하지만 그는 이곳을 향해 건너오면서 하현에 기억을 몇 번이고 접했다.
그리고 고향에 퍼져 있던 괴물과 던전들의 유래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바로 그 원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내 힘을 올바른 곳에 쓰려고 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생각을 깨고 모든 이들을 도우려고 했지.”
그 결심을 한 것이 바로 공방전환을 하현이 처음 사용한, 바로 최초로 기억이 스며들어 온 날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거듭해서 기억이 건너오면서 바뀌어 갔다.
“그런데 내가 건너가는 것 자체만으로 세계가 멸망한다. 그 사실을 접했을 때는 머리가 복잡하더군.”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허탈함도 밀려왔다. 자신을 이런 위치로 만들어버린 지금의 하현이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갔다.
“그냥…… 그냥 이제는 모든 것이 허탈해. 그래서 이전처럼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마왕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대변자가 되었다. 자신의 안에 남아 있는 최하현이라는 편린의 대변자가 되어, 모든 가치관을 무시하고 그저 본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설령 그로 인해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그러니까…… 자살을 권유하더라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거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니까.”
마왕의 말에 하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소 달랐지만 거의 비슷했다.
가장 아니었으면 했던 모습으로 마왕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방법뿐이야.’
주먹을 꽉 움켜쥔 하현은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안이 하나 있다.”
“뭐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마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하현은 숨을 삼키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시련을 하나 하지. 너도, 나도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는 만족할 수 있는 시련을.”
“시련……?”
“그래.”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고 했던, 최후의 방법. 하지만 이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하현은 체념하듯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듭하며 시련을 생성했다.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한 사람]
당신은 자신의 힘, 기억, 영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전투를 스스로 자청했습니다. 상대가 수락하는 즉시 전투가 진행될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을 다잡으십시오.
난이도 : 없음
보상 : 생존
-시련을 수락하는 즉시 상대와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목숨을 잃는 즉시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가 가져갑니다.
시련을 정보를 읽은 마왕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것이 어떤 종류의 시련인지는 곧장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놀란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를 막아야만 해. 비록 나로 인해 너라는 존재가 생겨났다고 해도, 뻔뻔하게 그렇게 할 거야.”
이기적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죽게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마왕을 죽여야만 했고, 죽일 수 없다면 그 존재라도 없애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둘의 존재를 하나로 합하겠다는 거냐?”
두 사람이 서로 동일 인물이기에 매끄럽게 가능한 시련. 그것은 바로 승자인 한 사람을 유일한 최하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누가 이기든 페젤론을 몰고 오는 마왕 최하현이라는 존재는 사라져. 네가 시련으로 만들어낸 차원의 틈도 사라지고, 페젤론 또한 본래대로 사라지겠지.”
“…….”
차원의 틈을 열고 페젤론을 안고 오는 것은 마왕 최하현이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합하게 되면 그 개념이 모호해지면서 그 두 가지 현상을 모두 막아낼 수 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어느 쪽 최하현이 주체가 되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너에게는 불간섭이라는 힘이 있는데…… 이 승부가 끝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능해.”
마왕의 말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을 수락해서 우리가 동화되면…… 아마 네게 불간섭의 효과는 없어질 테니까.”
불간섭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다른 차원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힘이다.
만약 마왕과 하현의 몸이 동화된다면 마왕에게는 더 이상 불간섭이 무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하현의 말에 마왕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힘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봐도 하현의 힘은 마왕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일방적으로 압도당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야.”
그 단호한 모습에 마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시련을 수락하셨습니다.
알림창과 함께 두 사람의 몸에 옅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빛은 실처럼 변해 서로를 향해 다가갔고, 두 사람의 몸을 연결시켰다.
‘이건…….’
그 순간 하현과 마왕의 머리 안으로 선명하게 기억이 스며들어 왔다. 그냥 단순히 기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억들을 느끼며 두 사람은 주먹을 쥐었다.
“네가 죽는다고 해도…… 완전히 죽는 것은 아니겠지.”
하현을 바라본 마왕이 중얼거렸다. 서로를 죽이는 승부가 아닌 누가 주체가 되느냐의 싸움. 결국 그 누구도 죽지 않는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전력으로 가겠다.”
자세를 잡은 마왕의 몸에서 마기와 투기가 일렁였다. 수백 년간 단련하며 응축된 기운이 마왕의 몸에 둘러졌다. 그 압도적인 기운 앞에 하현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의 긴장이 한껏 높아져 가던 그때.
파앙!
그 긴장감의 선을 끊어내듯 마왕의 몸이 하현을 향해 쇄도했다. 질주와 동시에 내질러진 주먹은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처럼 강력하며 빨랐다.
‘끝이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입어도, 레벨을 올렸어도 하현은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주먹.
마왕은 이 일권에 하현의 머리가 터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로 그때.
후웅!
“……?!”
마왕의 주먹은 정확하게 하현의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순한 회피였지만, 본래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현상. 거기에 마왕이 놀라기도 전에 하현의 주먹이 먼저 움직였다.
퍼억!!
“컥!!”
가슴을 후려친 일권.
그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힘과 몇십 년 만에 느껴보는 통증에 마왕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건 도대체…….’
있을 수 없는 회피와 느껴져선 안 될 통증. 그 믿기지 않는 상황에 마왕은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의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
‘동화…… 동화!’
그제야 마왕은 하현이 말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달았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철저하게 단련한 자신을 상대로 하현이 이길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기억과 힘을 동화시켜 그 차이를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자기와 비슷하거나 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겠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본래라면 절대로 뚫을 수 없는 방어력을 뚫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안 될 거다.”
아마 공유로 얻을 수 있는 힘은 딱 여기까지일 것이다. 마왕과 자신의 힘의 딱 절반, 서로 비등할 수 있는 수준 정도다.
그것만으로도 하현은 자신이 있었다.
불가능한 승부를 여기까지 끌어올렸으니 이 뒤에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
하현의 말에 마왕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더 이상 압도적인 힘의 차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순간의 실수가 큰 피해로 다가오는, 처절한 투쟁으로 바뀌었다.
그 사실에 마왕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런가.”
시련의 동화 때문일까. 잊었던 긴장감이, 전투의 고조감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지막에 걸맞은 최후의 전투에 마왕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전력으로 간다.”
마왕과 하현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