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다른 공간들보다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공간.
그 삭막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 무엇인지 하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계…….’
마왕에 기억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끝내 멸망해 버렸던 세계.
마왕이 짊어지고 있는 마계의 모습에 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다 와가는 건가.’
수많은 사람을 희생하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희생이 더 커지기전에 얼른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어야만 한다. 하현이 굳은 다짐을 하며 아래를 내려 본 순간.
“잠깐!”
곁에서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던 흑월이 갑작스럽게 아민을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자신의 검을 휘둘렀고.
카앙!!!
쇳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살짝 터져 나왔다. 흑월의 검과 맞부딪친 물건을 본 하현은 두 눈이 커졌다.
‘창?’
투박하게 생긴 회색빛의 창. 그 모습에 하현은 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건…….’
창을 날린 곳에는 회색로브를 입은 자와 검은색 갑옷을 입은 수백의 병사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의 두 눈이 찌푸려졌다.
언뜻 보아도 검은색 갑옷을 입은 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회색로브의 뒤에는 방금 날아온 창이 수백 개나 떠 있었다.
‘저 녀석이 공간을 조종한 마법사인가?’
공간 안쪽이 아닌 차원의 틈에 서있는 것도 그렇고 방금 전에 보인 창의 위력을 보면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현이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키이잉!!
회색로브의 뒤로 펼쳐져 있던 창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겨눠졌다.
그 이상을 알아차린 하현일행이 모두 요격 자세를 취했다.
캉!!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창들은 매서운 속도로 하현일행을 향해 쏘아졌다.
방금 전의 속도로 날아오는 창이 수백 개. 결코 가볍지 않은 숫자에 하현이 아민의 손을 꽉 잡았다.
후웅!!
창에 대항하듯이 펼쳐지는 수백 개의 마법진.
하나하나가 막강한 위력이 지니고 있었기에 저런 창 하나쯤은 가볍게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아민의 두 눈이 번뜩임과 동시에 마법진에서부터 막강한 위력의 마법들이 창들을 향해 쏟아졌고.
파앙!!
“……?!”
창들은 마법을 박살 내며 하현 일행을 향해 쇄도해 왔다.
“비켜!”
그 창의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지현과 흑월이었다.
지현의 몸이 붉은색으로 타올랐고 흑월의 검에서 검은색 강기가 빛을 뿜었다.
카카캉!!
두 사람의 주먹과 검이 잔영을 남기며 휘둘러지며 창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하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힘을 사용한 거지?’
창들은 아민의 마법을 깨부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시하면서 지나왔다.
도대체 무슨 힘을 사용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현이 당혹스러워하는 두 사람에 의해 모든 창들이 치워졌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적들과 거리가 좁혀져갔다.
“어떻게 할 거야?”
“결정해라.”
지현과 흑월은 적들을 경계하며 하현에게 물었다.
그 질문의 의도는 다 같이 적들을 쓰러뜨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앞과 같이 자신들을 두고 전진할 것인가.
그에 하현은 눈앞의 적들을 바라보다가 곧장 결론을 내렸다.
“아민 씨의 힘을 이용해서 적의 숫자를 조금만 줄이고 가겠습니다.”
지금 이대로 떠맡기고 가면 이 세 명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기에 하현은 아민과의 협동으로 아주 조금만 거들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민의 무영창으로 인해 마법을 사용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현의 결정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은 우리가 막아낼 테니 모조리 쓸어버려.”
“맡겨주세요!”
지현의 말과 동시에 아민의 주변으로 거대한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방금 전에는 창을 막기 위해서 사용했기에 모두 빗나갔지만, 목표를 바꾸면 크게 문제도 없다.
자신들이 표적이 되었음을 깨달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꺼냈고, 회색로브 또한 방금 전에 휘둘렀던 창들을 다시 꺼내며 요격을 준비했다.
콰아아앙!!
마법진으로부터 막대한 섬광이 적들을 향해 쏟아졌고, 거기에 적들이 대항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색로브의 창이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들을 지워내고 다른 이들도 잘 대항하는 듯했지만.
“크아아악!!”
계속해서 강력한 마법을 쏟아내는 아민에게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계속되는 수비 속에서도 병단들은 조금씩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마법을 지워내는 회색로브의 창들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지현과 흑월이 막아주었기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 긴장했던 것에 비해 일이 쉽게 풀려 나가자 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힘이군.”
바로 그때, 회색로브의 안쪽으로부터 음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파칵!!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그와 동시에 노도와 같이 쏟아지던 아민의 마법들이 갑작스럽게 멎었다.
“어?”
손을 내뻗고 있던 아민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현의 마나는 계속해서 느껴진다. 하지만 무영창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민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그녀의 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침식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하루 동안 스킬 무영창을 쓸 수 없습니다.
“……!!”
알림창의 글자에 아민은 놀란 눈으로 회색로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조금 익숙한 말라비틀어진 나무 지팡이를 발견했다.
“하현 씨! 저건…….”
“…….”
아민의 가리킴에 지팡이를 발견한 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지팡이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하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탄식의 세계수…….’
토벌자들이 얻은 장비들은 모두 페젤론에서 실존했었던 장비들이 대다수였다.
그 말은 토벌자들 말고도 그 무구를 지닌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설마 마왕군의 마법사에게, 거기다 강력한 힘을 가진 탄식의 세계수일 것이라고는 하현은 생각도 못했다.
“이걸로 끝났군.”
마법이 멎자 회색로브가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그들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견뎌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저 마법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다.”
후우웅!!
회색로브의 손이 움직이자 다시 한 번 생겨난 창들이 날카롭게 빛냈다.
그리고 침식의 보옥이 불길한 빛을 발하며 창들에 일렁였다.
‘보옥의 힘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무구에 대한 숙련도 자체도 다르다. 그 모습에 하현은 방어전환을 해제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민의 마법으로 수가 줄었다 해도 저 정도 수와 실력이라면 위험하다.
싸우기 위해 하현이 나서려 할 때, 아민의 손이 하현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하현은 의아한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았다.
“안 돼요.”
무영창이 사라져 당혹스러워했던 아민은 어느새 차분하게 변해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이미 하현이 어떻게 하려는지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거기서 싸울 상황이 아니시잖아요.”
“하지만 저 수는…….”
강철 때와는 다르다. 강철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 병력은 그런 생각조차 안 든다. 무조건 죽을 것이다.
거기다 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적당해질 때까지만 함께 싸우겠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아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안 돼요.”
“만약을 위해 지현과 함께 가라. 여기선 내가 아민과 처리할 테니.”
하현에게 담담하게 말한 흑월은 지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말에 하현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지현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현을 잡았다.
“이제 와서 이러면 모두 물거품이야.”
“…….”
짧은 한마디.
하지만 하현은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민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하현의 손을 꼭 잡아준 아민은 천천히 손을 때내었다. 입가를 꾹 깨문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헛소리도 가지가지로 하는군.”
마왕에게로 향하려는 하현의 모습에 회색로브가 비웃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창들을 비롯해 강력한 마법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이전의 아민이라면 몰라도 지금 아민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그 무지막지한 마법에도 아민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굳건하게 바라보았고.
“꺼져라.”
그녀의 곁에 있던 흑월의 검이 휘둘러졌다.
서걱!!
소름끼치는 절단음.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현을 막기 위해 휘둘러졌던 모든 것들이 잘려 나갔다.
그 모습에 회색로브가 경악하자 흑월이 자신의 검을 움켜잡았다.
다른 이들보다도 레벨이 높았던 흑월. 세계의 법칙이었던 라젤린마저 쓰러뜨리고 홀로 600에 거의 근접하게 된 그녀는 하현을 제외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자였다.
“지나가실 수 없어요.”
아민의 손안에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가 움켜쥐어졌다. 하현에게 양도받은 세계수의 가지.
그 지팡이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챈 회색로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둘을 뒤로한 하현과 지현은 빠른 속도로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지현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역시 한 부대만 있었을 리가 없지.”
마계의 바로 앞, 얼핏 봐도 방금 전의 부대와 비슷한 수준의 병력들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었다.
비록 그 회색로브와 같은 마법사는 없었지만, 지현 혼자서 감당할 병력은 아니었다.
“……가.”
하지만 지현은 병력들을 바라보며 하현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또다시 선택을 강요당한 하현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지금 이 선택이 맞는 걸까.
그냥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거대한 마계가 그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몇 번이고 말해줬다.
마왕은 모든 전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든지 참가해서 학살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려주고 있을 뿐이다.
“미안해. 목숨 내던지는 거 고친다는 약속 못 지켜서.”
“…….”
지현의 말에 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
하지만 그 말에도 하현은 주먹을 꽉 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잘 결정했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현은 피식 웃으면서 하현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
생각지도 못한 행동,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촉. 거기에 하현이 조금 당황할 때 지현이 멱살을 놓아주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일에 대한 해명은, 일이 다 끝난 뒤에 하자고.”
콰앙!!
수줍지도 않은지 호쾌한 미소를 지어보인 지현은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현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눈깔 굴리면 뒈진다!!!”
콰아아앙!!
하현을 붙잡으려는 병사들의 모습에 지현의 몸에서 혈화광권이 극성으로 발휘되었다.
휘둘러진 주먹에 세 명의 목이 날아갔고, 하현을 막으려던 이들의 이목이 모아졌다.
그사이 하현은 지현을 뒤로 한 채 마계를 향해 달려갔다.
‘반드시 죽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절대로 실패할 수는 없다. 이를 악문 하현은 마계의 안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사라진 하현의 모습에 지현은 약간 안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계로 들어선 순간 포기했는지 100명이 조금 넘는 병사들은 자신을 포위했다. 대강 봐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수의 차이.
우드득-
“임자 있는 몸이니까…… 너무 들이대지는 마라.”
하지만 지현은 주먹을 가볍게 풀어내며 피식 웃어 보였다.