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방어력 무한-155화 (155/158)

# 155

모든 공간이 합쳐지고, 협회의 병력과 마왕군은 여기저기 뒤섞인 채로 다시금 나타났다.

수적이나 전체적인 질로 보면 마왕군이 압도적이었지만, 두 명의 존재가 선공을 가로막았다.

「오랜만이네.」

[이제야 제대로 힘을 낼 수 있겠군.]

바다의 안에 들어선 아퀼로와 화산지대의 위에선 브라스마티.

그 모습을 본 마족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력을 다하는 색의 대표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전쟁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멈춰버린 전쟁터의 안. 그 전쟁터의 외곽 지역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여전히 자신의 기운을 뿜어내며 대치하고 있었다.

“이걸 노리고 있었나…… 결국 의도대로 됐군.”

마기로 일렁이는 검을 거둬낸 그라칼이 중얼거렸다.

주변을 바라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이 근처에 있던 적의 병력들이 모두 죽어 있어야 했다.

“하아…… 하아…….”

하지만 저 눈앞에 있는 성녀가 자신을 붙잡으면서 일이 모두 꼬여 버렸다.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라칼은 이내 깔끔하게 접어냈다.

‘성녀의 목숨치고는 그리 아깝지 않은 대가지.’

그라칼은 덤덤한 눈으로 메이룬을 바라보았다. 신성력으로 치료되기는 했지만 내부에는 마기의 잔재가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신성력을 짜낸 대가로 이미 그녀는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인 것이다.

“크읏……!!”

우웅!!

다시 한 번 쥐어짜내진 생명력에 따라 메이룬의 신성력이 들끓었다. 수십 개의 황금색 칼날이 그라칼을 노리며 쇄도했고.

파앙!

그라칼이 무심하게 휘두른 검 앞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메이룬을 뒤로한 채 그라칼은 고개를 돌렸다.

“색의 대표가 둘…… 과연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군.”

신에 가까운 드래곤. 하지만 그 둘을 본 그라칼은 그다지 긴장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희생을 냈었지만 그들 모두 과거에 자신들에게 쓰러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메이룬을 바라본 그라칼이 물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활약했던 자다. 목을 치기 전에 유언 정도는 들어주더라도 괜찮으리라.

“…….”

그 물음에 메이룬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지만, 저 먼 곳에는 아퀼로와 브라스마티가 굳건히 서있었다.

‘이제…… 괜찮아.’

그 모습을 본 메이룬의 몸에 긴장이 풀렸다. 오직 의지력만으로 붙잡았던 생명력들이 더욱 빠르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이제 괜찮을 거야.’

여태까지 지은 죄들에 대한 약간의 속죄라도 되었을 것이다. 메이룬은 아무런 말없이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말은 신에게인가, 성녀답군.”

그 모습을 본 그라칼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생명력이 닳아 사라지기 직전에 올리는 마지막 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그라칼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회식 못 가서 죄송해요. 대신…… 저 말고 다른 분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빌게요.’

너무나도 사소하고, 별거 아닌 기도.

최후에 올리는 기도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메이룬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서걱!!

그라칼의 검이 움직이고, 메이룬의 목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다른 녀석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도 알리지 못했군.”

구석진 장소였기에 그 누구도 메이룬의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덤덤하게 그녀의 시체를 바라본 그라칼은 고개를 돌려 다음 목표를 물색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후우웅!!!

“……?!”

등 뒤에서 갑자기 느껴져 오는 막대한 신성력의 파동. 그라칼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신성력은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메이룬의 시체는 황금색 빛 덩어리로 변했고, 이내 하늘로 솟아오르며 구체로 변했다.

전쟁터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 모습에 고정되었다.

“저건…….”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녀가 지니고 있던 신성력의 근원이자 죽은 직후 발휘되는 마지막 가호.

그것이 발동되는 징조였던 것이다.

파아앙!!

신성력의 근원은 합쳐진 공간 전체에 흩뿌려졌다. 협회의 병력 머리 위로 신성력들이 스며들자 상처가 치료되고 힘이 나기 시작했다.

메이룬이 성녀로서 주는 마지막 가호. 그 힘을 느낀 모두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그런 겁니까.”

몸에 서려진 가호에 멀리 떨어져 있던 민철의 표정이 굳었다. 가호 안에 담겨져 있는 아주 작은 감정.

그것이 메이룬이 어떻게 되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저 또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했다면, 자신도 더 이상 힘을 아낄 처지가 아니다.

품에 손을 넣은 민철은 검은색 발톱을 꺼내 들었다. 과거 하현이 아데브에클을 죽이고 손에 얻은 그림자 발톱.

푸욱!!

민철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배에 쑤셔 박았다. 발톱이 조금씩 액체로 변해 갔고, 민철의 전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전신의 몸이 재조립되어 가는 감각. 그에 민철은 이를 악물고 신체의 변화를 계속해서 재촉해 나갔다.

-일정시간 동안 아데브에클의 권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데브에클에게서 얻은 그림자 발톱. 그것은 바로 수명을 깎아먹는 것으로 아데브에클이 지닌 권능을 일부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런 감각을…… 계속해서 겪으면서 싸우셨던 거군요…….】

이번 변신으로 날아간 수명만 3분의 1은 될 것이다. 그 불쾌한 감각에 민철은 이를 악물며 눈앞의 적들을 바라보았다. 이 고통도 메이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이에 대해 앓는 소리를 하는 사이 적들을 도륙 내는 것이 더 우선이리라.

【그녀의 목숨값이 그렇게 싸지는 않을 거다!!】

민철의 포효와 동시에 그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 순간 지면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칼날들이 마왕군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고, 그들을 집어삼키며 그림자 병사로 만들어냈다.

[아군이라지만 꺼림칙하군.]

멀리서 느껴지는 아데브에클의 편린에 브라스마티는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거기까지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망각하지는 않았다.

[로드의 세계는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다!!]

브라스마티의 포효와 동시에 화산지대가 뒤흔들렸다. 그의 몸 주변으로 온도가 끝없이 올라갔고, 주변의 용암이 그에 호응하듯 움직였다.

화산지대 안에 브라스마티가 나타나면서 본래 있던 마왕군들은 곧장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을 대신해서 그를 죽이기 위한 다른 병력들이 안쪽으로 투입되었었다.

[저건…….]

화산지대의 안으로 당당히 들어온 마왕군.

그중에서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들린 붉은색 창을 보고 브라스마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지만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창에서 자신의 신체와 같은 기분이 느껴지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몸인가.]

“그래, 너를 죽이고 얻었지.”

브라스마티의 질문에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디켈론이 대답했다. 그라칼과 같이 막강한 힘을 가진 마왕군의 4대 무장.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브라스마티로 만들어낸 무구였다.

“그때의 전투도 화산지대에서 벌어졌었지.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이니 얼마나 발버둥칠지는 모르겠군.”

씩 웃은 디켈론이 창을 움켜잡으며 조소를 지었다. 당시 브라스마티를 잡기 위해 수만의 병력이 희생당했지만, 지금의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그 당당한 모습에 브라스마티는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화산지대 전체가 뒤흔들리는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를 느낀 아퀼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조금 예상 밖이네.」

자신의 앞에 선 두 명의 사내. 각각 북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총사령관들이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마찬가지로 무기가 들려 있었다.

푸른색의 장검과 갈색 낫. 그것이 무엇을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아차린 아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색의 대표들이 모두 무기가 되어버리다니. 마왕군이 정말 강하긴 했나보군.」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쓰러뜨렸지요.”

“네놈은 마왕님이 단신으로 죽였지만 말이다.”

중얼거리는 두 명의 모습에 아퀼로는 자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바다 속이었기에 자신의 권능은 최대치였지만 브라스마티의 권능은 상당히 감소된 상태.

하지만 어느 권능이든 극대화되는 것이 훨씬 나았기에 바다라는 장소를 선택했다.

‘하지만…… 쉽게 이기기는 힘들겠네.’

두 사람만으로도 힘들어 보이지만 그들의 뒤에 서있는 병단들 또한 만만치 않다.

협회의 병력이 최대로 발휘되었지만, 마왕군의 힘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부정적인 상황이었지만, 아퀼로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왕만 쓰러뜨린다면, 괜찮을 거야.’

이 전쟁의 승패는 마왕과 하현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하는가, 거기에 달려 있는 문제다.

마왕을 향해 달려가는 하현의 다급한 마음을 느끼며 아퀼로는 태세를 갖춰갔다.

이럴 때일수록 절망하는 것이 아닌, 하현이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뒤에서 전력을 다해 받쳐줘야 하는 것이다.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거다.」

***

마계로 들어선 하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과 낯이 없는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어디에도 생명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은 매서웠고, 기온은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모든 생명체를 박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끔찍한 세계.

‘여기가…… 마계인가.’

과연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흐릿한 마왕의 기억에 하현은 의아함을 느끼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느껴졌다. 이 거친 폭풍의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후웅!!

폭풍을 뚫고 지나오자 하현의 눈앞으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환상 속에서,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사내.

마왕이었다.

“왔나.”

하현을 발견한 마왕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과 동일 인물이지만, 무엇하나 닮은 것이 없다. 그 모습에 하현은 이질감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말 그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마왕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죽여야만 한다. 그 다급한 태도에 마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담담하게 이야기한 마왕은 천천히 자신의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하현을 바라보며 죽이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후웅!!

“……!?”

그리고 찾아온 막대한 기운에 하현의 몸이 굳어버렸다.

‘이건…….’

단순히 자세를 잡고, 공격을 취할 기세를 보였을 뿐이다. 그저 그것뿐인데도 하현은 자신이 압도되어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길 수 없다.’

마왕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